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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평점 :
#도서제공
p.96 찌니들은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퀴어 퍼레이드 외의 장소에서 이토록 공개적으로 말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혜진은 자신을 칭칭 묶어놓은 쇠사슬이 툭 끊어지는 해방감을 느꼈다.
시골 마을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레즈비언을 상상해본 적 있는가? 최근의 트렌디한 문학에서 퀴어 캐릭터는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게 되었지만, 사실 그들의 대다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정지아의 신작 『찌니주의보』는 ‘레즈비언’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몰라 다방 레지가 아니냐며 목청을 높이는, 평균 나이 78세의 깡시골 수평마을에 레즈비언 커플을 뚝 떨어트려 놓는다. 그곳에는 억척같이 살아온 윤 선생이 있고 목청 좋고 기세 좋은 월남 며느리 쑤언이 있다. 고된 시집살이를 겪으며 살아온 절골댁과 남편의 바람으로 가슴앓이를 했던 장씨댁도 있다.
수평마을과 젊은 레즈비언 여성 찌니들은 나란히 놓고 보면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을 보면 어르신들은 으레 혀를 차기 마련이다. 그런 시골 마을에 무려 ‘레즈비언 커플’의 등장이라니, 이 설정만으로 독자는 소설 속 그들의 행보가 궁금해지게 된다. 마을을 떠날까, 아니면 편견에 맞서 싸울까. 그들은 과연 수평마을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찌니들이 걱정스러운 동시에 그들이 이 마을에 남아 모두에게 이해받는다는 다정한 미래를 괜히 기대해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런 것들을 기대하고 문학을 읽는지도 모른다.

p.165 그런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절골댁이 혜진의 등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늙으면 펭상 해오든 것도 첨인디끼 낯설 때가 많아야. 근디 잘 모리던 것을 워치케 냉큼 받아들이겄냐.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약이여.
책의 구석구석이 유쾌하고 신선하다. 성소수자와 아웃팅이라는 다소 가볍지만은 않은 주제를 담고 있는데도 페이지가 쏜살같이 넘어간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은 작가의 나이가 소위 말하는 젊은 작가들보다는 기성세대에 더 가깝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펜촉이 이토록 트렌디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써낸다는 게 때로 놀라워지기도 한다. 지역 방언을 그대로 옮겨 쓰고 시골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생겨나는 작가 특유의 유머가 이야기에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수평마을도 찌니들도 윤 선생도 이장님도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아지고, 독자는 마치 하나의 시트콤을 보는 기분이 든다. 천지가 무너질 것 같던 이 갈등은 그들의 정체성이나 혐오를 파헤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져버린 마을에서 어느새 그들은 다시 한 밥상에 앉아 서로의 시간을 나눈다.
정지아의 글에는 한 시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게 아들 타령을 해도 아들 덕은 못 본 윤 선생, 남의 집 농작물에 손을 대는 장씨댁의 세대가 막걸리를 지고 와 그 좀도둑질을 수습하는 군청 과장 미자와 이장의 당찬 외국인 아내 쑤언의 세대로, 그리고 닭을 반려동물로 키우고 동성끼리 사랑하며 함께 사는 기희와 찌니들의 세대로 이어진다. 이 세대들을 서로 이어주는 건 거창한 가치관이나 논리가 아니라 뜨끈뜨끈한 호박전이고, 하나로마트 봉투에 담긴 반찬이고, 집집마다 맛이 다른 김장김치다. 누구 하나 미워할 수가 없는,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쏟아져나오는 글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정지아의 글이 좋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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