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증보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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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빨갱이"가 된 엘리트, 

빠리에서 택시운전사로 살아남다

 

1979년 한 청년이 프랑스 파리 거리를 택시로 누비고 있었다. 서울대를 나온 엘리트였던 그는 어쩌다 빠리에서 택시운전사가 되었을까?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되어 하루아침에 망명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 시절, '삐라를 뿌렸다'는 이유로 수년간의 옥살이를 하는 일이 흔하던 시기였다. 유신 체제 말기의 한국에서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가 '삼중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발견한 두 사회의 차이점과 그 사이에서 체득한 '똘레랑스'의 가치를 담고 있다. 최근 저자의 타계 1주기를 맞아 출간 30주년 개정증보판으로 돌아온 이 책은, 갈등으로 분열된 2025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전한다. 


1. '똘레랑스'란? 다름을 인정하는 공존의 기술 


책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똘레랑스'다. 흔히 '관용'으로 번역되지만, 홍세화가 전하는 똘레랑스는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이렇게 정의한다: 

"당신의 이념과 신념이 당신에게 귀중한 것이라면 남의 그것도 그에게는 똑같이 귀중한 것입니다. 당신의 그것들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남의 그것들도 존중하십시오. " 

이 개념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택시운전사로 살며 경험한 구체적인 사례로 증명된다. 홍세화가 경험한 프랑스 사회는 택시운전사를 하나의 직업인으로 존중한다. 그는 길도 익숙하지 않은 초보운전사의 경험을, "내가 택시 운전을 잘못할 때는 손님의 지청구를 들을 수 있으나 택시운전사라는 이유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지는 않는다."라 회고한다. 


2. 책에서 얻는 6가지 교훈 


1) 한국과 프랑스, 두 사회의 다른 풍경 
"빠리에서는 각자 자기에게 맞는 유행을 찾는데 비하여, 서울에서는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한 유행을 따른다." 홍세화는 이 차이가 한국 사회의 획일성과 프랑스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런 관찰은 우리 사회의 동조 압력과 유행 추종 현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2) 이념 대립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눈 
"프랑스에선 이 주장과 저 주장이 싸우고 이 사상과 저 사상이 논쟁하는데 비하여 한국에선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또 서로 미워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이 왜 그토록 격렬한지 설명해 주는 통찰이다. 최근 선거 때마다 분열이 심화되며 인신공격이 난무하는데, "우리들의 부싯돌은 부딪쳐야 빛이 난다"던 볼테르의 말처럼 더 중요한 논의에 집중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3) 직업과 신분에 대한 고정관념 깨기 
한국에서는 직업이 그 사람의 전부인 것처럼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택시 기사, 배달원, 경비원... 그들을 '하등한 사람'으로 보기보다 '각자 존중받아야 할 직업인'으로 규정하는 사회다.-심지어 성매매 여성도!- 홍세화는 프랑스에서 택시운전사로 일하며 느낀 존중의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직업 계층화 문제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4)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대화의 기술 
프랑스 정치인들은 대통령 후보 토론에서도 상대를 중상모략하지 않고 정책 대결로 논쟁한다. 똘레랑스가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강요하거나 강제하는 대신 토론한다. 아주 열심히 토론한다." 최근 젠더 갈등과 세대갈등으로 분열된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대화하는 문화가 아닐까.


5) '다름'을 받아들이는 일상의 지혜 
홍세화가 경험한 프랑스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일상에 녹아있었다. 이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6) 삶의 원칙을 세우는 방법 
"나는 투철한 혁명가도 아니었다. 이론가도 아니었다.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에 충실하려 했다." 홍세화가 보여주는 삶의 원칙은 거창한 이론이 아닌 소박한 일상의 실천에서 비롯된다. 까뮈의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원칙에 충실한 삶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영감을 준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3. 달라졌으면서 달라진 게 없는 한국 왜 지금 다시 이 책인가? 


출간 30년이 지났지만 이 책이 여전히 화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홍세화가 2006년 개정판 서문에서 말했듯 "달라졌으면서 달라진 게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갈등, 젠더 갈등, 세대 갈등까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타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문화는 온라인상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창비 출판사의 개정증보판에는 홍세화의 오랜 친구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추도문과 저자가 2023년 <한겨레신문>에 마지막으로 기고한 칼럼을 추가해 더욱 뜻깊다. 저자는 귀국 후에도 장발장은행 설립, 다양한 사회운동 참여 등을 통해 자신이 전한 똘레랑스의 정신을 실천해왔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선거 때마다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 구도와 SNS에서 퍼지는 혐오 발언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상대방의 의견을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절실한 시점이다. 홍세화가 빠리에서 택시를 운전하며 체득한 똘레랑스의 지혜는, 분열과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해법을 제시한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견해를 지킬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 -볼떼르 

위 의견에 따를 수 있나? 아니, 이해할 수는 있을까?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3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묵직한 물음을 던진다. 이 책은 또한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법을 알려주는 인문사회적 지침서이자,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한 지식인의 따뜻한 조언이기도 하다. 저자 홍세화는 떠났지만 '똘레랑스'의 씨앗은 지금, 혐오의 겨울을 견디며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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