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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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엄령 그 밤, 소설가 황정은이 남긴 솔직한 고백


창비에서 출간된 황정은의 신작 에세이 <작은일기>. 누구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 책을 펼쳤음에도 읽기쉽지 않았다. 한 글자마다 작년 12월의 기억과 느낌이 생생히 떠올라 책을 덮고 펴기를 반복했다. 


"오후 열시 삼십사분 계엄"(p.9)


윤석렬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선포한 계엄령. 한국 국민 모두가 비슷한 기억과 느낌을 떠올릴 그날 밤의 이야기.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뉴스를 보며, 우리는 모두  1980년 5월 18일에서 비롯된 공포와 분노를 느꼈다. 괜찮을까? 무사할 수 있을까?


이번 에세이는 소설가 황정은이 그날의 공포를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느끼고 표현한 작품이다. 그날 이후 반년이 지난 지금, <작은 일기>로 당시의 분노와 공포를 다시 돌아본다. 



2. 광장에서 만난 "놀라운 사람들"


"추운 밤 그 자리에서 보낸 사람들도 놀랍고, 

그들에게 난방 버스며 음식이며, 

바람 넘는 고개에서 버티는 데 도움이 되는

물품들을 즉시 보낸 사람들도 놀랍다."

(p.57)


남태령에서 밤을 지새운 사람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마음들. 케이팝과 응원봉으로 물든 광장.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연대의 모습에 작가는 '놀라운 사람이 이렇게 많다'라고 고백한다.


1월 강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광장을 지키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은박을 두르고 밤새워 버텨내 '키세스단'이라는 별명이 붙은 사람들. 나는 한 시간도 버티기 힘들었던 그 추위에 고생했던 분들이 너무 미안하고 놀랍고 고마웠던 기억(p.87). <작은 일기>를 읽다 보니 그때의 떨림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3. 큰 사건 앞에 선 소수자의 목소리와 자매들의 연대



일기는 내내 심각하게 계엄-탄핵 정국만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일상은 돌아가고 작가가 밀린 일감에 머리를 싸매는 장면에서 미소가 지어진다. 그중 자매들과의 관계에 관한 일화가 인상 깊다.


"우리 자매가 다 십 대였을 때 

우리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누가 봐도 놀랄 정도로 살벌하게 다퉜고 

각자 생존만으로도 버거워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p.30)


그런데 지금은? 정치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집회에 나간다. 작중 내내 서로를 염려하고 보듬는다. 그렇게 그들은 어린 시절의 '적'에서 '가족으로 거듭난다.


퀴어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탄핵 집회 중간 성소수자 발언에 반발을 표출하는 사람들. 그걸 묵묵히 견뎌내다 말리는 작가. 

"여기서 저런 얘기를 왜 하느냐고 

중얼거리더니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순간 참지 못하고 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그러지 마시라고, 

여기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고 

무슨 얘기든 할 수 있는 자리라고 말했다."

(p.19)


이 사회의 약자들이, 소수자들이 겪어온 괴로움과 어려움을 온 사회가 다 겪고 있다.(p.147) 세월호 깃발을 든 기수, 전국농민총연합(전농)의 남태령 대첩. 작은 힘들이 하나씩 결합해 거대한 분노로 그를 탄핵하였다. 



4. 무력감에 맞서는 작은 행동


하지만 이 에세이는 수동적인 피해자들의 연대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초법적 존재들이 법의 보호를 이토록 꼼꼼하게 받아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큰 무력감을 안긴다."(p.112)고 토로한다. 


"만약 그가 파면되지 않는다면, 

탄핵이 인용되지 않는다면, 

자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p.116)


그러나 눈물이 쏟아지는 무력함 속에서도 그녀는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한다. 추운 광장에 나가 집회에 참여하고, 선고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그날의 기억을 일기에 남겼다.



5. 그래도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


결국 황정은이 이 일기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었다.


"노동자, 농민, 여성, 성소수자...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정체성으로

어떤 부침을 겪고 있든 불법 계엄이라는

국가 폭력에 관통당한 경험으로,

그 고통으로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감을 잃지 않는다면, 잊지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p.181)


처음 본 얼굴이지만 같이 추위를 버티며 방석과 간식을 나누는 배려. 서로를 버티게 해준 존중과 다정, 조용한 애정. 작가는 '그건 결코 냉소가 되지 못한다'(p160)고 말한다. 



6. 혼란의 시대를 바라보는 소설가의 시선


창비에서 출간된 이 신간 에세이는 단순한 정치적 르포를 넘어선다. 한 개인의 일기가 어떻게 시대의 기록이 되는지, 문학이 현실과 만나는 지점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를 보여준다.


황정은 특유의 정제된 문장과 예민한 감각, 깊은 성찰이 만들어낸 문장들은 칠흑 같던 계엄의 밤을 공유한 모두의 마음에 공명할 것이다. 


분노했지만 무력했고, 나약했지만 연대한 우리들이 이뤄낸 결과들. 2024년 겨울, 우리는 모두 역사의 목격자이자 참여자였다. <작은 일기>에서 시대의 트라우마를 딛고 우리의 위대함을 발견하기를.(p.185)


"당신들과 동시대를 산 덕분에 

이걸 보았어, 영광입니다."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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