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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 왕 1 - 젤레즈니 여왕 데네브가 한 곳에서 새로운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대장장이 왕 1
허교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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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 왕

내게는 좀처럼 친숙하지 않은 판타지 소설이다.

어떤 특정 장르들은 나를 내 나이를 가늠해 보게 하는데, 요사이 판타지 장르가 특히나 묘한 좌절과 슬픔을 주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장장이 왕>이라는 제목의 판타지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신화와 전설의 원형'을 만난다는 오세란 문학평론가의 한줄 때문이었다.

청소년 도서일테지만, 이를 통해서 신화와 전설의 원형에 한 발짝 다가가고 싶었다.

집에 도착한 책 표지는 참으로 화려했다. 컴퓨터 게임의 첫 시작 장면 같은 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돌도돌한 표지에서, 출판사의 야심이 느껴졌다.

허교범이라는 작가에 의해 쓰여진 이 판타지 소설은 상당한 길이의 장편 소설인 모양이다. 당장 1권만 출간되었지만, 몇년 사이에 7~10권정도를 목표로 출간할 계획이라니, 참으로 놀랍기 짝이 없다. 허교범 작가가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소식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못한 장르인 판타지 장르이지만, 그만큰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가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나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각오를 다지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청소년 문학이다..

표지를 넘기고 이야기를 찾아들어가기 시작하자마자,

마치 만화책을 넘기기라도 한 것 같은, 아주 멋진 작화가 드러났다.

스토리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에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듯 했다.

긴 서사 판타지 소설의 1권이라 그런지,

중반까지는 상당히 인물들을 소개하는 듯한 인상이 강했다.

사건 간의 인과 관계를 당장 연결하기 쉽지 않았고,

다양한 인물 간의 관계를 당장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다.

내가 책을 끊어서 읽은 탓도 있지만, 이런 저런 것들이 헷갈리고 집중하기 쉽지 않아.. 하는 고비들을 넘어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1권의 마지막 쯤 다다랐을 때는 2권이 내심기다려지는 결말..

소설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대장장이 - 인간이 만들 수 없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 이들, 이로서 신과 같은 권능을 가진 이들을 일컬는다.

이들에게도 왕이 있으니, 그를 대장장이 왕이라 칭한다.

서른 한 번째 대장장이 왕이 물러나고 서른 두번째 대장장이 왕을 찾아 신의 사제인 가르젠이 길을 나선다.

대장장이 왕이 없는 틈을 타, 다른 주변 황제들이 힘을 장악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진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대장장이 왕이 탄생하게 되는데..

초반에 이야기 몰입이 어려웠던 것에 반해, 여러 가지 복선들이 하나씩 드러남에 따라 흥미를 더해갔다. 청소년 소설이 가지는 판타지적 요소와 더불어 강력한 이야기 구조를 자지고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2권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하고, 나의 집중력에 대한 신뢰가 크지 않지만,

새로운 2권이 펼쳐내는 이야기에 많은 호기심과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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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 여성의 욕망에는 ‘동의’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캐서린 앤젤 지음, 조고은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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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제목이 도발적이다.

‘섹스’는 여러가지 정서적 스펙트럼을 가진 단어다. 각자의 경험과 상상을 너머 집단이나 사회의 지배적 분위기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돈’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은밀하고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이고 사회적이다. 그래서 ‘섹스’라는 단어는 내게는 무겁다.

그 와중에 ‘내일의 섹스’, ‘다시’라니.. 그 표현 한번 요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낚아챈다. 책을 읽어내려가다 보니, 푸코가 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냉소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라고 하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저자 이름은 <캐서린 앤젤 Katherine Angel>. 성이 ‘천사’라니. 여성들의 섹스를 보살피는 천사의 강림인 것인가.. 조금은 환타지적 상상을 하게 되는 이름이다. 책에 소개된 그녀의 이력보다 더 상세히 알고 싶어서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이 분야에 독보적인 엘리트이자, 과감하고 대담한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플한 목차는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에 대하여’라는 표현에서 이 담론이 얼마나 철학적이고 분석적으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예감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와서 인지, 작가가 조금은 현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문장들 앞에서도, 묘한 슬픔이 올라왔다. 작가는 여성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느끼는 미묘함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그것이 갖는 사회적 맥락을 언급함으로써 한 여성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또렷하게 밝혀 냈다.

