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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향하여
안톤 허 지음, 정보라 옮김 / 반타 / 2025년 7월
평점 :

#도서제공
p.125 갑자기 나는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언어는 단순히 상호참조하는 정보 조각이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고 만질 수 있는 감정이었다.
사랑을 말하는 SF야말로 소설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동떨어져 보이기만 하는 공상과학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란히 걸을 때, 우리는 어떤 비현실이나 상상의 미래 속에서도 끝내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린다. 『영원을 향하여』 또한 그런 작품이었다. 사실 ‘안톤 허’라는 이름을 봤을 때 막연히 한국계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다가 서문의 ‘한국어 독자들에게 큰절 올립니다’라는 문장에서 한 번, 책의 8할은 송도와 서울을 오가는 지하철에서 쓰였다는 얘기에 두 번 크게 웃음이 터졌다. 게다가 평소 그가 번역하던 정보라 작가가 이번에는 그의 작품 번역을 맡았다는 점도 흥미를 끌었다. 서로의 글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서로의 작품을 번역한다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을 향하여』는 낭만적이다. 동시에 철학적이다. 끝없이 시와 사랑을 말하는 동시에 인간과 기록에 대해 말한다. 근미래, 미래, 먼 미래, 아주 먼 미래로 나아가는 기록들을 따라가면서 독자는 ‘나’는 언제까지나 ‘나’라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인물들을 따라 고뇌에 빠진다. 용훈과 파닛이라는 이름은 같은 작품에 등장하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파닛, 쁘라섯, 말리 비코, 엘런, 이브… … 많은 이국의 이름들 사이 오직 ‘한용훈’만이 한국식 이름으로 존재한다. 그것마저도 용훈의 어떤 정체성이 아닐까 싶었다. 「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인데, 작가가 경력있는 번역가이며 작중에서도 시에 대한 많은 언급과 은유가 등장하는 걸 고려해보면 어느 정도 의도가 있는 작명이라고 느껴졌다.
p.63 시를 읽는 사람은 그 자아가 됩니다. 시는 소설과 달라서 줄거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가가 던지는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독자들은 끊임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시는 자아 그 자체라는 것. 여정이나 표현이 아니라 자아를 글로써 존재하게 하는 것이 시라는 것. 그걸 마치 코드로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 같다는 놈푼도 박사의 말에 용훈이 이렇게 대답했다. 시를 읽는 사람은 그 자아가 된다고. 미래로 뻗어나가는 거대한 세계관 속에서도 이 대목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 대화의 다음 부분에서 용훈이 ‘우리 주위의 빛 자체가 더 밝아’졌다고 느낀 것처럼 이 구절에서 나의 세상도 더 밝아졌다. 인공지능과 나노로봇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에도 문장들이 계속 페이지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시로 쓰인 자아가 그 자아로 여전히 존재한다는 건 결국 자아는 육체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이야기라고 느껴졌다.
용훈을 용훈으로 살게 한 것은 시이고, 사랑이다. 쁘라섯에 대한 사랑의 기억이 비로소 그를 나노봇 육체에서도 용훈으로 살게 만든다. 용훈과 파닛의 세대를 거쳐 이브의 이야기에 다다라서는 조금 더 스케일이 커진 세상에서 더 긴박하고 속도감 있는 전개가 펼쳐진다. 깊은 철학적 질문으로 자칫 늘어진다고 느껴질 수 있는 부분에서 다시금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몰입시키는 스킬이 첫 장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수려한 문장으로 써내려간 거대한 미래를 보며 뭐든 많이 읽고 많이 쓴 사람의 글이란 이토록 아름답구나 싶었다.
여러 번 읽을수록 많은 생각이 드는 책이다. 작가의 문학적, 철학적 소양은 물론이고 많은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력이 돋보인다. SF의 문법을 빌려 인간과 사랑을 말하는 작품은 언제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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