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초은하단과 행성 >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 -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25
박섭 지음 / 백산서당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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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다섯 학자의 다섯 논문이 실려 있는데, 우파 민족주의 시각이 가장 강력히 드러난다. 그 논문들 각각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식민지기 한국의 경제성장

연구사를 통해 본 경제성장론 식민지상의 대두배경과 문제점

식민지 근대화과정과 아전

1920년대 일제 ‘문화통치기’ 민족언론의 반패권 담론투쟁에 관한 소고

일제하 한국 지식인들의 저항과 식민지 근대화론


마지막 두 개의 논문이 식민지기 우파 민족주의 언론과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행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책의 주요 관점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문화통치시기에 민족주의 언론인 동아일보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밝히는 논문에서, 이 신문은 1920년대 나름대로 식민당국에 저항하고 일제의 지배행태를 비판함으로써 총독부에 상당한 도전을 했다고 글쓴이는 주장한다. 이것은 후에 일제부역언론으로 둔갑하기 이전의 것이지만, 이 역시도 좌파진영으로부터는 개량주의나 타협주의라 해서 비판을 받게 되었고 이후에 세력이 약화되었음을 말한다.

마지막 논문은 단재 신채호와 민세 안재홍, 두 민족주의 지식인의 삶을 추적함으로써 선구적 지식인으로서의 양인의 역할을 부각시킨다. 글쓴이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면서 만약 이것에 따른다면 이런 지식인들은 근대화라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사람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경제학 전공자가 집필한 식민지기 한국의 경제성장을 다룬 첫 번째 논문. 주류경제학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입장에서 그 논문의 결론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고 또한 자주 접해볼 수 있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그 논문의 필자는 소비증가와 참정권확대를 근대화의 키워드로 설정하고, 이에 맞추어 식민지기 근대화가 일정 정도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식민지배의 특질인 지배민족에 의한 토착민족에 대한 조직적 차별이 자행되었고, 식민 지배를 통한 경제성장이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이루어졌을 경제성장과의 비교가 쉽지 않기 때문에 식민지배가 미화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단지 식민지기에 개발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길 바라며 이 시기에 대한 적절한 연구가 한국정부의 정책수립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비교적 안전하고 수긍 가능한 결론을 내린다.


반면 두 번째 논문은 식민지 경제 성장론에 비판적인데, 이는 한국사 정체성론을 수용하는 것이며, 또한 단지 자본가군의 성장에만 주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대=자본주의=선이라는 단순 도식을 좇지 않는다면,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을 때의 조선의 나름의 발전상을 인정한다면 양자의 조화가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글쓴이는 한국이 빈곤에 허덕이던 시절엔 당시의 경제상을 식민지시기의 그것과 연결시키려는 연구시도가 존재치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식민지 경제 성장론은 한국사회의 모든 병폐가 식민지배에서 기인했다는 것과 유사한 환원주의일 뿐이라 말한다. 기존 연구들이 수탈일변도라 비판하지만 실제론 수탈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세 번째 논문은 조선말기와 아전을 다루는데, 제시된 흥미로운 가설은 이렇다. 1) ‘조선후기 아전계층의 신분상승 시도와 좌절’ 2) 국가권력의 실질적 집행자라는 지위를 이용한 수탈적 치부 3) 근대식 교육의 적극적 수용 4) 일제 식민화에 대한 협력과 이를 통한 신분상승.

황현의 ‘매천야록’과 유형업의 ‘구례유씨가의 생활일기’를 사료로 이 가설을 검증하는데, 아쉽게도 가설들이 검증되어 일반화되긴 힘들다는 조금은 맥 빠진 결론으로 끝맺고 있다. 