그 선명함 앞에서 느끼는 이 이상한 슬픔이란, 같은 여성으로 공감되는 것과 동시에 이른바 ‘섹슈얼리티’와 ‘사회적 성평등지수’의 성숙도가 비교적 나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에서 조차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무게감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작가가 등장시킨 인물들이 외국 이름이라는 것일 뿐,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한국 여성들이 한국이라는 사회 안에서 느끼는 바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생기는 약간의 좌절감. 우리에게 내일의 섹스는 있는 걸까


동의에 대하여…


“여성의 (추정된) 욕망은, 설령 단 하번이라도, 한 남성을 향한 것이라 해도, 그녀를 취약하게 만든다.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그녀는 보호받을 자격, 정의의 대상이 될 자격을 상실한다. 일단 여성이 무언가를 승낙했다고 여겨지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것도 거부할 수 없다.”

p17

“여성은 남자의 감정을 과도하게 신경 쓰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이는 꼭 강압적인 남성들이 주입하는 것도 아니다. 여성들은 남성의 안락한 삶뿐 아니라 그들의 분노와 폭력에도 책임감을 느끼도록 사회화 되었다. 그리고 여성들은 일단 ‘신호’를 줬으면, 반드시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배운다.”

p26

성폭력 피해 상담을 하셨던 분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피해자는 그 날밤 가해 남성과 잠자리를 한 후, 잘 가라는 문자 조차 주고 받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치가 떨리게 분노가 올라왔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고 한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성폭력을 당했다고 느끼지만, 그날 밤 '잘 가'로 주고 받은 문자 때문에 결국 섹스에 동의한 거처럼 판결될 것이 두렵다고 하면서 말이다.

자신의 진짜 마음을 오랫동안 억압하는 환경에서 자란 많은 여성들에게 이런 이중적인(? 나는 "자연스러운"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모습들이 있다. 그때는 NO라고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은 NO를 말하고 싶었던 수 많은 그녀들. 그녀 개인의 책임이라고 하기에는 오래된 역사동안 누적된 사회적 억압이 남녀 모두의 무의식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거 같다.



욕망에 대하여....

어린 시절, 친척집에 놀러갔다가 제법 재미난 소설 책을 잠시 읽었다. 상세한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표현되었지만, 그 관점이 여성의 '성'에 대해 상당히 왜곡되고 억압적이며 여성 비하적이이었나 보다. 나에게 '여성의 욕망'이라는 단어 뒤엔 항상 희미하게 그 책의 표현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어린 시절 무비판적으로 읽었던 것이 오랜 시간동안 나의 무의식에 각인되어서 나를 움직이게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분노가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감지된다. 내가 내면의 가부장 감옥에 살도록 오랫동안 세뇌당해 온 것에 대한 분노, 그것들이 나를 통제해왔다는 분노 같은 것들 말이다.


오랫동안 당연 시 되어 왔다는 이런 어이 없는 주장들과 믿음들.

남성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믿음과 주장들은, 남성들이 이성적으로 성숙하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무능함과 한계"를 가졌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에 대해 오히려 남성들이 분노해야하지 않겠는가. 비록 인간으로서 나약함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을 지언정, 남성은 보편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 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성적 불만으로 인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은 아니라고, 오히려 '이런 나약함에 대해서 책임지겠노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서로에게 깊은 즐거움을 주는 행위로서 섹스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 모든 복잡함 속에서도 여성의 성적 쾌락을 포용하고 활성화하며, 남성 욕망의 복잡성 또한 인정하는 문화를 목표로 삼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젠더를 떠나 경이롭고 보편적이며 민주적인 쾌락을 목표로 삼을 수는 없을까?

p113

Angel은 복잡한 여러 주장과 담론 뒤에 이러한 의문을 남긴다. 나 또한 적극 동감하는 바이다.


흥분에 대하여...

담대해지는 주제.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성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도 심도 깊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많은 오해들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는 길로 안내하고 있는가를 느껴본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가지는 죄책감은 여러 차원이 있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몸의 반응이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상상해 본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으로 부터 해방되자. 흔히 말하는 '흥분 상태'를 드러내는 여러 현상들은 일종의 '자극'에 따른 '반응'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몸의 '반응'만으로 단정하지 말라.


섹스는 모든 인간 현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연구하기 어려운 현상 중 하나다. 섹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맥락 속에서, 그리고 복제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는 외부의 물질을 끝도 없이 자기 안으로 포개 넣는다. 그것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개념적이며 환상적인 데다가 각종 문화로 가득 차 있다.

p136


맺으며...

