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각과 환상 - 의학자가 걷고, 맡고, 기록한 세상의 냄새들
한태희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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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각과 환상"

책 제목이 내 마음을 낚았다.

어떤 냄새는 다른 어떤 감각보다 더 정확하게 나를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이동시키고 만다.

후각은 때때로 시각이나 청각, 촉각의 기억보다 강렬하다.

첫 사랑과 걸었던 길의 비의 냄새

신뢰했던 그 사람의 스킨 냄새

아득한 어린 시절 아빠가 깍아주시던 참외 냄새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 후각이 가져다주는 기억의 환상이다.

그 뿐인가,

아로마 에션셜 오일의 세계에 풍덩 빠져들면서,

향기가 얼마나 빠르게 심신의 이완과 활력에 빠르게 영향을 미치는 지를 경험하고 나니,

내게 후각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 매력적이다.


이 와 중에 만난

몽환적인 표지의 <후각과 환상>.

후각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가득 자극했다.

한태희님을 소개하는 글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역사 공부와 답사 여행을 즐기는 의학자"

그렇다. 이 책은 '작가 영혼의 취미'와 '현실의 전문성'이 만나 잉태해 이 세상에 온 글들이다. 세상의 냄새를 따라 지역과 역사를 넘나들고 세상의 기억들을 더듬거리며, 현실과 기억이라는 환상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칼리 사원 앞이다. 멀리 보이는 제단에 향 연기가 자욱하다. 그 옆에선 긴 칼 움켜쥔 사내가 염소 목을 쳐 제물을 준비한다. 피 냄새가 역하게 풍겨 오고, 사원 벽에서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다. 진한 꽃향기와 향 연기에 피비린내까지. 이 뒤죽박죽 온갖 냄새들 가운데 쿵쾅거리고, 향기에 악취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사원 바로 맞은편 건물의 이름은 '죽은 자의 집'.(중략) 건물 안 넓은 홀, 수많은 사람들이 침대에 누워있고 그 위로 가슴이 가라앉는 듯 적막한 공기가 흐른다. 그 속엔 환자들의 체취를 넘어 처음 느껴보는 복잡하고 묵직한 냄새가 있다. 죽음의 냄새가 있다면 이런 것일까?

p.006

죽음의 냄새...

그렇다. 죽음에도 냄새가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감각이라는 것이 처음 장착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는 세상을 그 감각으로 해석하며 삶을 살아간다. 우리에게 삶이란, '감각으로 들어온 정보의 해석', 이것이 전부이지 않을까?

다시 상상해 본다.

만약 후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들, 다시 말해, 시각, 청각, 촉각, 미각 이런 것들이 사라진다면, 오직 후각으로만으로 세상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세상을 해석한다면, 그의 삶은 어떠할까?

작가 말에 따르면, 자궁 속 태아가 15주가 되면서 후각기관이 형성되고 양수 속 여러 물질의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태아는 양수의 냄새가 조금씩 달라질 때마다, '오늘은 마늘향이 어제보다 더 진하게 나는구나. 고기 향이 나는데.. '(물론 태아는 아직 마늘이나 고기라는 것을 명명하지 못하겠지만) 라며 그 미묘한 변화를 통해서 양수라는 세상을 인지하고, 아마도 엄마라는 대상과 교감하겠지. 그러다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처음 맡게 된 공간 냄새와 탯줄을 자를 때 나는 뜨거운 피 냄새로 자신의 환경이 달라졌음을 인식할 듯 하다. 엄마를 통해서 처음 모유를 먹게 되는 순간, 모유 냄새 덕에 어쩌면 배고픔이라는 것을 처음 감각하게 될까?

물론, 하나의 감각으로 세상의 정보를 온전히 다 이해하면서 보통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럼에도 후각이 주는 정보는 그를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하는데 충분히 많은 것을 제공할 것만 같다. 그 만큼 강렬하고, 명확한 것이 후각적 정보, 냄새가 아니겠는가?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좀 세기는 했지만, <후각과 환상>은 흥미로운 목차와 구성으로 독자들을 안내 한다.

후각의 정보가 되는 "향"이 인류의 역사 속 어디쯤, 어느 지역과 맞닿아있으며, 그것이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작가의 여행 속에서 함께 탐험해 볼 수 있다. 그가 첫번째로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중동과 북아프리카'다. 인류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자연의 향을 수집하기 시작했던 장소들 말이다.

인류의 향 문화는 이집트와 중동 지역에서 시작됐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에 따라 죽은 자들을 미라로 만들고 귀중품과 함께 묘에 안치했다. 시체를 방부 처리해 미라로 만드는 과정에는 다양한 향료가 사용됐다.

p016

BC1352년의 이집트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의 묘에서 말라붙은 향수가 담긴 항아리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인류에게 '향'을 채집해서 활용하는 놀라운 기술은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3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향이 희미하게 그 항아리에 간직되어서, '투탕카멘의 향수'라는 이름으로 그 향이 재현되고 있었으니, '향을 저장'하는 인류의 기술은 고대의 비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작가가 안내하는 아프리가 북부와 중동 일대를 시간을 넘나들며 뒤쫓다보면, 어느새 컬러풀한 사진이 종이를 한껏 뒤덮고 있는 페이지에 도달하게 된다. 작가의 풍부한 문장력으로 전달하고 싶은 그 느낌이 이 사진 앞에 도달하면, 내 머리 속 그 모양새와 조금 달라 처음엔 생경한 느낌이지만, 곧 작가의 말들 아래에 담긴 느낌이 사진을 통해서 '아!'하고 내게 와 닿는다. 여행 다큐멘터리는 생생한 장면들과 그것을 이끄는 이의 설명을 들으며 함께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반면, 역사 탐방 여행기 같은 작가의 글들은, 그것이 창조한 내 머리 속 세계와 사진이 들이미는 세계 간의 간격을 매꾸며 재창조되는 밀당이 있는 대화 같은 기분이다.

