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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주인공 '혜나'는 졸부의 막내딸로 태어나, 서른 아홉까지 직장 한 번 안 다니고 한도 제한 없는 신용카드를 긁어대며 고생 없이 살아 온 여자다. 결혼까지, 성인군자 반열에 오를 만큼 착한 서울대 출신 소꿉친구와 했다. 그런 그녀가, 가정이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 정욱연에게 꽂혀버린 것이다!
그런데 '혜나'라는 이 캐릭터는 작가가 꼭 배역으로 배우 '김선아'라도 염두해두고 쓴 것 같다. 다시 말해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인 여주인공처럼, 공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변의 모든 남자들이 다 이 아줌마를 귀여워 한다. 서른 아홉이나 되는 이 철 없는 아줌마를, -아이가 있었으면 초등학교 갈 나인데-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매력적인 의사 선생도 좋아하고, 개차반인 작은 오빠는 가족보다 항상 여동생인 그녀가 먼저고, 문선명 뺨 치는 재산을 가진 엄마의 남자친구도 딱 한 번 그녀를 보고 친딸처럼 여겨서 사업체를 맡기고, 심지어 작은 오빠의 감방 동료들까지 팬클럽 회원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귀여운 여자로 그렸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주인공을 계속 '아줌마'라고 칭하는 이유 또한 그러한 반감에서 나온 것이다.)
또 이 아줌마에 대해 흉을 보자면, 비록 아버지가 어린 여자랑 바람이 나서 가족을 버리고 떠나 정신적인 충격을 살짝 받긴 했어도, 직장 생활 한 번 안 해보고 돈 걱정 한 번 안해보고 살아왔던 사람이 뭐가 그리 내면에 깊은 한이 있다고, 취업 면접 겸해서 정욱연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자기 살아온 삶을 생각하며 대성통곡을 하고, 자기 생일날 음주운전으로 걸린 남편은 길에 놔두고 혼자 작은 오빠의 스포츠 카를 타고 정욱연을 찾아가서 이렇게 모든 것이 엉망일 땐, 뭘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다니! 이 아줌마 황당하다! 아줌마, 당신이 '82년생 지훈이'라도 돼?
5년의 직장생활동안 죽서어도 남을 상처와 수치와 굴욕을 당해 온 나도 남 앞에서 저렇게 대성통곡을 해본 적이 없는데, 자기가 뭐가 그렇게 힘들담!
소설을 읽는 내내 이런 이유로 책을 내동댕이치고 싶은 고비도 여러 번 있었다. (주로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었으니, 책을 내동댕이치고 다른 책을 꺼내 읽을 수 없다는 잇점이 있었다.) 하지만, 작가의 유머러스하고 눈 앞에서 드라마가 펼쳐지는 듯 유려한 문체는, 집에 새로 산 4권의 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들었다. 아, 정말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특히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입에 착착 감긴다. 지하철 안에서 읽다가 소리 내어 웃은 적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기 어울리는 소설이다. 아니, 마치 영화화의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쓴 것처럼, 대사를 통해 캐릭터들의 성격이 굉장히 잘 드러난다.
"죄송해요 원장님, 저 취직 안 할래요. 저 사실은 알코올중독이에요. 지금도 술냄새 나죠? 머리도 나빠요. 분명히 병원 일도 망쳐놓을 거예요. 원장님은 안 그래도 힘드실 텐데, 저까지 감당하실 필요는 없어요. 제 인생은 제가 책임져야죠. 남을 괴롭히면 안 되죠. 김학원이 분명히 저를 취직시켜달라고 엄청 못살게 굴었죠? 제가 다 알아요. 정말 거머리 같은 인간이에요. 사실은 원장님한테서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이에요. 죄송해요. 저도 정말 죽이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원장님은 너무 물러서 큰일이네요. 남의 사정 봐주다가 원장님까지 망하면 어떻게 해요. 우리 같은 인간쓰레기들은 그냥 단호하게 잘라버리세요. 우리 아빠처럼요. 아빠도 내버린 자식들을 원장님이 왜 챙겨줘요. 죽든 살든 나 몰라라 하세요. 그래야 우리도 정신을 차리지 않겠어요? 운이 좋으면 여든 살쯤엔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도 있겠죠."
좋게 말하고 쿨하게 일어설 생각이었는데, 넋두리 끝에 어느새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
반쯤 미친 이 혜나라는 여성을 통해, 약간의 대리만족도 느낄 수 있었고, 재미있었고, 통쾌했다.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부분은 이거다. 서른 아홉이면 아무리 자기 스스로가 어리고 철 없다고 생각한다한들, 남들의 대접과 주위 환경까지 완벽하게 똑같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26살을 넘을 수가 없다! 어떻게 이게 서른 아홉 여자의 이야기란 말인가!
물론 반쯤 미친 가족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