책을 읽으며, 가슴 밑 바닥에 미미한 분노가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목격되었다. 때로는,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흐릿했던 성에 대한 나의 머리 속 사진들이 어느 부분에서는 조금 선명해진 느낌이 주는 시원함이 있다. 성에 대한 솔직한 담론과 연구들에 대한 책을 처음으로 읽은 탓일 수 있지만, 잘 몰랐던, 혹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세상에 대해서 조금은 자세히 드려다 본 기분이 주는 만족감 때문인 듯 하다.

어쩌면 내일의 섹스는 조금 더 좋아질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Angel 그녀가 있으므로.

책을 덮는 순간, 나는 그녀의 팬이 되어버린 듯 하다.

원글

https://blog.naver.com/saty99/222852060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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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감사의 재발견 - 뇌과학이 들려주는 놀라운 감사의 쓸모
제러미 애덤 스미스 외 지음, 손현선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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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감사'가 깊게 찾아와 삶의 변화를 일으킨지도 15년을 훌쩍 넘겼다.

15여년 전, 어느 겨울.

나는 혼자 자취방에 누워있었다.

오래된 염원의 좌절과 상심 그리고 우울의 이불을 머리 너머까지 푹 덮고 있었다.

눈물을 흘렸던 시간들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질정도의 무력감이 공기 중에 가득했다.

슬픔과 무기력을 가득 머금은 몸을 무겁게 이끌고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다가,

그 일이 일어났다.

이 지독한 우울증이,

그 동안의 나의 슬픔 앓이를 무색하게 하며,

한 순간에 끝나버렸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화장실 문 앞에서 서서 혼자말로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처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속삭이듯 소리내였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조금 더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가슴에서 아주 미미한 느낌이 일어나는 듯 했다.

연거푸 2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리내어 말하고 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리고 마지막 '감사합니다'를 흐느끼듯 말하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온 몸으로 흐느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로 나는 바닥에 엎드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아리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엎드리며 경련하는 내 몸뚱아리 세포 아래로 '경이'가 찾아들었다.

난 누구에게 감사한 것일까?

특별한 대상을 떠올린 것도 아니다.

신이라든지 우주라든지.. 뭐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말했을 뿐인데,

내 세포 사이사이를 꽉 채우고 있던 슬픔과 좌절의 떼가 눈물과 함께 몸 밖을 빠져나갔고,

세포들이 내뿜는 경이와 감사 안에 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날로 나는 이불을 털고 나왔다.

여전히 삶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헤쳐나오기 위해서 작은 무엇인가를 하기 시작했다.

감사일기를 매일 쓰기 시작했다. 회복을 돕는 책을 읽었다.

이후로 감사일기를 써왔다.

4년 연속 하루도 빠짐없이 쓴 때도 있었지만, 하루 이틀 빠지는 날, 몇달에 한번씩 쓰는 시기도 있었다. 온몸으로 감사를 절절히 느끼며 쓸 때도 있지만, 무의미한 글자 나부랭이를 채워넣듯이 적은 날도 수없이 있었다. 그럼에도 감사일기 쓰기를 계속 해 왔다. 그리고 그 일기들을 다시 읽을 때마다 나는 이 감사의 자국들이 나를 이끌어오는 힘이 되었음을 느낀다.

그런 나였기에, 아주 가끔은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만트라를 해 보라는 둥, '감사일기' 한번씩 적어보라는 둥 하는 잔소리 같은 권유를 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이 얼마나 '도덕책 같은 진부한 이야기' 같겠지만, 내게는 삶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이런 나에게 <감사의 재발견>이라는 책이 왔다. '뇌과학이 들려주는 놀라운 감사의 쓸모'라는 부재를 달고 말이다. 책을 받아들고는, 요즘 자기개발서에는 '뇌과학을 언급하지 않으면 설득력이나 매력이 없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거처럼, 도처에서 뇌과학이라는 말이 언급하고 있구만..하는 조금은 삐뚠 마음이 올라왔다. '감사'는 그냥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인데, 무슨 연구 프로젝트야! 하는 목소리엔, '내가 감사 좀 아는 사람인데'하는 으스댐이 있었다. 또, 그 으스댐 뒤에는 '괜한 도덕책 같은 이야기나 뻔한 이야기를 해서 감사의 진정성을 오염시키지 좀 마'라는 경계태세도 있었다.

