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바로크 시대도, 로코코 시대도 아니고 지구 역사에 존재했던 나라도 아니다. 한동안 내가 미쳤나 진지하게 고민도 해 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여긴 세계사에 기록된 적 없는 진짜 낯선 세상이었다.

덕분에 곤란을 겪진 않았지만 대신 나 역시 몸 주인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없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원작의 일리야가 뭘 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일리야의 몸에 있는 이상 우리는 운명공동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일리야의 무병장수와 나의 귀가뿐.

이 원수 같은 사망 플래그는 내 손목 따위는 한 손으로도 부러트릴 수 있다는 듯 휘어잡은 채, 맹렬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눈만 움직여 나를 노려보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와 붙잡힌 손목을 번갈아 보았다. 말씀 못 해. 나도 몰라.

애초에 여긴 현대사회가 아니다. 좀 더 야만적이고, 좀 더 비인도적이며, 좀 더 무도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다

내가 충격받을 게 아직도 더 남았나? 목울대가 꿀렁이며 저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스산한 느낌이 뒤통수를 스쳤다.

일리야의 모든 행동은 철저한 계산의 산물이다. 카이사를 대하는 황녀의 태도에는 일말의 욕망도 실려 있지 않단 사실을,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조명이 대부분 꺼진 어두운 방 안에서, 일리야는 달빛만으로도 몸이 훤히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무방비하게 웃으며 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일리야의 몸을 타고 흘렀다. 매끄럽게 뻗은 팔, 진주 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는 어깨. 하얀 가슴팍 위를 대조적으로 흐르는 검은 비단실 같은 머리칼.

달뜨는 것도 흔들리는 것도 늘 자신만의 일이다. 그걸 알면서도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비참한지 당신은 모른다.
……애초에 관심도 없지.

카이사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제가 아무 짓도 못 하게 칭칭 묶어 줬으면. 머리를 쳐서 아무런 기대도, 망상도 못 하게 막아 줬다면 좋았을 텐데……

당신이 지금 내 심장 위에 손을 얹어 보았다면, 내가 고장 나서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 텐데. 당신은 늘 내게 관심이 없어.

「그대의 검이 내 심장을 꺼트릴 수 있는지 궁금하긴 하군.」
완결까지도 일리야의 시점은 드러나지 않지만, 나는 이 대사야말로 일리야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운명공동체의 무병장수를 계획하는 나의 희망찬 포부는 시작하기도 전에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설마 ‘부서’가 ‘남편’의 이음동의어인가? 이런 빌어먹을! 염병천병! 페르디난트 이 새끼가 갑자기 기사단을 빌려주겠다고 한 목적이 그거였나?

사실 명분은 1할이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이런 무서운 놈과의 인연은 이어 갈 수 없다는 생존본능이 9할이었지만.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다가온 끝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그는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아마도 이것은 심장에 박힌 가시다. 사라지는 순간 카이사 페르디난트를 처참하게 무너트릴 가장 애틋하고 고통스러운 가시.

회피하고 싶은 마음과 기대가 번갈아 찾아왔다. 카이사는 지금 절벽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일리야가 밀어버리면 죽는…….

저렇게 욕망의 항아리 같은 놈이 소설에서는 어떻게 순정 가득한 남자처럼 여주를 지켜 주는 건지 완독을 했음에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사망 플래그인 놈에 대한 경계를 풀 수는 없지만, 도의적인 책임이 내 발길을 붙잡았다.

체온을 나눠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내 상황이 좀 특수하긴 하지만, 포옹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래도 별일 아니라는 말로 스스로를 혹사시키지는 말고. 정말로 별일이 아니면 아프지도 않거든."

마음이 약해져 있고 몸도 안 좋을 때 누군가 도와주면 사람이 잠시 감성적으로 변할 수도 있지. 사람은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설령 그게 저 무시무시한 성질머리를 자랑하는 페르디난트 공작이라고 해도!

가장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그 시절 몇 번이나 그를 구해 준 존재라서, 맹목적인 무의식이 이토록 생생한 환각을 만들어냈다면…… 오랜만에 찾아온 악몽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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