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 - 14년 차 방송작가의 좌충우돌 생존기
김선영 지음 / 유노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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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블라인드 앱에서 댓글로 '회사 진상 경진 대회'가 열린 걸 얼핏 본 기억이 난다. 신입 사원의 버릇을 고친다며 엎어 치기로 혼쭐 내준 상사, 머리끄덩이를 잡은 싸움, 날라차기, 소주병 유혈사태 등 경찰이 개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각종 사건들이 각 회사마다 몇 개씩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나의 이전 직장에서 폭언을 듣다 실신한 직원의 이야기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별천지가 각 직장마다 숨어있었던 것이다. 정말 '진상 보존의 법칙'은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회사라는 존재가 멀쩡한 사람을 진상으로 만드는 걸까?

적어도 '작가'라는 직업은 그런 어려움과 거리가 멀 거라 생각했다. 글로 먹고사는 고상한 직업, 연예인과의 친분, 창조의 고뇌 등. 평소 접하기 어려운 정보 때문에 드라마에서나 보는 게 전부였던 이미지가 그 분야에 대한 편견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직장 생활이나 쉬운 게 없고, 일분일초가 급박한 방송업계가 고상하게 돌아갈 리는 더더욱 없었다. 더욱이 매 프로그램마다 새로운 섭외를 신경 써야 하는 하는 작가는 항상 고달프다.

 

"보통 외주 제작사에서 일하는 방송 제작진은 

페이스트리 같은 겹겹의 갑을 모신다.

제작사 대표도 갑이었고, 본사도 갑이었다. 

출연자와 전문가, 연예인도 모셔야 했기에 모두 우리의 갑이었다.

물론 갑 오브 갑은 시청자이지만."


151p, '여전히 유효한 조언, 훌훌 털어 버려라'


자신의 업에 열정을 가진 이도 쉽사리 지치게 만드는 곳, 방송 제작사. 그곳에서 어떤 방송작가는 억울함에 못 이겨 목청을 높이고, 누군가는 몰래 눈물 흘린다.
 

"야 이 xxx! 내가 담당자 찾으려고 얼마나 전화를 돌렸는데 

일 분을 못 기다리고 가냐,이 쌉사리 같은 공무원 놈아!" 

현미는 목청의 끝을 보여주겠다는 듯 

팔 층 창밖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40p, '매사에 열정적이면 옥상에 불려간다'

 

책의 에피소드들은 '방송업계'에 국한되어 있지만 사실 이런 분노와 억울함, 수치심은 직장인이라면 모두가 겪어봤을 이야기다. 메인작가의 '훈련'-이라 쓰고 '창피주기'라 읽는-은 내 이전 직장 상사의 일 가르치는 방법과 닮았고-나도 수십 번을 화장실로 달려갔다-, 섭외자의 배신은 협력사의 뒤통수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빨갛게 충혈된 눈,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표정.

거울 속에 웬 꼴뚜기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가기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화장실에서 영원히 살고만 싶었다. 

하지만 별 수 있나, 빨리 섭외를 마쳐야지.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듯 나를 빠르게 타일렀다.


110p, '상사의 한마디에 울고 웃던 시절

 

반복된 철야와 주말 근무에 얻는 건 온갖 질병뿐. 책을 읽을수록 현실의 '방송작가'는 상상과 많이 달랐고 오히려 '야근에 쩔은 흔한 직장인'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사춘기도 한참 지난 나이에 화농성 여드름으로 고통받았고,

누군가는 노인들이 주로 걸린다는 대상포진에 걸렸다.

이제 사십 대 초반인데 녹내장 초기라거나 당뇨가 걸려 일을 그만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만성 위염으로 며칠째 죽을 먹더라도 남은 일을 끝내려고 커피를 들이키는 게 방송작가다.


53p, '무엇도 나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이 모든 고생이 잿빛으로만 묘사되었다면 그저 그런 '방송작가 경험담'으로 남았을 테다. 하지만 저자는 기가 막힌 에피소드들을 웃프게(?) 재가공하여 글을 읽는 직장인들이 '일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도록 만든다.
 

아이템에 목말랐던 현미는 긴장된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터져라... 터져라... 터져라!" 

그녀를 비웃듯 나로호는 무사히 하늘로 솟구쳤고, 제작진의 웃음만 터졌다...


나는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서강대교를 건너 여의도로 출근했다.

방송이 코앞인데 아이템을 잡지 못했거나 출연자 섭외를 못했을 땐, 

다리가 무너져 버렸으면 했다. 

내의지로 멈추지 못하는 시간을 불가항력이 막아 줬으면 했던 것이다. 


123p, '오늘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감을 코앞에 두고 밤을 새워 일을 마무리하고, 일이 끝나면 술 한 잔에 털어버리는 사람들. 원청과 상사의 갑질에 울고 웃는 사람들. 이들은 방송작가이면서 동시에 2020년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하는 흔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욜로'에 이어 '경제적 자유'로 이어지고 있는 퇴사 붐에도 이 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건, 결국 이런 직장인들이 이뤄낸 성과가 아닐까?


지금 이 시간에도 잠을 못 자서 충혈된 눈으로, 누군가에게 쌍욕을 들어가며,

커피를 수혈하고, 줄담배를 태우며 맡은 일을 줄기차게 해 나가고 있을 '방송쟁이들'.

내가 나를 지키려고 내던졌던 그 사명감을 그들은 끝끝내 껴안고 있을 터.그

들을 존경하고 응원한다. 


243p,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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