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애기야, 어서 태어나라. 형아가 잘해 줄 테니까, 응?’

내가 무얼 바라 왔었지? 뭘 하려던 건가. 그건 단순히 혼자 소망한다 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었다. 설명 아닌 설득, 아니 것보다도 허락, 아니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첫 번째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도해 본다 한들, 손끝 하나로 튕겨나질 수도 있었다

바로 그날, 어서 자랐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어서 자라서 이루고 싶은 것이랄까, 무엇이 되어 어떤 일을 하고 싶다든가 하는 기대나 장래희망을 새로이 세웠다기보다는, 내내 간직해 왔던 바람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는 쪽에 가까웠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악몽이었으면 했다. 내가 꺼내들 수 있는 칼이란 고작 나를 향한 그의 행동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몇 개월 동안에 쌓인 감정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그는 물론이고 다른 가족들과의 유대관계를 과시함이 내 유일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슬프고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어지럽게 들끓었다. 오래전, 한때 내 작은 세계를 먹물처럼 캄캄하게 뒤덮었으나 마법 같은 목소리로 씨앗처럼 작아져, 이윽고 배꼽 아래 깊숙이 숨듯이 심어졌던 나겁한 마음이 순식간에 넝쿨처럼 자라 온몸을 조여 왔다.

그가 나를 세상에 불러들인 운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때 내가 품고 있었던 것들이 내 존재에 대한 불안과 설움, 그리고 수치심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요란한 울음으로 그것들을 모두 풀어내 버렸던가에 대해선 확신할 순 없지만, 그날 이후 내가 스스로를 이해하게 되었음은 분명하였다.

간신히 울음을 멈추고, 얼마간 후련함을 느끼며 나는 그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것은 그와의 비밀약속인 동시에 나 자신과의 최초의 화해였다. 그리고 몹시 피로해져 그대로 그의 가슴 위에서 잠들어 버렸다.

누구에게나 나름의 취향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엔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쪽이 좋다. 독특한 콘셉트나 특별한 장소가 아닌 평범한 방의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부드럽고 친절하고 다정하게 사랑을 나누는 것.
굳이 따지자면 사람에 대한 취향 역시 그와 같아서, 짓궂고 파렴치한 쪽에 속하는 현우종은 몹시 어긋난 경우여야 할 테지만, 하필 그의 목소리에 이끌려 태어난 이상 안타깝게도 내게 선택권이란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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