그러나 말단 관리층에 대한 분석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조선시기 아전들의 힘은 막강해 감사가 ‘협박’을 받아 허위보고를 올려야 할 정도였고, 조정에서도 아전의 난을 두려워해 그들의 행동을 대충 덮은 경우가 있다 한다. 그럼에도 아전들은 신분상승이 제한되어 있었고 그들의 이러한 욕구불만은 심각했는데, 일본이 신분상승과 경제적 이득이라는 유인을 제공하자 그것에 기꺼이 협력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 입장에선 초기 식민지화 과정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일부에 국한된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설령 그들을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 구조 아래 친일로 분류한다 해도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것은 왜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 제도의 실질적 집행자인 말단 관리층에 대한 합리적인 처우가 왜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식민지근대화는 한국사회의 논쟁적 화두 가운데 하나이다. 근대화란 개념 자체가 다분히 논쟁적이며, 서구식 근대화에 대한 맹목적 추종으로 인해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단점도 존재하며, 부족한 자료에 기계적 실증주의에 경도된 연구결과, 또한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연구 성과에 대한 맹목적 부정 등 많은 것이 얽혀 더욱 논쟁을 치열하게 만든다. 각종 선입견이 배제되고 특정한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은 총체적인 연구 성과들을 보다 접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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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왜 개국문제를 다루는가
충성과 반역 - 전환기 일본의 정신사적 위상 나남신서 705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 나남출판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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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틴화된 생활환경에서 돌연 회사의 부도, 생활기반의 붕괴, 종신고용제의 붕괴와 같은 상황은 기성집단에 대한 귀속감을 감소시키고 충성을 전이시킬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러한 소외감과 무질서 의식이 반역의 직접적인 조건이 되는 경우, 자연적인 자아(서구적인 의미에서의 개인의 발견을 거치지 않은 곳에서의 자아)는 내면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이 경우 창조적이며 지속적인 질서형성의 에너지를 기대할 수 없다. 설령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 혁명적 이데올로기가 침투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자아의 차원에서는 이데올로기와의 타성적인 일체화이기 때문에 그 사상적 부동성을 면할 수 없다.


  마루야마는 기성의 충성대상의 급격한 붕괴와 대량적인 충성의 전이라는 의미에서 메이지유신에 비교될 수 있는 1945년 이후의 변혁기에 충성과 반역의 교착이나 모순의 역학을 자아의 내면으로부터 조명하여 나온 자료, 또는 그 문제를 자각화하려고 하는 시도가 전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결국 이 문제는 충성대상이 무엇이었는가를 넘어서서 충성 그 자체의 내적 구조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고 마루야마는 말한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근대 일본에서 충성과 반역의 문제를 자아의 내면성이라는 부분까지 외연성을 넓혀갈 때, 거기에 직접적으로는 ‘부정’의 영상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이중적 의미에서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그러한 에토스를 지탱하는 역사적 = 사회적 기반이 당연히 근대화와 함께-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근대화이든지간에- 해체되어 갈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봉건적인 충성관을 전제로 하는 한 ‘모반’은 가치상징으로서는 어떤 수단으로든지 부정적인 성격을 불식시킬 수 없다는 것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 충성의 실질이 해체되어감에 따라 ‘간쟁’이라든가 ‘모반’이라는 용어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는 것은 자명한 역사적 과정이다. 또한 근대국가의 주권관념이 봉건적인 신분, 길드, 자치도시, 지방단체 등 ‘중간단체’의 자주성과 자립성을 박탈하지 않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국가에서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간세력의 자주성 전통이 근대일본에서는 왜 자발적 집단 속에서 생겨나지 않았으며, 절대주의적인 집중이 국가와 사회의 구별을 명확하게 정착-그것이 절대주의의 중요한 사상사적 역할이었음에도 불구하고-시키는 대신 오히려 국가를 사회로, 역으로 사회를 국가로 함몰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는가. 여기에 함축된 의미를 묻는 것은 단지 역사적 과정을 서술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학적으로도, 사고의 패턴에서도 현대까지 연결되는 테마이다.


  과연 봉건적 충성의 해체에 따라 충성의식 자체가 수동성과 자발성의 이분법적인 긴장을 상실하고 진행되었는가. ‘모반’이 마치 부정의 상징으로서 강력했기 때문에 충성의 轉移는 통절한 자아 내부의 갈등으로서 의식되고 그 마찰이 또한 반역의 내발적인 에너지를 축적시킨 것은 아닌가. 자아의 차원에서의 모반의식이 세계문화적인 대세인 ‘인류해방의 신기운’으로의 협조나 역사적 필연으로서의 체제적 혁명사상 속에 흡수되었을 때, 오히려 조직에 대한 충성과 원리에 대한 충성이 유착하는 경향을 강하게 띠지는 않는가. 한편, 조직의 관료화에 대한 반역은 천황제의 경우에도, 이단의 ‘천황제’화의 경우에도, 모든 자발성을 결여한 자아의 물리적인 폭발, 육체적인 난무로서 나타난 것은 아닌가. 원래 근대 일본의 조직의 에토스는 구체제 하의 충성구조의 어떤 것을 계승하고, 어떤 것을 계승하였는가-이러한 문제는 현대에 있어서도 나날이 결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채무관계로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부정을 부정인 채로 미화한다던지, 배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오늘날 책임과 행동에서 부정의 상으로부터 긍정의 상을 읽어내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본래 충절이 없는 자는 역심도 없다’라는 패러독스는 여기에 얽혀있는 모든 역사적 제약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어떤 영원한 모순을 말해준다.