책 뒤표지를 돌리자, 이런 내용들이 요약으로 제시 되어 있었다.

감사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과학적 실천법은 따로 있다. '매일' 감사일기를 쓰는 것보다 일주일에 두 번 쓰는 것이 더 효과가 있었다.

정말 재미있는 결론이 아닌가. 감사를 간헐적으로 하라는 말인가? 매일 먹는 거 보다 간헐적으로 먹는게 효과적으로 다이어트 할 수 있다와 같은 맥락이란 말인가? ㅎㅎ 책 속 내용을 빨리 확인해 보고 싶구만 하며 책장을 넘겨 가기 시작했다.

감사의 속 뜻은 겸손이다.P15

나는 모임을 진행하거나, 포멀한 대화를 해야할 때, '최근 한 주간 감사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으세요?' 라고 가끔 묻는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글쎄요. 감사한 일이 그다지 없어서요...'하고 말을 흐린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당신은요?'라고 내게 되묻는다. 나라고 별 수 있을까? 눈에 띄게 감사한 일이 많은 어떤 시기를 제외하고는, 내게도 감사한 것을 떠올리는 것은 매번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 질문을 되돌려 받고 난 이후에야 나는 나의 요즘 상태에 대해서 점검해 보게 된다. 나는 요사이 마음을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소소한 기쁨과 감사에 깨어있는가? 불만과 오만에 에너지를 보내고 있는가?

책을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이런 내용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방금 전 '감사 거리를 찾는데 약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를 떠올려 본다.

또한 15년 전, 내가 앞서 엎드려 울며 '감사합니다'의 참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 때 나는 참 겸손을 경험했던 것이 아닐까. 내가 비록 허공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나를 살게 했던 거대한 생명의 시스템에 고개 숙여 감사했던 거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이 좌절되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살게 하는 어떤 거대한 무엇이 있기에 내가 살 수 있구나 하는 것을 흐느끼며 알았던 것 같다.

*여자와 남자 중 누가 더 감사를 잘 할까? p74

대부분 연구들은 통제 변수로 성별을 두곤 하지만, 젠더의 직접적인 차이를 연구한 결과들에 대해서는 묘한 경계심이 생긴다. 여기도 어김없이 이런 자극적인 표현으로 작성된 페이지가 있다.

여러 연구들의 결과들은 여러가지 일치된 결과들을 보여준다. 여자와 남자 중 누가 더 감사를 잘 하는 지, 그 결과를 추측해 보라? 질문하는 문장에서도 여실히 결과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사회에 한정한 연구 데이터이지만, 평균적으로 여성들이 모든 연령층에서 기질적(성향적)으로 감사할 확률이 더 높다고 전한다.

왜 그럴까?

왓킨스의 연구에 따르면, 감사의 감정과 부채의식(보답해야한다는 의무감) 간의 상관관계가 여성보다 남성이 2배가량 강했다. 다시 말해, 남성들(연구대상인 미국 남성들)은 여성보다 자율적이고 자립적이어야 한다는 문화적 기대때문에, 타인에 대한 의존성을 인정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의존성과 나약함의 반영이라고 여길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어떤가? 공감이 되는가?

그럼, 이런 연구는 어떤가?

*문화가 감사에 미치는 영향 p85

구구절절한 실험에 대한 설명을 제외하고, 결론만 본다면, 이러하다.

앵글로계 미국인들이 아시아계 미국인들 보다 감사로 인한 삶의 만족도 향상이 더 높았다. 비슷한 연구에서도 인도, 대만, 한국 참가자들이 감사 체감지수가 크지 않았다. 연구결과는 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왜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은 앵글로계 미국인들만큼 유익을 얻지 못했을까? 타인의 도움에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부채 의식, 죄책감, 후회 등 여러 정서를 불러일으켰다....(중략)... 어떤 문화권은 상대적으로 남에게 진 빚을 더 강조한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감사가 부질없게 여겨지거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불쾌함을 야기할 수도 있다. "집단주의 문화에서 주고 받기는 개인주의 문화에서의 주고받기처럼 유쾌한 놀라움이 아니라 일상의 기대치"라고 연구자 릴리언 신과 동료들은 썼다.

100% 공감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감사가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에 문화적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가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극단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주변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갚아야 할 거 같은 부담 때문에 혼자하는 게 더 낫다고도 하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가 '누군가의 호의'를 마냥 '감사'로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의식이 '부채의식',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상 속 감사를 키우는 법 p97

몇 가지 감사 능력(?)을 키우는 법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어서 몇 가지 소개한다.

