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리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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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상실증에 걸린 어린 벰파이어 쇼리는 자기가 누군지, 왜 다쳐서 동굴에 홀로 버려졌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동굴을 나와 배회하던 쇼리는 라이트라는 남자를 만나 공생관계를 맺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이유로 자신과 가족들이 죽임을 당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다른 벰파이어 가문을 만난 쇼리는 자신이 피부색뿐만 아니라 보통 벰파이어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쇼리]는 뱀파이어 사회에 대한 세밀한 설정을 바탕으로, 벰파이어와 인간종족의 공생, 종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 인종차별, 계급갈등 등을 장르적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다. 벰파이어와 인간의 공생, 즉 인간은 벰파이어에게 피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하고 벰파이어는 인간에게 쾌락과 안전을 제공한다는 기본 설정이 확고하기에, 소설은 벰파이어 vs 인간이 아닌 벰파이어 vs 벰파이어구도로 전개된다. 벰파이어와 인간의 공생, 그리고 사랑이라는 설정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렛미인]을 떠올리기도 하는데, 쇼리는 [렛미인]의 엘리보다 훨씬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렛미인]의 비극적인 정서와는 차이가 있다.


이야기 자체는 전통적인 벰파이어 호러보다 로드무비, 성장소설에 가깝고, 미스터리/추리 + 스릴러의 면모도 갖고 있다. 부연하자면, 중반까지는 액션을 가미한 미스터리, 추리물처럼 속도감 있게 전개되다 후반부 들어서면 마치 법정 스릴러처럼 벰파이어 사회의 규율과 전통에 따른 논리적 공방이 이어진다. 덕분에 전반에 비해 후반이 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작품의 주제와 벰파이어 사회에 빗댄 작가의 통찰은 후반부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후반부가 좀 더 마음에 들었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어요*)


솔직히 액션, 미스터리물로써의 만족도는 크지 않은 작품이다. 쇼리가 벰파이어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Daywalker)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정확하게는 그 특별함이 유전자조작과 까만 피부색 덕분임이 드러나는 순간, 미스터리는 걷히고, 낯설었던 벰파이어 사회는 익숙한 인간 사회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럼에도 이 모든 과정이 세밀한 설정에 기반해 논리적으로 전개되며,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캐릭터들과 어리지만 똑똑하고 당찬 쇼리의 활약으로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 한다. 무엇보다 벰파이어에 대한 설정이 워낙 촘촘하고 흥미롭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방식, 인간과의 공생, 종족번식 등에 대한 내용만 따라가도 재미가 상당한 작품이다.


외계인과 인간의 공생을 다룬 [블러드차일드]를 벰파이어물로 치환한 것 같은 본 작은, 폴리아모리, 미성년자와의 사랑 등첫인상으론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으로서도 상당히 과감하고 실험적인 작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벰파이어 장르에서도 인종차별, 계급투쟁 등을 이야기하는 [쇼리], 역시나 옥타비아 버틀러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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