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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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종 Wild Seed] 이래 학수고대해 온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이 발간됐다. 두 권씩이나... [블러드차일드 Bloodchild And Other Stories] [ Kindred]. 그 중 단편집인 [블러드차일드]를 먼저 읽었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어요*)


표제작 <블러드차일드 Bloodchild>는 인류가 고등한 기생동물의 숙주가 된 세계를 그린다. 끔찍한 세계관 속에서도 남성의 임신, 기생충과 인류의 공생, 외계종과의 사랑과 출산이라는 녹록치 않은 소재를 건드리고 있다. 특히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난 인류가 외계 생물체의 번식을 위한 도구로 사육되어 진다는 설정이 (인간 빠떼리) [매트릭스 The Matrix] 뺨치게 섬뜩하다. 작가는 인류와 외계 생명체의 입장을 도치시켜, 불청객이 된 인류가 치러야할 "집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인간을 숙주로 삼는다는 설정과 기생동물의 묘사는 [에일리언 Alien]이 연상되지만, ([에일리언]은 외계 생명체와 쌈박질이라도 하지기생동물의 감시 아래 보호구역에서 생활하는 인류의 비참함은 오히려 [혹성탈출 Planet Of The Apes]스럽다 하겠다.


<저녁과 아침과 밤 The Evening And The Morning And The Night> DGD라는 불치병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다. 자기파괴와 폭력성향이 두드러지는 DGD 환자들은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외부 자극과의 교류가 차단되며 자신만의 세계에 갖히는 "표류"를 하게 되는데, 결국에는 자기파괴 행위를 통해 목숨을 잃고 만다. DGD 환자들의 특성, 즉 외부 자극과의 차단, 100퍼센트 우성 유전, 극단적인 폭력성 등은 마치 "좀비(zombie)"와 비슷한데, DGD 유전자가 암치료 부작용의 산물이라는 설정도 흥미롭다. DGD 환자들은 일반인보다 집중력이 매우 뛰어나 발명이나 연구분야에서 업적을 세우기도 하는데, 한편으론 [레인맨 Rain Man]의 더스틴 호프만처럼 천재적인 두뇌를 지닌 자폐증 환자를 떠올리게도 한다.


여담이지만, 좀비들이 어떻게 좀비와 비좀비를 구분하고 일사분란하게 비감염자들만 공격할 수 있는지 의아했는데, 의외로 이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작품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월드 워 Z World War Z] 정도가...) <저녁과 아침과 밤>에서는 DGD 환자가 페로몬을 통해 다른 DGD 환자와 대화하거나 영향을 끼칠수 있는데, 이러한 설정을 좀비물에 도입하면 좀비들만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인해 좀비끼리는 서로 공격하지 않고 비감염자만을 덥치는 이유를 나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어능력의 상실, 지적장애를 겪으며 퇴화한 인류를 그린 <말과 소리 Speech Sounds>는 대부분의 포스트 어포칼립스물이 그렇듯 [매드 맥스 Mad Max]를 연상시킨다. (경찰복을 입고 자동차를 몰며 떠도는 정의남이라는 설정은 의도적으로 [매드 맥스]를 오마주한 것 같지만 어쨋든맥스를 연상시키는 정력남은 지나친 정의감에 허무하게 죽어 버리고,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여성은 언어능력을 잃지 않은 비장애 아이들을 발견한다... 라는 꿈도 희망도 없을법한 세계의 나름 희망적인 이야기이다.


<특사 Amnesty> "커뮤니티"로 불리는 외계 생명체에 납치되었다 풀려난 이후 인류와 커뮤니티 사이의 통역사 역활을 하는 전문직 여성의 이야기로, 옥타이바 버틀러의 특특한 시각과 관점의 차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통 외계 생명체와의 접촉 또는 침략을 다룬 SF가 레지스탕스 또는 외계 생명체에 반대하는 세력을 주인공으로 삼고, 외계 생명체의 협력자 또는 중도 세력을 인류의 배신자로 설정하는 반면, <특사>는 통역사를 두 세계 사이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 이성적 중재자로 그리고 있다납치 되어서는 생체실험을 받았고, 풀려나서는 외계 생명체의 포로였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으며, 이후에는 커뮤니티를 위해 일한다고 비난을 받는 주인공이 예비 통역사들 앞에서 인류의 잔임함과 어리석음을 역설하는 후반부는, 지구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인정하는 무력감과 그게 인류의 끝은 아닐 거라는 희망을 동시에 안겨준다.


커뮤니티가 인간을 감싸안으면 마치 약물이나 성적접촉 비슷하게 커뮤니티와 인간 모두 기분이 좋아지고 안식을 얻게 되는데, 이러한 설정은 <블러드차일드>의 연장선으로도 읽힌다.


그 외 <가까운 친척 Near Of Kin>은 본 단편집에서 가장 SF와 동떨어진 작품이며, <넘어감 Crossover> <마사의 책 The Book Of Martha>은 환상문학에 가까운 작품이다.


"사람들은 나를 'SF 작가'라고, 내 소설은 당연히 SF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일 뿐이다. 내가 좋은 이야기를 썼는지 아닌지만 판단받기를 원하는."


책 날개에 씌여 있는 작가의 말이다. (본 작품집 어디엔가 씌여 있는 구절일 줄 알았는데, 서문에서도 후기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구절을 읽기 전에도, 옥타비아 버틀러가 순수 SF 작가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야생종] 안에는 SF뿐만 아니라 판타지, 로멘스, 심리 스릴러, 그 외 다양한 장르로 읽힐 수 있는 폭넓은 텍스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야생종] 하나만 읽고, 옥타비아 버틀러의 스타일이란 어떤거다 확신하는 건 불가능했다. 단지 이 작가는 "뭔가 특별하다"고 어렴풋이 느꼈을 뿐


본 작을 읽고 비로소 막연히 상상만 할 수 있었던, SF 작가의 꼬리표에 구애받지 않는 이야기꾼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 세계를 살짝 들여다 본 느낌이다. 황홀한 경험이었고, 여운이 남는 여행이었다


허겁지겁 읽어버렸지만, 끊임없이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을 읽고 싶다. 단편으로는 허기가 가시질 않는다. 바로 []을 읽고 싶지만, 여운이 []의 강렬함에 바로 휘발돼 버릴까 잠시 텀을 두고 읽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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