1. 때로 죽음과 상실에 관해 생각하라.

2. 가던 길을 멈추고 길가의 장미꽃 향기를 맡으라.

3. 권리 의식을 버리고 감사를 선택하라.

4. 사물이 아닌 사람에게 감사하라.- 긍젖적 경험의 시너지 및 지속적 상승 효과

5. 팬케이크를 언급하라 - 구체적으로 감사를 표하라.

6. 틀에 박히지 않은 감사를 하라- 불행에도, 가해자에게서도 감사를 찾을 수 있다.

감사는 생각보다 복잡한 심리 발달 구조에서 기인한다.

감사를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책에 따르면, '감사하는 능력'은 '감성지능'과 연관성이 높다.

세살 때 정서 이해도가 높았던 아이들이 네살이 되어서도 타인의 생각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고, 다섯살이 되었을 대 감사 이해도도 높았다. 이는 우리가 유아기에 습득한 정서적, 인지적 기술(주로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 감사 발달의 초석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이런 기술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고마워요"라는 단순한 인사를 넘어 진정한 감사의 구성 요소인 긍정적 사고와 행동으로 나아갈 능력을 갖춘다. p36

아이가 처음 물건을 주고 받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양육자나 어른들은 어린 아이에게 일부러 더 과장된 '감사'를 표현하며 모범을 보인다. 무엇인가를 주고 받을 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며 가르친다. 이런 행위는 단순히 행동 차원의 가르침을 넘어, 아이의 정서 발달과 함께 더불어서 타인과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과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 것이가의 맥락적 발달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 행위'는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심리적 발달 구조와 함께 개발되어지는 능력이고, 또한 성공적인 결과를 빚어낼 수 있는 요소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위기가 지나간 후 감사의 시간을 가지라 p196

감사를 정책화하고 습관화하면 "넘어질 때 완충작용을 하는 심리적 면역체계가 구축된다"라면서 "감사하는 사람이 사소한 일상적 괴로움이나 커다란 격변,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 탄력성이 더 높다는 과학적 증거가 있다"라고 했다.

감사는 재앙 너머로 눈길을 돌리게 하며 재앙의 긍정적 측면을 주목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이상적으로는 손실을 잠재적 이득으로 재구성하는 도구다.

몇일전 딱 이런 경험을 했다. 어느 모임 마무리 시간에 '감사하기'대화를 가졌다. 그 중 한 분이 '우리가 겪었던 그 고통스러웠던 사건에 분노했던 '나'에게 감사해요. 그 사건으로 내게 이 모임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주도적으로 내 힘을 사용하게 되었어요.' 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많은 이들이 우리 모두가 경험했던 '위기'에서 발견한 여러 감사들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흘려보내고, 시야가 확장되어 이 경험 안에 담긴 의미있는 기회들을 발견했다. 20분이 끝난 후, 우리는 그 위기가 우리에게 '선물'이었음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되어고, 어느 때보다도 깊이 고양되어 있었다. 이것이 감사가 주는 힘이지 않는가? 위기를 넘어서 우뚝 다시 서게 하는 회복 탄력성, 이것이 집단 안에서 공유되었을 때, 놀라운 힘으로 고양되게 하는가를 가슴으로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감사하는 삶은 우리가 (언제나) 거룩한 땅 위에 서서 신비의 존재와 닿아 있다는 의식이에요. (p243)

함께 하는 감사의 통찰은 개인적인 차원을 너머 미지의 신비한 힘과 만나게 하는 통로가 된다.

쓸데 없이 감사 과학이 왜 필요한 거야?

마지막 페이지쯤 다다르자, 이런 글들을 만나게 된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괜한 반발심으로 떠올려 본 이 생각. 책을 덮으면서는 내가 "경험한 감사"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음을 느낀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감사 과학'을 연구해 온 것에 대해서도 감사함이 올라온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만 치부하지 않고, 여러 관점을 가진 연구를 통해,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건강한 가치"에 대한 뻔하지 않은 결과들과 만나게 되었다. 뻔하다고 생각했으면 찾지 못했을,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에게 섬세한 이해를 제공하고, 확신을 가진 행동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힘이 되는 연구 결과들이었다. 슥~ 보면 뻔하지만, 음미하며 보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고 할까. 진실은 꼭 이런 모양새로 다가오는 듯 하다.