그렇게 얼마간 인류의 오래된 향들을 탐방하다 보면, 어느새 유럽에 도달하게 된다.


중동의 번성했던 여러 문화적 요소들이 그러하듯, 그들이 추출해 놓은 '향기'도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간다. 가장 활발하게 문화 교류가 일어나게 된 시점은 십자군 전쟁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십자군 원정 당시 전략적 요충지였던 사이프러스 섬에서 향수와 그 제조법이 유럽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은 목욕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청결하지 않는 몸의 강한 체취를 자연스러운 것 혹은 매력적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나폴레옹이 그의 아내 조세핀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곧 만날테니, 2주간 목욕하지 말라'라고 요청한 편지까지 쓴 것을 보면 말이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체취,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향수인 것인가 하며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좋은 향에 길들여진 나의 후각으로는 거부하고 싶어 진다.

작가와 함께 유럽 구석구석을 여행해 본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지나면서, 알코올 기반으로 한 유럽 최초의 향수인 헝가리 워터의 탄생 일화를 듣고 나면, 스페인 세비아와 그라나다에 이르른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문화가 오묘하게 조화로운 그 곳의 풍경을 음미하다가 스페인 남부 왕성한 오렌지와 올리브 향 속으로 빠져든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 새 런던에 도착해서, 오래된 서고에 꽂힌 책들의 세월 냄새, 그 밑에 가라 앉아있는 나무와 흙냄새, 종이 냄새까지 흠뻑 맡고 종이의 역사를 음미한다. 그리고 옥스포드 한쪽 구석에 있는 오래된 양조장에서 맥주 한잔을 들이키며 맥주 향이 담고 있는 역사성을 즐기다 보면, 맥주에 취한 얼큰한 기분이 내게 전해지며, 나 또한 좋아하지도 않는 맥주 한 모금이 간절해 진다.


이젠 본격적으로 후각을 탐험해 볼까?

인간의 후각 중추는 대뇌 피질 아래 변연계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감정이나 기억, 성적 충동과 동기부여를 관장하는 신경조직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로써 후각적 체험은 우리의 감정이나 욕망에 얽혀 영향을 주거나, 반대로 감정의 흐름에 후각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중략) 우리는 수면 중에도 후각 기관으로 냄새를 인식해 생리 현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p 154

한 실험 심리학자는 공포, 불안 등 인간 심리를 매개하는 후각 물질에 대해 보고하기도 했다.

p162

대뇌 변연계, 감정과 기억, 욕망과 관련된 신경 조직. 동물들의 후각은 인간의 것보다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아마도 오래 전 인류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적들과 먹이의 체취를 감지하고 구분하기 위해, 다른 어떤 감각보다 발달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후각은 인간에게 본능에 가까운 영역(대뇌 변연계)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다른 감각들 보다 훨씬 더 무의식에 가깝다. 그러하기에, 후각은 인간의 마음 다시 말해, 본능과 그와 관련된 기억들을 더 빠르고 쉽고 생생하게 강렬하게 일깨운다.

...그러나 최종적인 맛의 감각은 미각과 동시에 전달된 후각 자극이 통합될 때 이뤄진다. 코 점막의 후각세포에는 최소 300여 종의 후각 수용체가 있는데, 이로부터 뇌에 전달된 자극들이 미각 자극과 통합되며 맛에 대한 총제적 감각을 형성하는 것이다. 미각에 비해 후각의 종류가 훨씬 다양하므로, 맛을 결정하고 판단 내리는 과정에서 후각이 조금 더 복잡한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p197

미각보다 더 섬세한 후각은 본능적 분석능력이 아닐까. 냄새의 미묘한 차이를 통해 내가 이것을 먹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 것인가를 감지해내야 하니까. 그래서 주변에 유난 후각이 발달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내가 보기엔) 종종 까탈스럽고 세세하게 따지기를 좋아한다고 느껴진다. 수많은 냄새 정보들을 구분해 내는 능력은 다른 상황의 정보들도 구분하는 기능과도 연동되어, 세세하게 따지고 구분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어디까지나 뇌피셜.


"기억은 기록에 종속된다." 언젠가 내가 일기에 적은 이 한 글귀를 누군가가 베끼기라도 한 것처럼 종로 지하철 광고판에 카메라 이미지와 함께 쓰여있었다.

책을 덮으며, 왠지 이 글귀를 수정하고 싶어진다.

"기억은 냄새에 종속된다"

내가 맡았던 매 순간들의 냄새를 작은 유리 병에 저장해 둘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냄새를 사진을 꺼내어 보듯 다시 냄새 맡아볼 수 있다면, 우리의 본능적이 은밀한 후각은 그때의 정확한 기억들로 우리를 언제든 소환해 갈 수 있을 듯하다. 그만큼 후각은 본능적이고 강렬하니까.

한태희 작가와 함께 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세계 역사 여행은 우리 개인의 넘어선 문화 안에 담긴 후각적 기록들이다. 지금이라도 '투탕카멘의 향수'를 맡으며, BC1300여년 전의 파라오 투탕카멘을 떠올려보면, 인류의 무의식 속에 잠겨있는 역사 속 투탕카멘을 냄새를 통해 생생하게 만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엉뚱한 환상에 사로 잡힌 소리를 하며 글을 마친다.

*본 글은 성장판 서평단에 선발되어, 중앙Books에서 책을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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