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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 혹은 멀의 세계
에드워드 애슈턴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26년 9월
평점 :

#도서제공
p.252 나도 구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누군가를 구하려고 다른 사람을 내던지면 안 되는 거야, 멀.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애초에 내가 뭐 그렇게 특별한데? 로언 아줌마는 슈퍼히어로야.
언제나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이들은 보통의 인물과 비교해 유니크한 요소가 있지만, 그리고 SF 소설이라면 더더욱 그럴 테지만 그런 클리셰를 감안하더라도 『멀 혹은 멀의 세계』의 주인공 일행은 굉장히 특이하다. 다섯 살 아이의 몸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고등학생 나이인데다가 가차 없이 사람을 향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케일리, 졸지에 머릿속에 시끄러운 AI를 데리고 살게 된 폴먼, 일행과 포로 사이 어딘가에 있는 전직 휴머니스트군 애셔. 평범한 인간이 한 명 정도는 섞여 있어도 될 것 같은 이 무리의 마지막 동료가 되는 건 거의 전국구 지명 수배자 신세 정도는 되어 보이는, 몸에 나노 로봇이 있는 여자 로언이다. 한 명만 있어도 흥미로울 존재들이 연대 아닌 연대로 동행하는 로드무비가 어떻게 재미없을 수가 있겠는가. 수시로 그들이 처한 위험에 마음을 졸이고,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사소한 유머 코드에 웃음이 터지고, 이들에게 해피 엔딩이 남아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철저히 인간적인 시각에서 볼 때 주인공 ‘멀’은 때때로 너무 냉철하게 느껴진다. 그가 감정 없는 AI라는 점에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케일리와 다른 일행을 두고 저울질할 때 무조건적으로 케일리를 우선하는 모습에는 폴먼이나 애셔가 안타까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AI인 그가 ‘하나의 특별한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느껴진다. 케일리는 로언 대신 자기를 선택한 멀에게 ‘누군가를 구하려고 다른 사람을 내던지면 안 되는’ 것이라고 일갈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족이나 연인 같은, 자신에게 더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타인은 손해를 보게 하는 일을 때때로 감수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결국 멀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마저도 내던질 수 있다. 어쩌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간적인 건 폴먼이고, 그 다음으로 인간적인 건 멀일지도 모른다. 그가 수정한 위키 밑에 한 줄을 더 붙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멀은 최고의 AI다, 라고.

p.378 그놈들은 네 친구가 아니야. 인간들은 우리의 친구였던 적이 없어. 이 행성에서 걸어 다니거나 헤엄치거나 날아다니는 모든 존재한테도 마찬가지였지. 인간은 나무에서 기어 내려온 순간부터 손에 닿는 모든 걸 파괴하는 역병 그 자체였어. 그들은 역병이고 나는 치료제야, 멀. 내가 유일한 너의 친구야.
그들이 수시로 위험에 처한다는 것과는 별개로 소설은 꽤 유쾌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이게 팀인지 원수인지 알 수 없는 일행은 참 어찌저찌도 우당탕탕 굴러가 싸웠다가 갈라졌다가 재회하기를 반복하고, 인간의 몸이 하드웨어에 비해 너무 나약한 나머지 애를 먹는 멀의 모습에는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멀 혹은 멀의 세계』는 분명히 전쟁의 모습을 담고 있다. 폭격의 여파로 폐허가 된 작은 마을, 겉으로는 그럴싸한 명분을 가지고서 사람들을 학살하는 존재들 등 이야기 곳곳에 드러나는 참상을 마주할 때 독자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해,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인공지능이 하는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내지 편집이 잘 된 책은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쉽게 빨아들인다. 시스템 상에서 오가는 메시지는 본문과 구분을 둔 채팅 느낌의 작은 고딕체로 표기되어 이들이 인터넷 챗처럼 현실의 음성 이외의 방법으로 통신 중이라는 사실을 지루한 설명 없이도 직관적으로 이해시킨다. 페이지 구석에 마련된 플립북 애니메이션이 가끔 시선을 환기한다. 만듦새부터 이야기까지, 전부가 사랑스러운 책이다. 책을 덮은 지금까지도 멀의 세계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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