*본 글은 성장판 서평단에 선발되어, 책을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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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과 환상 - 의학자가 걷고, 맡고, 기록한 세상의 냄새들
한태희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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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각과 환상"

책 제목이 내 마음을 낚았다.

어떤 냄새는 다른 어떤 감각보다 더 정확하게 나를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이동시키고 만다.

후각은 때때로 시각이나 청각, 촉각의 기억보다 강렬하다.

첫 사랑과 걸었던 길의 비의 냄새

신뢰했던 그 사람의 스킨 냄새

아득한 어린 시절 아빠가 깍아주시던 참외 냄새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 후각이 가져다주는 기억의 환상이다.

그 뿐인가,

아로마 에션셜 오일의 세계에 풍덩 빠져들면서,

향기가 얼마나 빠르게 심신의 이완과 활력에 빠르게 영향을 미치는 지를 경험하고 나니,

내게 후각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 매력적이다.


이 와 중에 만난

몽환적인 표지의 <후각과 환상>.

후각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가득 자극했다.

한태희님을 소개하는 글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역사 공부와 답사 여행을 즐기는 의학자"

그렇다. 이 책은 '작가 영혼의 취미'와 '현실의 전문성'이 만나 잉태해 이 세상에 온 글들이다. 세상의 냄새를 따라 지역과 역사를 넘나들고 세상의 기억들을 더듬거리며, 현실과 기억이라는 환상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칼리 사원 앞이다. 멀리 보이는 제단에 향 연기가 자욱하다. 그 옆에선 긴 칼 움켜쥔 사내가 염소 목을 쳐 제물을 준비한다. 피 냄새가 역하게 풍겨 오고, 사원 벽에서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다. 진한 꽃향기와 향 연기에 피비린내까지. 이 뒤죽박죽 온갖 냄새들 가운데 쿵쾅거리고, 향기에 악취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사원 바로 맞은편 건물의 이름은 '죽은 자의 집'.(중략) 건물 안 넓은 홀, 수많은 사람들이 침대에 누워있고 그 위로 가슴이 가라앉는 듯 적막한 공기가 흐른다. 그 속엔 환자들의 체취를 넘어 처음 느껴보는 복잡하고 묵직한 냄새가 있다. 죽음의 냄새가 있다면 이런 것일까?

p.006

죽음의 냄새...

그렇다. 죽음에도 냄새가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감각이라는 것이 처음 장착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는 세상을 그 감각으로 해석하며 삶을 살아간다. 우리에게 삶이란, '감각으로 들어온 정보의 해석', 이것이 전부이지 않을까?

다시 상상해 본다.

만약 후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들, 다시 말해, 시각, 청각, 촉각, 미각 이런 것들이 사라진다면, 오직 후각으로만으로 세상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세상을 해석한다면, 그의 삶은 어떠할까?

작가 말에 따르면, 자궁 속 태아가 15주가 되면서 후각기관이 형성되고 양수 속 여러 물질의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태아는 양수의 냄새가 조금씩 달라질 때마다, '오늘은 마늘향이 어제보다 더 진하게 나는구나. 고기 향이 나는데.. '(물론 태아는 아직 마늘이나 고기라는 것을 명명하지 못하겠지만) 라며 그 미묘한 변화를 통해서 양수라는 세상을 인지하고, 아마도 엄마라는 대상과 교감하겠지. 그러다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처음 맡게 된 공간 냄새와 탯줄을 자를 때 나는 뜨거운 피 냄새로 자신의 환경이 달라졌음을 인식할 듯 하다. 엄마를 통해서 처음 모유를 먹게 되는 순간, 모유 냄새 덕에 어쩌면 배고픔이라는 것을 처음 감각하게 될까?

물론, 하나의 감각으로 세상의 정보를 온전히 다 이해하면서 보통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럼에도 후각이 주는 정보는 그를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하는데 충분히 많은 것을 제공할 것만 같다. 그 만큼 강렬하고, 명확한 것이 후각적 정보, 냄새가 아니겠는가?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좀 세기는 했지만, <후각과 환상>은 흥미로운 목차와 구성으로 독자들을 안내 한다.

후각의 정보가 되는 "향"이 인류의 역사 속 어디쯤, 어느 지역과 맞닿아있으며, 그것이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작가의 여행 속에서 함께 탐험해 볼 수 있다. 그가 첫번째로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중동과 북아프리카'다. 인류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자연의 향을 수집하기 시작했던 장소들 말이다.

