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만 배운 백성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애틋하게 마음이 쓰이는 백성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와 닿는 느낌이었다.

현이 성을 내는 횟수가 적어졌음에 기꺼워하고, 식사량이 적당해졌다는 정내관의 말에 안도하느라, 정작 아이의 가슴 깊숙이 숨어있는 두려움을 알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작은 변화에 기뻐하느라, 아이가 품고 있는 두려움의 깊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수많은 감정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그것은 미안함이기도 했고, 안쓰러움이기도 했으며, 애틋함이기도 했다. 감은 눈이 시큰거렸다.

제 마음의 동공(洞空)이 메워진 것처럼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동공을 메우고 싶었다. 두려움의 뿌리를 뽑고 싶었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는다.

한순간의 선택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다.

문득,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미친놈처럼 벌벌 떨던 자신을 꽉 끌어안아주던 따스한 체온을 되새긴다. 나를 믿으라 말하던 단단한 목소리를 되뇐다.

착실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차곡차곡 두 사람의 시간이 쌓이고 있었다.

시간이라는 것은 간혹 무서울 때가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 별 것 아니라고 치부하기 쉽지만, 세상 어떤 것보다 묵직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처음 이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건의 모든 것들에 청우는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가슴 속에 있던 커다란 동공이 조금씩 메워지는 기분이었다.

청우의 시선이 천천히 제 손등으로 떨어져 내린다. 마치 그곳에서 제 심장이 뛰고 있는 듯, 손가락 끝이 팔딱거렸다.

곧장 부딪혀 오는 노골적인 마음에 청우가 어쩔 줄 모르는 기색으로 얼굴을 붉혔다.

제가 아는 마음은 소중하게 아끼고 아끼다 더 이상 참지 못할 때쯤 한 조각 수줍게 드러내는, 그런 마음이었다.

현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기를, 그래서 언젠가는 현의 마음속에 있는 동공이 빈틈없이 메워질 수 있기를. 또한,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청우는 진심으로 기원했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제가 마음의 짐이었던 것처럼, 아버지 역시 제 마음의 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돌아오기에는 너무 먼 곳까지 와 버렸다.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앞에 무엇이 있든, 설사 그것이 높고 광휘로운 자리이든, 혹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자리이든, 저에게는 이제 앞으로 나아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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