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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6월
평점 :
『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읽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하기 전, 나는 제목에 먼저 이끌렸다.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문장 하나가 이미 나의 관심사와 깊이 닿아 있었다.
사람과 삶, 말해지지 않은 기억, 그리고 고통을 껴안고 있는 이야기들.
그것들이 나의 직업적 정체성과 삶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긴다.
인생의 장면들, 아픈 기억, 웃음 지었던 순간들.
그런 이야기들이 내 안에서 살아 숨 쉬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내게 어떤 ‘질문’을 던졌다.
“과연, 말해질 수 없는 시대의 고통을 글로 남긴다는 건 어떤 일일까?”
책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제발트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평론으로 시작되는 앞부분은
‘내가 아직 이 책을 읽을 준비가 안 된 것 아닐까’ 싶을 만큼 어렵게 느껴졌다.
글이 어려워서라기보다, 이 책이 이미 제발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전제로 쓰였다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뷰 형식의 글이 이어지면서부터는
책이 갑자기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질문과 대답,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믿음을 갖고 글을 쓰는지를 조금씩 알 수 있었다.
나도 질문을 좋아한다.
질문을 통해 본질에 다가가는 대화를 좋아하고,
그래서 인터뷰 형식의 책을 유독 좋아한다.
이 책에서도 몇몇 질문들은 나였다면 어떻게 더 물어봤을까 상상하게 만들 정도로 흥미로웠다.
책 속 한 문장이 나를 멈춰 세웠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질 때 상당히 많은 정서적 에너지를 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상대의 영역을 점유하기 시작하죠.” (p.90)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제발트가 역사에 품은 관심이
내가 사람에 품는 관심과도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진짜 호기심이 생긴다.
그 애정이, 제발트로 하여금 사라진 이야기들을 글로 끌어올리게 한 것이 아닐까.
“단편적인 정보밖에 없더라도, 충분한 관심을 가지게 되면 그 시기를 현재에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p.91)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떠올렸다.
그 책이, 우리에게 얼마나 강력한 ‘부활’의 경험을 안겨줬는지를 생각했다.
제발트 역시, 말해지지 않은 것들 속에서 고통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 했던 작가였다.
아니, 지금도 그런 글을 남기고 있는 작가다.
“주민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선생님이 수년간 박해를 당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p.92)
이 ‘묵인된 침묵’이라는 개념은 내 안에서도 울림이 컸다.
한 사람의 트라우마가 종종 가족이나 사회에서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일’로 묻히듯,
역사적 고통도 그렇게 침묵 속에 묻혀간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아픔을 직면하고 말로 꺼내는 순간부터,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는 부분의 밀도는 상당히 높아집니다. 이로 말미암아 무게가 짓누르기 시작하면 우리를 침몰시킵니다.” (p.100)
이 문장은 나의 오래된 기억과 아픔을 떠올리게 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아픔을 눌러두고, 묻고, 모른 척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삶의 후유증이 되어 돌아온다는 걸,
그래서 나는 심리치료를 받고, 지금은 아픔을 ‘있는 그대로 느끼려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말하는 글쓰기의 윤리,
‘망각의 시대에 기억을 복원하는 글쓰기’가 왜 중요한지 절절히 느꼈다.
역사도, 개인의 상처도, 지워야 할 것이 아니라 직면해야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인터뷰 구간이 끝나고 나면, 다시 또 평론가의 에세이가 이어진다.
나는 이제 이 작가가 궁금해졌고, 더 알고 싶어졌다.
책의 중반쯤, 인터뷰의 언어 속에서 이미 다른 책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억의 유령』은 제발트를 잘 몰라도,
그의 생각과 감수성에 천천히 다가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는 책이었다.
마치 제발트가 직접 손을 내밀며 건네는 초청장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