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잠든 그의 모습은 어쩐지 비현실적이었다. 도시의 빛이 비밀스런 어둠을 파고들어, 그 안에서 빛의 부각처럼 튀어나온 듯이 보였다. 비밀스런 존재, 손대면 안 되는 금단의 존재. 박영민을 현실의 인간으로 느끼게 해주는 건 그의 이마에 흘러내려 온 몇 올의 머리카락뿐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별것도 아닌 일, 그저 동료의 잠든 얼굴을 쳐다본 것뿐인데. 그의 머리털을 더듬었을 뿐인데. 나쁜 짓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봐서는 안 되는 걸 훔쳐보고, 손대면 안 되는 것에 손댄 것처럼 느껴졌다. 금기를 어긴 것처럼 심장이 팔딱거렸다.

파란이 쓸고 간 자리. 연우는 오전 내도록 어느 시절의 자기와 마주한 채 시간을 보냈다. 저걸 붙인 날로부터 몇 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사진 속의 자기는 10년 전처럼 앳되어 보인다고 여기면서. 엊그제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건지, 왠지 월요일부터 아무것도 실감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물의 겉면을 나타내는 수면이라는 단어처럼, 하늘에도 ‘천면’이라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연우는 회사 옥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일 초, 이 초, 삼 초. 서로에게 눈길을 박은 채로 꽤 많은 시간이 성큼성큼 지나갔다. 저 멀리, 시베리아 어디에선가 첩첩히 쌓였던 다음 계절의 공기가 한 줌씩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먼 은하계에서는 아기별이 태어났고, 또 다른 행성은 내핵마저 식었다.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에게는 늘 자기 ‘편’이 있다고. 당신이 모를 뿐이지.’

온화한 잠이었다. 타인의 숨소리에서 느끼는 따스함이, 서리를 막아 주는 반구처럼 감쌌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4년이 흘러 어느 가을이 완전히 산화하던 밤.
두 사람은 거기에 앉아 있었다. 색색의 낙엽들이 땅의 폭죽처럼 부채꼴로 펼쳐져 있던, 그 밤의 출발선에.

어쩐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 한 사람, 연우에게만은 나쁜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좋은 사람이었던 적도, 나쁜 사람이었던 적도 없다고 간주했다. 남들이 가끔 그를 친절하다고 오해하는 건 그의 마음의 온도가 늘 평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왠지 단 한 사람에게만은 그 온도가 지속될 것 같지 않았다.

그 새벽의 키스 이후, 나인스타 앞에서 영민이 저돌적으로 발언을 꺼낸 이후, 두 사람은 한사코 서로를 피하고자 했으면서도 가끔 이랬다. 어떤 섬세한 순간이 그때까지 유지하던 일상을 바꾸었다. 비싼 공기정화기가 내뿜는 청결한 향마저 진득한 케미처럼 작용하던 시간.

얌전한 강연우가 조용하고 초연한 남자 박영민과 친해진 계기. 그 이유 안에는 몇 가지 키워드가 존재했다.
운수, 숨쉬기, 달리기, 그리고 장의사와 무당, 이라는…, 소설 제목 같은 키워드들이다.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가족들, 일이 잘못되면 남의 탓을 하며 다른 사람의 시선 앞에서만 그럴 듯한 인격으로 위장하는 사람들.

‘연우 씨가 그렇게 숨이 찰 정도라면…, 이제 가족을 위해서 무리하는 걸 그만두고 연우 씨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듣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연우 씨가 자기 생각을 가장 어려운 대상에게 이야기하는 게 중요한 거죠.’

그렇게 둘은 그 밤에 함께 달렸고, 밤의 공기를 조용한 열기로 나눠 가졌다. 이후로 인턴 기간을 제외한 지난 4년 6개월 동안, 둘은 그야말로 성격답게 조용하고 꾸준한 동료애를 유지했다.

그렇게 인턴 기간을 제외한 5년 남짓, 두 사람은 둘만의 시간과 물건들을 공유하고 또 공유하며 편안한 관계를 유지했다.

둘은 자신 외의 사람들을 안으로 들이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이들이었고, 서로의 그런 닮은 점들을 충분히 존중했다.

우주는 연우에게 가족들이라는 한계선, 출발선과 결승선이 없는 유일한 장소였다. 어린 시절부터 내내, 연우에게 ‘가족’은 지구 끝까지도 쫓아올 무거운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주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장의사가 되고 싶었고.

시간은 그때마다 유독 더 무료하면서도 삼삼하게 지나갔다. 저 멀리 어느 곳에서는 또 작은 백색왜성이 산화하고, 어딘가로 흡수되고, 또 그렇게 하얀 구멍에서 쏙 하고 튀어나와 별이 생기고, 그 별에서 미토콘드리아보다 작은 미생물들이 왁다글닥다글 시끄럽게 굴고, 공룡들이 ‘부동산 관광’이라는 작은 깃발을 들고 행성들을 일렬로 도보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시간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다.

연우는 그 안에서 마음껏 게을렀고, ‘지금’을 잔뜩 누렸다. 그는 지금 부릴 수 있는 게으름들이, 우주의 시간에 담긴 지루함이, 한만한 자의 느릿한 페이스가 허무하면서도 참 좋았다. 그렇게 완만한 심장의 박동 속에서 편하게 숨을 쉬며 이따금 별거 아닌 듯이 눈을 마주치는 것마저도 너무 좋았다.

영민과 자연스럽게 시선을 교환할 때마다, 연우는 가끔 생각했다. 내게 이만큼이라도 가까운 존재가 있었는지를. 또 이런 동료를 잃으면 이 관계를 갖기 전보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될 건지를.
연우에게 있어 영민과 단절된다는 건 미래가 아니라 ‘지금’마저 잃는 것이었다.

연우는 자기 가족에게 매우 익숙했다. 그에게 가족들은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약자를 협박하고 괴롭히는, 그러면서도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 곧 몰상식의 집단이었다.

사람이 그리웠다는 듯이 선뜻 다가온 고양이. 그리고 언제 들이닥쳐 진상을 부릴지 모르는 혈연 집단들. 사실 이사 문제만 생각하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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