인류의 향 문화는 이집트와 중동 지역에서 시작됐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에 따라 죽은 자들을 미라로 만들고 귀중품과 함께 묘에 안치했다. 시체를 방부 처리해 미라로 만드는 과정에는 다양한 향료가 사용됐다.

p016

BC1352년의 이집트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의 묘에서 말라붙은 향수가 담긴 항아리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인류에게 '향'을 채집해서 활용하는 놀라운 기술은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3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향이 희미하게 그 항아리에 간직되어서, '투탕카멘의 향수'라는 이름으로 그 향이 재현되고 있었으니, '향을 저장'하는 인류의 기술은 고대의 비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작가가 안내하는 아프리가 북부와 중동 일대를 시간을 넘나들며 뒤쫓다보면, 어느새 컬러풀한 사진이 종이를 한껏 뒤덮고 있는 페이지에 도달하게 된다. 작가의 풍부한 문장력으로 전달하고 싶은 그 느낌이 이 사진 앞에 도달하면, 내 머리 속 그 모양새와 조금 달라 처음엔 생경한 느낌이지만, 곧 작가의 말들 아래에 담긴 느낌이 사진을 통해서 '아!'하고 내게 와 닿는다. 여행 다큐멘터리는 생생한 장면들과 그것을 이끄는 이의 설명을 들으며 함께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반면, 역사 탐방 여행기 같은 작가의 글들은, 그것이 창조한 내 머리 속 세계와 사진이 들이미는 세계 간의 간격을 매꾸며 재창조되는 밀당이 있는 대화 같은 기분이다.

그렇게 얼마간 인류의 오래된 향들을 탐방하다 보면, 어느새 유럽에 도달하게 된다.


중동의 번성했던 여러 문화적 요소들이 그러하듯, 그들이 추출해 놓은 '향기'도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간다. 가장 활발하게 문화 교류가 일어나게 된 시점은 십자군 전쟁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십자군 원정 당시 전략적 요충지였던 사이프러스 섬에서 향수와 그 제조법이 유럽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은 목욕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청결하지 않는 몸의 강한 체취를 자연스러운 것 혹은 매력적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나폴레옹이 그의 아내 조세핀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곧 만날테니, 2주간 목욕하지 말라'라고 요청한 편지까지 쓴 것을 보면 말이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체취,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향수인 것인가 하며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좋은 향에 길들여진 나의 후각으로는 거부하고 싶어 진다.

작가와 함께 유럽 구석구석을 여행해 본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지나면서, 알코올 기반으로 한 유럽 최초의 향수인 헝가리 워터의 탄생 일화를 듣고 나면, 스페인 세비아와 그라나다에 이르른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문화가 오묘하게 조화로운 그 곳의 풍경을 음미하다가 스페인 남부 왕성한 오렌지와 올리브 향 속으로 빠져든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 새 런던에 도착해서, 오래된 서고에 꽂힌 책들의 세월 냄새, 그 밑에 가라 앉아있는 나무와 흙냄새, 종이 냄새까지 흠뻑 맡고 종이의 역사를 음미한다. 그리고 옥스포드 한쪽 구석에 있는 오래된 양조장에서 맥주 한잔을 들이키며 맥주 향이 담고 있는 역사성을 즐기다 보면, 맥주에 취한 얼큰한 기분이 내게 전해지며, 나 또한 좋아하지도 않는 맥주 한 모금이 간절해 진다.


이젠 본격적으로 후각을 탐험해 볼까?

인간의 후각 중추는 대뇌 피질 아래 변연계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감정이나 기억, 성적 충동과 동기부여를 관장하는 신경조직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로써 후각적 체험은 우리의 감정이나 욕망에 얽혀 영향을 주거나, 반대로 감정의 흐름에 후각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중략) 우리는 수면 중에도 후각 기관으로 냄새를 인식해 생리 현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p 154

한 실험 심리학자는 공포, 불안 등 인간 심리를 매개하는 후각 물질에 대해 보고하기도 했다.

p162

대뇌 변연계, 감정과 기억, 욕망과 관련된 신경 조직. 동물들의 후각은 인간의 것보다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아마도 오래 전 인류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적들과 먹이의 체취를 감지하고 구분하기 위해, 다른 어떤 감각보다 발달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후각은 인간에게 본능에 가까운 영역(대뇌 변연계)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다른 감각들 보다 훨씬 더 무의식에 가깝다. 그러하기에, 후각은 인간의 마음 다시 말해, 본능과 그와 관련된 기억들을 더 빠르고 쉽고 생생하게 강렬하게 일깨운다.

