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지옥
김인정 지음 / 아작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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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p.150 그녀는 자신이 어떤 길을 택할지를 깨달았다. 이것은 예지인가 그렇지 않으면 들끓는 정염이 불러온 망집인가? 그녀 자신이 행할 죄악을 다만 조금 일찍 알았을 뿐인가, 아니면 그렇게 스스로를 속여 잠시 잠깐 죄책감을 잊고자 함인가? 


오래전부터 창작물의 단골 소재였던 이어지지 못할 사랑, 사랑할수록 서로가 힘들어지는 애증 따위를 최근의 독자들은 망한 사랑이라고 부른다. 소위 말하는 혐관서사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보다 이런 관계가 주는 드라마틱함이 있다 보니 특정 드라마나 장르 소설의 팬 커뮤니티에서는 일부 커플링을 두고 망한 사랑이라 오히려 좋다는 반응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김인정 작가의 신간 다정한 지옥은 그런 망한 사랑 중독인 독자들을 위한 책으로 동양풍 환상문학으로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작가 특유의 화려한 작품세계가 아낌없이 담겨 있다. 장르 문법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끝없는 도파민을 주는,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취향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만드는 책이다.

 

작중의 어떤 사랑은 너무 순애보여서, 또 어떤 사랑은 시작부터 어긋나 있어서 망한 사랑이 된다. 작가가 섬세하게 설계한 세계에서 꿈과 현실 사이 저마다의 사랑을 품고 사는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지금까지 보아온 보통의 로맨스는 다 허상인 것만 같아진다. 당연한 이야기다. 사랑한다거나, 결혼하자거나, 하물며 내 모든 걸 전부 주겠다는 고백보다도 내 목을 가져가라는 말이 더 와 닿을 수밖에 없다. 목숨보다 사랑한다거나 널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말과는 그 무게나 느낌이 다르다. 대체로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게 사랑이라면 이 책 속의 인물들은 불행해지리라는 걸 알면서도 기껍게 사랑한다. 그 사랑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더라도.

 

p.324 어미의 목숨을 거둔 이를 죽이려고 검을 배웠다. 수행은 힘겨웠고 힘을 기르는 일은 지루하였으며 육신이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피를 흘리고 부딪치고 깨졌으며 비틀렸다. 베는 것은 찰나이건만 베려는 것은 장구하였다. 


단편들은 얼핏 보기에는 별개의 이야기로 보이면서도 읽어나가다 보면 하나의 결을 갖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들이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 정도는 흔쾌히 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함께 있으면 지옥이 되는 줄 알면서도 누군가를 낙원 삼는 바람에 다정한 지옥에서 살게 된다는 점에서. 화선그리고 낙원까지를 나란히 두고 생각해보자. 거북이의 입을 빌려 설화처럼 쓰여진 정령의 이야기와 복수와 애증으로 점철된 무협 서사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해당화 아씨와 연교의 사랑은 어느 정도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종래에 자기를 기다리는 게 영원이 아닌 죽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뛰어들 수 있는 사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치 눈 위의 동백처럼.

 

볼륨이 작고 후루룩 읽히는 단편과 과몰입을 이끌어내는 긴 작품이 섞여 있어서 차분히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이 책에 매료된다. 낙원을 부수거나, 낙원을 원하거나, 사람을 낙원 삼거나… …. 가장 깊게 몰입하고 서사가 근사하다고 느낀 글은 그리고 낙원까지였지만 어쩌면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짧은 단편 화적의 말미였다. 세상 무엇도(그게 설령 사랑일지라도) 영원한 것이 되어주지 아니하니 반드시 그 끝이 고단할 뿐이라는 자조. 이 부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도, 화선에서도 화적에서도 이토록 덧없는 사랑의 회의감을 날것으로 보여주었지만 그리고 낙원까지에서 결국 사랑이란 둘만의 것이라는 사실도 절절히 보여주어서가 아닐까 싶다. 꽃 정령들이 남자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야, 하고 한탄하던 마음도 책을 모두 덮고 나면 조금은 덜해진다. 어쨌거나 자신의 사랑을 향해 모든 것을 쏟아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근사하니까. 각기 다른 시기에 발표된 작품을 하나의 소설집으로 엮어 작품 바깥에서도 이런 서사를 만들어낸 편집이 놀랍도록 매력적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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