  ‘닫힌 사회’인 바쿠한(幕府)체제의 기본적 특징은 祖法墨守, 新儀(철저한 전통주의) + 지족안분(소극적 보신주의)이다. 그 결과 토쿠토미 소오호오(德富蘇峰)는 당시 일본의 실제의 주권자는 관습이라 하며, 후쿠자와 유키찌(福澤諭吉)는 일본 국내의 천만인의 사람들은 각기 천만 개의 상자 속에 갖혀 있으며, 천만 개의 벽으로 서로 유리되어 있고, 신성화된 타부에 의해 지켜지는 것은 경험적,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구체적으로 형해화된 루틴으로, 태평세월의 지속은 자연적인 소여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고 한다. 닫힌 사회가 완전히 이질적인 것에 접촉할 때 나타나는 반응의 모델케이스는 본능적인 혐오감과 공포의 콤플렉스이다. 몇 가지 반응을 보면 간사한 민중과 교활한 양이(奸民狡夷)라는 의식, 일본과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中華와 洋夷라는 도식을 차용하여 파악하는 양이론 등이 그것이다. 교활한 양이에 대한 경계감은 교역을 통해 잠입하는 邪敎와 교역에 수반하는 금은유출과 물가앙등을 통해 증대된다. 다만, 이 요소는 양이론의 근거가 되면서 하급무사 및 서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후에 討幕운동을 일으키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유학사상은 華夷內外의 구별이라는 배외사상이, 코쿠가쿠(國學, 復古神道)는 일본은 神國 내지는 皇國의 나라라는 배외사상으로 나타난다.


  쿠로후네(黑船)는 강고한 조직력, 계획성, 단호한 외교방침을 지닌 근대 주권국가의 상징이며, 아편전쟁의 지식을 통해 상상하고 공포였던 사실을 현실화했다. 그것은 유교사상 및 코쿠가쿠사상에 공통요소였던 배외사상의 파산을 의미하며, 현실에 대한 적응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양자는 어떻게 스스로의 입장을 변화해 갔는가. 이것은 양이론의 변질과 국제환경에 대한 적합의 문제이며, 특히 국제사회에 대한 인식의 문제와 개국을 정당화하는 방편의 문제이기도 하다. 먼저 국제사회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보면, 세력균형, 국민국가의 동렬적 병존 의식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주자학에 내재하는 일종의 자연법적 관념의 매개적 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국제법적 관념의 수용을 보면 유교사상은 유교적인 天道, 天理의 관념에서 초월적인 규범성의 계기를 철저화하는 것을 통해 국가들의 행동을 구속하는 국제법규의 존재의 승인이 순조롭게 행해졌다. 국제법규, 국제도덕의 존재와 국제신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우주를 지배하는 조리가 동시에 인간사회에 도로서 타당하다고 하는 유교적 자연법 관념을 여과하는 것에 의해 내면적 근거를 얻었다. 코쿠가쿠사상의 입장에서는 기성의 사고범주를 넘어설 수 없는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행하는 역사적 역할을 승인할 필요성에서 근대적인 국제법 의식, 국가평등 관념의 확립은 전통적 사유양식의 내부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러나 사고나 관념에서는 제도나 기구보다 강한 타성이 있으며, 새로운 관념이 순조롭게 내면화되기 위해서는 종종 과거의 관념의 외투를 입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일본의 개국은 격식(禮)의 급속한 해체에 의해 열린 사회와 그 논리를 발아시키는 동시에, 항상 공격 또는 방어를 대비하는 즉, 전투태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전국시대의 군사적 사고양식을 부활시켰다. 닫힌 사회의 급속한 붕괴가 발생시킨 현상에 대한 메이지정부의 대책( 정책)은

