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문제로 요동 정벌이 추진되자 이성계는 4불가론을내세우며 요동 정벌을 반대했다. 하지만 1388년(우왕 14년), 최영의 결정에 밀려 어쩔수 없이 우군도통사로 요동 정벌에 출정한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해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최영 장군을 꺾고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는 9세의 창왕을 임금으로 모셨으나, 이듬해 창왕마저도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새로이 즉위시켰다. 이후 1391년(공양왕 3년), 삼군도총제사가 되어 전제 개혁을 단행해조선 건국의 경제적 발판을 마련한 뒤 1392년(공양왕 4년) 7월, 공양왕에게 선양받아조선을 건국하고 태조로 즉위했다.
이성계는 고려와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조선에 맞는 새로운 법전을 편찬했다. 또 향교와 성균관을 건립해 유학을 진흥하면서 고려 후기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불교를 억압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나라의 기틀은 세운 것과 달리 왕위 계승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아버지인 이성계가 계비 강씨의 아들인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에 의해 제1차 왕자의 난이 발발했고, 이성계는 방석과 방번 두 아들과 정도전을 비롯한 여러 신하를 잃었다.
이성계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주도했던 이방원의 요청으로 둘째 아들 방과(정종)를다음 왕으로 결정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 후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왕위에오르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서울을 떠나 소요산과 함주 등에 머물렀다. 이때 태종(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함흥에 있는 이성계에게 보낸 신하를 이성계가 모두 죽여버렸다는 이야기에서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1402년(태종 2년), 서울로 돌아온 태조 이성계는 불교에 의지하며 세월을 보내다 1408년(태종8년)에 죽었다. 태조의 능호는 건원릉으로, 그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젊은 시절 이성계는 고려의 앞날을 걱정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 함경도 안변에서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이성계는 해몽을 잘한다는 노파를 찾아갔다. 꿈 이야기를 들은 노파는 자신이 해몽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며, 이성계에게설봉산에서 불도를 공부하는 무학대사를 찾아가라고 알려줬다.
꿈의 의미가 더욱 궁금해진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찾아가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했다. "첫 번째 꿈에서는 어떤 마을을 지나가는데 닭이 울어대고, 집집마다 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꽃이 떨어졌습니다. 두 번째 꿈에서는 헛간에 있는 서까래 3개를 등에 짊어지고 나오다가 거울 깨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대사는 서까래 3개를 가로로 맨 것은 왕(王)자의 모습으로훗날 그가 왕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덧붙여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꿈 이야기를 절대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해몽을 듣고 많은 생각에 잠겼다. 자칫 고려의 역적으로 처형될 수 있는 무서운 해몽이었다. 이성계는 고심 끝에 이 꿈을 나라를 바로잡으라는하늘의 계시로 여겼다. 고려의 많은 백성이 수탈과 학정, 그리고 외적의 침입으로 괴로워하다 죽어가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던 이성계는 고려의 신하가 아닌 새로운 나라의 군주로서 세상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성계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려준 무학대사를 위해 사찰을 세우고, 천 일 동안기도를 올렸다.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을 예언한 꿈을 해석하고 세운 사찰이라는 뜻으로이름을 석왕사‘라 붙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 이성계는 조선 건국의 뜻을 세울 수 있게해주었던 석왕사를 크게 중건하고 부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조선 건국에 크게이바지했던 태종도 조선 건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석왕사를 방문해 사찰 입구에소나무를 심고, 인근 지역의 소나무 벌채를 엄금했다. 또한 석왕사 경내에 심은 배나무에서 열린 배는 왕에게 진상하도록 해, 건국의 의미를 늘 잊지 않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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