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 존재의 연결을 묻는 카를로 로벨리의 질문들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 쌤앤파커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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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의 연결을 묻는 카를로 로벨리의 질문들
카를로 로벨리, 김정훈 (옮긴이) 쌤앤파커스 2025-06

장자,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다
서양 과학자가 장자를 이야기하니 웬지 놀랍습니다. 장자의 ‘자네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고 어떻게 아는가‘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 밖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듯이 인간도 자신의 경험과 관점을 넘어선 세계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안다는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의 일부라는 결론이 인상적입니다.

해피 메이데이
군사비용은 해마다 급증하고 있습니다. 왜? 권력자들이 해결책을 찾기보다 최강자가 되고 싶어하니까요.

모든 것은 레스보스섬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4세기 레스보스섬에서 사포, 알카이오스, 아르소토텔레스, 테오프라스토스의 서정시와 관찰 과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웬지 섬과 바다라면 뭐든 시작될 것같습니다.

음악
음악은 소리들의 내적 관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외적 관계로 청취자, 그의 뇌, 뉴런, 기억, 기대, 세계, 문화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음악은 악보나 음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일련의 과정‘에서 외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은 망원경이 아닌 정신으로 본 관찰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우주입니다. (멋진 생각입니다)

천하, 하나의 하늘 아래
과학자의 관점은 규모나 인식면에서 크기가 다릅니다.

세계의 문제는 군사적, 이념적, 정치적으로 누가 이길지가 아닙니다. 세계의 문제는 ‘누가 이길 것인가‘하는 게임을 ‘공동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하는 게임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전쟁을 피하는 방법이 문제인 것입니다.
61p, 카를로 로벨리
전쟁은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하늘 아래‘라고 생각하고 관점을 돌리면 가능합니다.

우리 대 저들
전쟁에서 침략자를 비난하고, 공격받은 국가를 무력으로 방어하자는 생각은 ‘우리 대 저들‘이라는 집단정신의 양분이 될 뿐입니다. 적의 사악함에 초점을 맞추고 악마화합니다. 우리는 정의 편에 서 있으니 ‘쏴야 한다,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싸워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갱단의 논리입니다.
저자가 읽었다는 엘사 모란테의 역사를 읽어야겠습니다. 읽어보려고 찾아보니 이탈리아 작가 입니다. 국내에 한권 번역되었는데 절판이네요.

위선
고귀한 가치들의 공언, 과시적 도덕주의, 젠체하는 거만함, 기관의 권위 주장은 특권과 착취, 천박함을 감추려는 수단입니다. 무력으로 타국을 지배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을 이겨야만 하는건가.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서방이 원하는 것은 해결, 종전이 아니라 상대국에 타격을 주고 싶은 것입니다. 무기를 강화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인류를 위한 아주 간단한 제안
인류가 직면한 전쟁, 종말을 막기 위해 군사비를 매년 2%씩 균형있게 삭감한다면 엄청난 재원을 평화 분담금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케플러의 꿈
케플러가 평생에 걸쳐 40년간 써왔던 ‘꿈‘(1634년)이라는 달 여행기가 있습니다. 30쪽인데 각주가 223개가 달려있다고 합니다. 앞의 시작만 인용했는데, 정령이며 달에서 본 천문학 기술이 화려합니다. 전문을 읽어보고 싶지만 번역된 것이 없습니다. 언젠가 초역 케플러의 꿈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갈릴레오의 실수
갈릴레오의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를 큰 소리로 읽었다고 합니다. 이상한 취미인가 했더니 오디오북을 제작했답니다. ‘영어로 읽는 것은 힘들었고, 전문적이고 지루한‘ 작업이었다고 합니다. 갈릴레오는 한문장으로 남아있어야죠. 전문을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갈릴레오의 불변성은 틀렸고 1년후 태어난 뉴턴이 조수의 원인을 달과 태양의 중력으로 밝혔다고 합니다. (저는 왜 틀렸는지 조차 모르겠네요)
과학적 진리는 실패와 시행착오의 과정이고, 점차 진실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같습니다.

부분의 부분
인간 자신도 자연의 작고 덧없는 현상이라는 에른스트 마흐의 말은 과학자다운 표현입니다.

로저 펜로즈, 조르조 파리시, 로베르토 칼라소, 지노 스트라다, 릴리아나 카바니, 브루네토 라티니, 단테, 가우스, 아인슈타인...
과학자는 다른 사람을 분석, 평가하는 것도 엄정합니다. 뭔가 과거의 추도문같아 비장합니다. (한편 추도문도 있긴 합니다) 심지어 노벨상 축하 인사말인데도 그렇습니다.

존재자의 존재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으면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합니다. 읽는 것만으로 벅찬 책이죠. 결국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고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작은 존재‘라는 문장을 도출해내는데, 하이데거 철학자들의 불쾌감을 받습니다. 세상에는 하이데거 학자들이 있나봅니다.

태양은 얼마나 멀리 있을까?
기원전 3세기 중국의 주비산경에 태양은 우리 머리 위 1만리, 수천km 떨어져있다고 계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 내일도 여전히 진실일까요. 과학자인데 이런 부분을 철학적으로 접근합니다.

다시, 장자,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다
마무리글로 다시 장자로 돌아갑니다. 닐스 보어는 ‘물리학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지만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앎은 바로 여기, 호수 위에 있습니다. 선문답같은 멋진 마감글입니다.

참 다양하게 생각을 넓혀주고 머리를 굴려주는 37가지 좋은 글들입니다. 어느 대목은 분명히 과학이야기인데 철학보다 어려워 이해가 안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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