   - 수 없이 많은 포고문 : 혼란한 상황에 대해 메이지정부는 포고문을 최저변에까지 하달하기 위해 지금까지 최하층과 온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나누시(名主)나 토시요리(年寄り)를 말단관료로 이용하고 그들에 의해 신민의식의 철저화를 도모

   - 하급무사의 분해 : 권력탈취의 과정에서 가장 급진적인 분자를 신정권의 기반구축을 위해 도태시키는 시책을 폄으로써 메이지정부에 대한 저항, 반항운동의 에너지를 낳게 되어 민권운동으로 연결

  그리고 닫힌 사회의 붕괴가 낳은 적극적 요소와 그 좌절로는

   - 민간 저널리즘의 발달과 다양한 진로 앞에 자주적인 선택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하는 합리주의적 사고의 발아

   - 자주적 결사의 발상 : 자립성과 자발적 연대의 발상


  자주적 결사의 발상으로 메이로쿠샤(明六社)를 들 수 있다. 비정치적인 목적을 지닌 자주적 결사가 그 입지에서 정치를 포함한 시대의 중요한 과제에 대해 부단히 비판하는 전통이 형성되어 갈 때, 비로소 정치주의냐 문화주의냐 라는 양자택일의 사고관습이 타파되고, 비정치적인 영역으로부터 발하여지는 정치적 발언이라고 하는 근대 시민의 모델이 육성되는 것이 기대된다. 그러나 정치와 다른 차원(종교, 학문, 예술, 교육 등)에서 조직된 자주적 결사의 전통이 정착되지 않은 나라(일본이 그렇다)에서는 모든 사회적 결사는 구조상으로도, 기능상으로도 정치단체를 모델로서 그것에 가장 근접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정당은 정당으로서 가장 강력한 정치단체로서의 정부의 축소판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사회단체가 국가에 병탄되어 흡수되기 쉬운 磁場이 형성되게 된다.


  민권운동은 포고에 의한 위로부터의 공세에 대하여 아래로부터의 에너지가 명확한 목표와 형태를 갖고 발생한 저항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에너지는 정부의 교육통제나 언론․집회의 탄압에 대하여 일시적으로는 저항 에너지를 지속시켰지만, 이질적인 것과의 교섭이 발달하지 못한 메이지시기에는 전통적인 대륙문화권에 대한 의존의 탈각이 서구세계를 향한 인식의 해방과 문화에 대한 개인의 자각이라는 양방향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은 압도적으로 개인보다는 내셔널리즘 차원에서 행해졌다. 그 경우 개인은 일본이라는 국가와 동일시된 개인이었다. 결국 문명개화적 생활양식으로의 급변은 다분히 집단전향의 경향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닫힌 사회의 장벽을 불식시키고 발생한 다이나믹한 요소들을 천황제 국가라는 또 다른 하나의 닫힌 사회의 형성을 위한 방향으로 집단적 에너지를 수렴해 갔다는 비밀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 체험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는 어디까지나 제3의 개국에 직면하고 있는 현재, 우리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의 문제라고 마루야마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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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b > 이념 논쟁이 필요해.
이정 박헌영 일대기
임경석 지음, 이정박헌영기념사업회 엮음 / 역사비평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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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정 박헌영 전집의 일부입니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함께 해방 이후 정국을 주도했던 그에 대해서 객관적인 자료는 부족한 채, 왼쪽이든 오른쪽의 편향적인 평가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쓰여졌습니다.
일대기는 그와 관련한 신문이며, 경찰 및 미군정의 자료들을 연대기 대로 나열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저자의 판단은 최대한 절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의 역사에 대한 어리석은 접근 중의 하나는, '왼쪽이 옳으냐 오른쪽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며, 자칫 소모적인 비난으로 치우치기도 합니다.
좀 더 발전적으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그들의 행보를 둘러싼 이해관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해방이라는 권력의 공백기 상태에서 각각의 세력과 인물들이 구상했던 사회상과 실천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박헌영이라는 인물에 대한 연구가 50년 동안이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치가는 대중들의 정치적 열망을 대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대한 연구는 곧, 해방 직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 대한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에 대한 연구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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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통해서 우리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전형을 옅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와있지만, 박헌영 역시도 그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1919년 3ㆍ1 운동을 통해 정치활동을 시작하며, 이어진 일제의 탄압, 그리고 망명. 망명지는 1923년 간도대지진 이전까지는 일본이었고, 이후에는 중국이었습니다. 물론, 정치활동과 상관없이 일제 하 200만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일본, 만주, 중국, 미국, 등지로 떠나게 되죠.

