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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수업 - 슬픔을 이기는 여섯 번째 단계
데이비드 케슬러 지음, 박여진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10월
평점 :
감정은 통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상실, 죽음 등의 빈자리를 이해하려고 해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의문만 들뿐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결국 공허함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갑작스러운 죽음, 큰 사고, 부모보다 먼저 가버리는 자식의 죽음은 감정의 큰 충격이 되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보면서 놀랐던 점은 내가 겪은 모든 죽음이 티가 나지 않지만 그래서 마음 깊숙히 상처로 남아있었다는 점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경험했던 죽음들이 떠올랐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 시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주변에서도 호상이라고 했던 죽음들이 내 마음속 깊이 남아 괜히 울컥거리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책입니다. 반성을 하라든가, 받아들여라 라는 표면적인 충고가 아니라 모든 죽음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이의 죽음을 겪는 과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실 견디기 어려운 경험이죠. 본인조차 어렵고 힘들어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은둔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직업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지만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주변의 죽음을 체험하고 나타나는 감정의 다섯 단계가 있습니다.
부정: 당면한 상실에 대한 충격과 불신 단계
분노: 사랑하는누군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사실에 대한 분노단계
타협: '만약'이라는 가정과 후회가 가득한 단계
우울: 상실에서 비롯된 슬픔으로 우울한 단계
수용: 상실을 현실로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단계 (18페이지)
다섯가지 단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저자는 의미 단계를 말합니다. 의미 수업은 고통이상의 것을 발견하고 슬픔의 감정을 이해하며 앞으로 나갈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의미 찾기의 첫 번째 단계는 슬픔의 다섯 번째 단계인 수용이다. 상실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상실은 결코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누구나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겪을 당시에는 아무리 잔인하고 애통한 현실이어도, 그 상실을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
수용의 과정은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례식을 준비하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현실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때 받아들이는 것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죽음은 여전히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서서히 시간이 흐르면서 슬픔의 여러 단계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되며, 한 단계에서 몇 달씩 머물기도 하고 며칠 만에 다른 단계로 가기도 한다. 수용은 그렇게 우리 내면에서 천천히 무르익는다.
(123페이지)
사람이 떠난 뒤에는 관계를 회복할 방법이 없다. 마무리 짓지 않은 일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관계였던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도 대처할 수 있고 관계를 회복할 기회도 잡을 수 있다. 과거에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던 문제들이 있음에도 그 사람을 위해 관계를 회복하는 자리에 가겠는가? 아니면 여전히 거리를 두고 싶은가? 만약 그 사람을 찾아간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나를 반겨주기는 할까?
(222페이지)
세가지 치유 요소
나를 치유한 요소들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세 가지 P'가 떠오른다. 세 가지 P는 유명한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이 인간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고난에 얼마나 잘 대처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인간의 속성이다. 세 가지 P는 다음과 같다.
1. 개인화 Personalization :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에 대해 외부적 요인 또는 내부적 요인 탓을 한다든지, 자신을 비난한다든지, 자신이 그 비극을 겪은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것
2. 침투성 Pervasiveness : 안 좋은 일이 삶의 모든 부분을 망가뜨릴 것이라고 생각하는것
3. 영속성 Permancence : 상실이나 비극의 여파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것
(389페이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쉬링크를 만나 이야기를 하거나, 원형으로 둘러앉아 자기 고통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것이 뭔 소용인가 했었는데 그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감정의 고통은 그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합니다.

슬픔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상실감에 빠진 사람에게 산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등, 삶을 포용하라는 등, 슬픔은 이제 놓아버리다는 등 너무도 쉽게 말한다. 하지만 슬픔을 판단의 영역에 두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겪는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 사람의 고통을 판단하지 않는다. 슬픔이 너무 과하다든지 너무 오랫동안 애도한다든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슬픔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작용이지만 애도는 슬픔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다. 슬픔의 내적작용은 하나의 과정이자 여정이다. 슬픔에는 정해진 수준도, 정해진 기한도 없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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