...그러나 최종적인 맛의 감각은 미각과 동시에 전달된 후각 자극이 통합될 때 이뤄진다. 코 점막의 후각세포에는 최소 300여 종의 후각 수용체가 있는데, 이로부터 뇌에 전달된 자극들이 미각 자극과 통합되며 맛에 대한 총제적 감각을 형성하는 것이다. 미각에 비해 후각의 종류가 훨씬 다양하므로, 맛을 결정하고 판단 내리는 과정에서 후각이 조금 더 복잡한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p197

미각보다 더 섬세한 후각은 본능적 분석능력이 아닐까. 냄새의 미묘한 차이를 통해 내가 이것을 먹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 것인가를 감지해내야 하니까. 그래서 주변에 유난 후각이 발달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내가 보기엔) 종종 까탈스럽고 세세하게 따지기를 좋아한다고 느껴진다. 수많은 냄새 정보들을 구분해 내는 능력은 다른 상황의 정보들도 구분하는 기능과도 연동되어, 세세하게 따지고 구분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어디까지나 뇌피셜.


"기억은 기록에 종속된다." 언젠가 내가 일기에 적은 이 한 글귀를 누군가가 베끼기라도 한 것처럼 종로 지하철 광고판에 카메라 이미지와 함께 쓰여있었다.

책을 덮으며, 왠지 이 글귀를 수정하고 싶어진다.

"기억은 냄새에 종속된다"

내가 맡았던 매 순간들의 냄새를 작은 유리 병에 저장해 둘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냄새를 사진을 꺼내어 보듯 다시 냄새 맡아볼 수 있다면, 우리의 본능적이 은밀한 후각은 그때의 정확한 기억들로 우리를 언제든 소환해 갈 수 있을 듯하다. 그만큼 후각은 본능적이고 강렬하니까.

한태희 작가와 함께 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세계 역사 여행은 우리 개인의 넘어선 문화 안에 담긴 후각적 기록들이다. 지금이라도 '투탕카멘의 향수'를 맡으며, BC1300여년 전의 파라오 투탕카멘을 떠올려보면, 인류의 무의식 속에 잠겨있는 역사 속 투탕카멘을 냄새를 통해 생생하게 만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엉뚱한 환상에 사로 잡힌 소리를 하며 글을 마친다.

*본 글은 성장판 서평단에 선발되어, 중앙Books에서 책을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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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과학 -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꿀잼 과학 이야기
이재범 지음, 최준석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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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과학>을 책으로 만났다. 그것도 한 눈에 보기 좋은 만화 책이다. 유튜브로 만난 <1분과학>과 또 다른 매력으로 단숨에 그러나 결코 가볍지만은 않게 과학 지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게 한다. 유튜브와 만화책 매력을 관통하는 쉽고 재미있는 그러나 지극히 과학적인이라는 컨셉은 책의 서문에 밝힌 저자의 과학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담긴 글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저는 과학이라는 현실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 현실을 진정으로 배운다면, 사람들은 세상을 다르게 볼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지는 모습을 고대해 봅니다. P8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꿀잼 과학 이야기- 1분 과착>은 총 14가지 과학 지식을 다루고 있다. 일상적인 우유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이라는 주제에 이르기까지 한정된 지면이지만 다양한 주제를 재미나게 다루고 있다.



만화로 그려진 덕에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만화 특유의 유머 코드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런 탓에 개념적 설명들도 그렇게 어렵지 않게 머리 속에 들어와 누군가에게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머리 속에 잘 구조화 된다. 그만큼 과학적 지식을 간결하고 짜임새 있게 구성해서 책을 만들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눈에 잘 들어오면서도 정성스럽게 그려진 만화와 핵심을 짚는 재미난 표현들은 과학 지식들이 뇌에 더 쉽게 담길 수 있는 방식으로 자극한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 과학 지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선택할 수 있다. 우유나 스마트 폰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다른 선택, 다른 행동에 대한 자극을 준다. 게이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우리가 소수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간편하게 먹는 멀티 비타민처럼 쉽고 기억에 남는 과학 상식을 섭취하기를 원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추천한다. 스윽 읽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어렵지 않게 과학 지식을 설명하는 자신을 발견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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