여튼, 1923년 이후 중국으로 모인 조선의 정치가들은 자연스럽게 러시아 및 중국의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게 되고, 그 속에서 그(녀)들 각자의 정치적 경향은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박헌영의 경우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조선에서부터 외국어(영어 및 에스페란토어)에 능숙했던 그는 러시아 대학에서 수학합니다. 그가 러시아로부터 정치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이후의 그의 활동은, 조선 내에서 공산당을 설립하는 것으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두차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해방이 될 때 즈음 그는 목수로 위장해 지하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조선공산당을 수면 위로 띄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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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좌익' 내지는 '공산당' 이라는 한마디로 일축하는 해방 이후의 세력이란, 사실 굉장히 다양한 세력들의 집합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좌익' 으로 묶인 상당수 세력 중에, 실제 해방 이후에 사회주의 강령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세력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해방 이후의 정치적 이슈는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오랜 일제 치하와 독립에 대한 열망 속에서,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슈는 (1) 친일파 청산 (2) 봉건적 지주제의 청산 (3) 스스로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닦는 것 이 세가지에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해방 직후 대중들의 정치적 지지는 이러한 요구의 대변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었죠. 조선공산당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세가 급변하는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직후 불거진 찬탁/반탁이 정치적 이슈로 부각하면서 부터입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조선인들 스스로 국가를 수립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서 당시 조선에 진주하고 있던 미국과 소련 양국이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제반 원조 방안을 논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 회의안을 기점으로 조선은 찬탁/반탁의 열풍으로 휩싸이게 되고, 응당 이 회의안에 찬성했던 정치세력들의 입지가 줄어들게 됩니다.

더 이상은 외국에 의한 지배를 원하지 않았던 조선인들의 열망에 비해, 그것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다수 정치세력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이 조선인의 정부 수립을 인정하고 지원한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었던 듯 하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안에 찬성했던 정치세력들이 찬탁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 반사적 이익을 통해 정치적 입지가 넓어진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을 제출했던 미국과 미군정, 그리고 한국민주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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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탁/반탁 논쟁과 더불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 정체성을 옅볼 수 있는 것은, 좌우합작입니다.
좌우합작은 조선인민당의 여운형 선생이 주도합니다. 그런데, 좌우합작의 핵심은 좌와 우를 합작한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의 핵심은 자주적 정부의 구성에 있습니다.

앞에서 해방 이후 정치적 이슈의 핵심은 (1) 친일파 청산 (2) 봉건적 지주제의 청산 (3) 스스로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닦는 것 에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좌우합작이란 (3) 을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공산당은 (1)과 (2)가 전제되지 않은 좌우합작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좌우합작은 여운형의 암살과 함께 실패하고 맙니다.

조선공산당이 좌우합작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남과 북의 분리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1) (2) (3) 세가지 모두에게서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조선공산당이 스스로의 정치적 목표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1) (2) 없는 (3) 만을 이룰 수는 없었던 조선공산당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1) (2) (3) 모두를 이루고자 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좌우합작 실패를 즈음하여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이, 활동의 축을 북으로 옮기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3당 합당을 통한 남로당의 결성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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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옮겨간 이후의 박헌영의 행적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없었습니다.
곧 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정전협상 이후 그는 미국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합니다. (조선노동당 내에 남과 북 모두 여러 경향이 혼재되어 있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는 사실이나, 새로운 자료를 통해 신중히 접근해야 할 부분입니다.)

