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를 보고도 경계 하나 세우지 않은 채 눈만 깜박이고 있는 이 존재가 나라를 지키는 신수인가. 목숨을 걸고 담을 넘어 어렵게 목도한 신수에게서는 별다름을 느끼지 못하니 허무함이 밀려왔다.
거침없는 서가의 질문에 아금이 아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시원하게 터지는 웃음에 서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기억도 나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아무래도 인간과의 대화가 그리워져서 말벗이 되어 달라 청을 드리려 불렀습니다."
아금의 말에 강제성은 없었지만 신수가 원한다면 서가는 매일 이곳에 불려 와야 하리라.
‘역시 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눈앞의 귀한 신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솔직함에 더하여, ‘모쪼록 스스로.’ 라는 말을 덧붙인다면.
신수는 천혜의 존재로서 아주 오래전부터 자연스레 인간의 곁에 자리 잡았으며 자연과 친밀한 만큼 등장도 퇴장도 마치 천재지변 같아 그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
애써 얻은 신수를 죽이지 않으려는 인간과 죽지 않으려는 신수. 전대 신수의 예고 없는 단명이 이 칩거에 더욱 부채질을 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답답한 쇄국 정치 속에 이미 속부터 썩어 가고 있는 나라. 겉모양만 그럴싸하게 꾸며 놓고 타국의 사신이 올 때에만 해가 쬐는 양지의 나라라 입소문만 일으키고, 사신의 품에 공물을 안겨 주면 다인가.
오래되어 먹이 흐려진 고서에는 다 쓰러진 허수아비 같은 이 나라를 멸망시킬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이 쓰여 있었다.
그 정순함은 과연 누가 만들었는가. 서가는 튀어나오려는 반문을 억지로 참아 냈다. 여러 번 목소리를 내어 정치와 신수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묵살이었다.
같은 결말로 끝나는 승부. 마치 회귀하듯 처음으로 돌아가는 말들.
앞으로도 계속 이리 갇혀 사실 거면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일찍 생을 마감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황족의 피가 속부터 다 썩어 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이런 나라는 빨리 멸해 버리는 게 낫습니다."
언제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가 신수 때문에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이 좁은 곳에 숨겨진 고작 하나의 존재 때문에. 이런 작은 존재 하나 때문에.
얼굴을 보자마자 죽어 버리라며 막말을 쏟아 내는 무례한 태자. 햇빛 하나 들어올 틈 없이 꼭 닫혀 있는 문. 문밖까지 굳게 걸린 걸쇠.
애초에 서로 이해가 불가한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신수에게서는 감히 범인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투명하고도 견고한 벽이 느껴졌다
"춥고, 땅은 마르고. 백성들은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라 국경을 넘어 다른 땅으로 도망이라도 치고 싶어 하는데. 국경을 지키는 이로서 그들을 놓아줄 수도 없고, 오히려 잡아서 처벌을 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습니다."
‘신수께서 어찌 너 같은 팔푼이를 마음에 들어 하셨을까.’
‘저는 저 나름의 방법으로 무국을 지키고 있습니다.’
서가는 실금처럼 가느다란 흉이 남아 있는 아금의 손목을 몇 번 덧그리며 문질렀다. 신수의 회복력으로 이미 아물어 있었지만 셀 수 없이, 몇 번이고 갈라졌을 상처. 서가가 가만히 그 상처를 문지르고 있기만 하자 아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의 무력함을 타인에게 해결해 달라 요구한 서가. 자신의 무력함을 자멸적인 방법으로나마 스스로 이겨 내려 했던 아금. 당연히 서가가 아금을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정인…….’ 평생 가져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존재가 자신이 죽으면 같이 죽어 주겠단 말을 한다
오래오래 시간이 흘러 그가 수명을 다해 죽을 때 곁을 지킬 수만 있기를. 그때까지 자신이 무국을 지킬 수 있길. 그때까지 나라가 버텨 주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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