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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뼘의 계절에서 배운 것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2년 10월
평점 :
한 뼘의 계절에서 배운 것
가랑비메이커 (지은이) 문장과장면들 2022-10-31
사계절에 따라 느끼는 감정과 일어나는 생각들을 잔잔하게 정리한 에세이입니다. 보통 에세이는 독자에게 공감을 주면서 (낙엽을 태우거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말하다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슬쩍 보여주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로 넘어가야죠.
그런 면에서 저자 가랑비메이커는 상당히 독특합니다. 흔적을 읽는 계절(161p-167p)에서 헌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모서리가 찍히고 코팅이 벗겨진 표지와 구겨지고 접힌 흔적이 가득한 페이지, 누군가 그어둔 밑줄이 듬성듬성 발견되는 책은 새 책보다 더 나를 설레게 한다. 161p
건조한 종이 냄새와 습한 곰팡이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묘한 냄새를 풍기는 책장 사이를 미로처럼 헤매다 발견한 책은 취향을 넘어서 깊숙한 위안이 된다. 바코드 위에 삐뚤게 붙여진 할인가 스티커마저 가난한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 같아서, 유독 세상살이가 퍽퍽하게 느껴질 때마다 숨바꼭질을 하듯 책장 속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162p
새 책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사적인 흔적을 읽는 일의 기쁨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164p
전부 제가 너무나도 싫어하는 것들입니다. 밑줄 그어놓고 (그것도 진하게) 최상이라고 파는 사람도 있고, 중간에 접은 흔적 그대로 남겨놓고, 바코드 스티커는 삐뚫어진 상태에 조심스럽게 떼면 끈쩍거리는 이물질이 느껴지고, 너무 세월감이 느껴져서 그대로 쓰레기통도 아니고 밖에 버리고 싶은 상태의 책을 저자는 좋아하는 것같습니다.
그렇게 다르고 보기싫은 생각인데 글의 표현을 보면 상당히 재미나죠? 영상으로 보는 듯한 묘사를 읽다보면 미묘한 감정에 슬쩍 빨려들어가도 되겠다는 느낌도 들고, 나도 그런 순간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순간 넘어갈 뻔했습니다. 글의 몰입력에 사로잡혀 중고책은 항상 최상만!이라는 원칙이 무너질 뻔한 순간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에세이지만 자기계발과도 같은 책입니다. 저자의 삶을 엿보다가 날 따라와, 이리와, 어디론가 가다가 눈녹듯이 사라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내리는 눈을 가만히 바라볼 때면 눈이 지닌 힘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한다. 오래된 동네를 동화 속처럼 만들어 버리는 로맨틱한 둔갑술에 대하여. 저 높은 하늘에서 대지 위로 안착하기 위해 지나와야 했을 긴 여정과 인내에 대하여. 미지근한 손바닥 위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눈의 모습에서는 겸손을 배우기도 한다.
22p.
저도 눈온다는 예보를 들으면 마냥 설레이던 어린 시절과 내일은 차를 놔두고 가야하나는 슬픈 현실 사이에서 고민을 하는데 저런 글을 읽으면 잔잔해지고 뭔가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밖에 눈이 전혀 오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그네로 사는 삶이란 걸 알지만 가끔은 이토록 작고 좁은 삶에도 주인 행세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더 자주 밖을 나서지만 선명해지는 것은 제철의 날씨뿐이다. 하늘이 파랗고 녹음이 짙은 날에는 눈앞은 선명해지고 나는 조금 더 흐려진다. 흐려지는 나를 두고만 볼 수 없어서 따사로운 햇볕에 등을 데우며 손바닥만 한 노트를 펼쳐서 무엇이든 써나간다.
21p.
선명한 하늘 아래 나만 흐려지는 이상한 기분이 가끔 드는데 어쩌면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을까요.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을 세밀하게 대신 표현해주는 기분마저 듭니다.
앞에 저자 친필싸인도 가치있어보입니다. 어설픈 증정도장보다 친필이 써있으면 누구 줄 수도 없고 꼭 소장해야할 것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