왜 만난 적도 없는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 주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의 날숨이 지금 가질 수 있는 가장 따스한 것이었기에, 주자헌은 그저 상대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잠자코 기다렸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배워야 했다. 부모의 죽음에는 연유가 있을 터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너를 찾아 이 은혜를 갚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무사하기를.
언젠가 다시 만나,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네게 줄 수 있기를.

전임자가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아먹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정말로 도적놈이었다. 작정하고 털었으니 제아무리 땅이 기름진들 곳간이 비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푸른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자들이 일으킨 난으로 눈앞에서 부모를 잃고, 이름 모를 아이의 도움을 받아 삭풍을 거스르며 눈밭을 걷던 그 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어렸던 주자헌에게 책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분노를 터뜨린 순간에 과연 자신이 그 표적에서 배제되어 있었을지, 주자헌은 회의적이었다.

돌이킬 수 있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고, 지나간 시간을 붙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린 주자헌이 북명에서 보낸 나날들이 되돌아오지 않듯이.

"주인이 모르는 곳에서 썩은 부위를 도려낸다 한들 시간이 흐르면 독은 다시금 퍼지기 마련입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통치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주자헌은 자질 없는 이가 결정권을 행사하는 자리에 앉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지나치게 잘 알았다.

그는 보옥에는 썩 흥미가 없었으나, 이러한 빛깔의 보석이 존재한다면 손안에 두고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주자헌은 짧은 찰나에 지나가 버린 백은래의 밝은 표정을 본 순간 제 가슴이 뛰기 시작한 연유를 알지 못했다.

불현듯, 백은래를 보호하고 싶다는 마음이 주자헌의 내면에 차올랐다. 향주의 내정을 홀로 책임져야 하는 그 부담을 자신이 덜어 줄 수 있다면. 주자헌은 그럴 수 있었다. 아니, 주자헌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향주의 왕이었으므로.

주자헌과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다고 기화령은 생각했다. 그는 주자헌이 백은래를 향해 던지는 목소리의 떨림 속에서, 당사자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호한 감정의 새싹을 발견하고 말았다.

다만, 무언가 일이 틀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긴장감 속에서 주자헌은 백은래를 주시했다.

적막 가득한 이질적인 공간의 한가운데서 백은래가 비틀거리며 몸을 숙이고 있었다. 시간이 기이할 정도로 느리게 흘러,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만이 한층 선연했다.

어쩐지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맡은 바를 다할 뿐이다. 전란의 시대라면 모를까, 천하를 차지할 자를 결정하는 것은 백은래의 몫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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