박헌영. 그 역시 정치 외에 개인적 행적을 거의 남기지 않은 열정적인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조선공산당 당수이기 이전에, 해방 이후 조선인들의 정치적 열망을 대변하고자 했던 정치가였고, 북으로 넘어가기 까지 친일파 청산, 봉건 지주제의 청산, 자주적인 국가의 수립이라는 열망 그대로를 포기하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불필요한 이념 논쟁' 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념 논쟁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불필요한 것은 이념 논쟁의 흉내를 내는 엉터리 편가르기 싸움입니다.
박헌영 그에 대한 연구가, 해방이라는 정치적 열망으로 가득찬 역사의 한 순간을 돌아보는데 있어서, 진정한 이념 논쟁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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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우리의 성기를 인정하고, 기억하고, 말하기
버자이너 모놀로그
이브 엔슬러 지음, 류숙렬 옮김 / 북하우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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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성교육 지침서 『기저귀부터 데이트까지(From Diapers to Dating)』를 쓴 데브라 해프너가 이같은 성교육 지침서를 쓰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오래 전 일인데 생후 18개월 된 딸을 데리고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Geogia O'Keeffe)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갤러리를 둘러보던 중의 일이었다.

오키프의 작품을 보고 있던 그녀의 딸이 갑자기 오키프 대표작 중 하나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딸의 목소리는 갤러리 안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녀의 딸은 “엄마, 저것 봐. 벌바(vulva)야!” 라고 외쳤다. “Vulva”가 뭔지 모르는 분들은 영어 사전을 구입하고서도 별로 궁금한 것이 없었던 분들일 게다. 통계 조사된 바는, 물론 없겠지만 통계를 내보면 섹스(SEX)를 제외하고 영어사전 검색 순위 10위 안에 틀림없이 들어갈 만한 단어가 바로 이 말이다. 아직도 이 말의 뜻을 모르는 분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찾아보시기 바란다.

미국의 유명 화가이자 여성인 조지아 오키프의 ‘꽃잎’ 그림들은 본의든 아니든 종종 앞서의 에피소드와 같이 여성의 성기를 묘사한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오키프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그와 같은 성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비춰지는 것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데브라 헤프너의 딸의 눈에 비친 것처럼 그녀가 그린 작품들은 간혹 여성의 성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vulva”는 해부학적으로는 여성의 외음부(外陰部)를 의미한다. 이브 엔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The Vagina Monologues)』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vagina”는 질(膣), 즉 음문(陰門)을 의미하지만, 이 책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Vagina”는 여성의 복잡한 성기구조 가운데 일부를 차지하는 질이나 음부 자체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어린 소녀가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보지”란 말을 했을 때(“vagina”나 “vulva”는 실감이 안 나므로), 그 어머니가 한 여성으로 느꼈을 당혹감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남자 아이들의 돌 사진 중에는 성기를 드러낸 사진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데 반해 여자 아이들의 돌 사진에서 그런 사진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물론 최근에는 남자 아이들의 경우에도 가려주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대세인 듯하다. 이 책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적인 폭력을 경험했던 저자 이브 엔슬러가 연령과 국적을 불문하고, 뉴욕으로부터 보스니아의 난민촌에 이르기 까지 각계각층의 여성 200여명을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만약 이브 엔슬러가 사회학자였다거나 인류학자였다면 책의 내용이나 형식도 달라졌겠지만, 이브 엔슬러는 극작가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몇 년 전부터 국내의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연극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 연극의 원대본인 셈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서문을 통해 나는 영어로 여성의 성기를 표현하는 단어가 우리말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하나의 사물 혹은 부위에 대해 표현하는 단어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네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친밀한 대상이란 뜻이지만, ‘보지’도 과연 그런가? 스타이넘은 “그런데도 나는 여성의 성기에 대해 정확한 표현을 들어보지 못했고, 긍지를 느낄 수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브 엔슬러가 이른바  “보지의 독백”이라고 옮길 만한 파격적인 제목의 책을 쓴 까닭이 거기에 있다. 성별(性別)을 불문하고 어떤 한 인간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열등감이 어떤 한 개인이 지극히 개인적인 까닭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한 성(性)으로 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지니도록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사회의 문제이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의 뜻도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브 엔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가장 정치적인 텍스트이다.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됩니다. 비밀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두려움과 잘못된 신화가 되기 쉽습니다. 나는 언젠가 그것이 부끄럽지도 않고 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기를 바라기 때문에 입 밖에 내어 말하기로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자신과 분리해서 사고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나의 손”이라고 느끼는 것, 내 “몸과 마음이 분열”되어 있으며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 분열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강제되고, 은폐될 때, ‘여성’으로 분류되는 인간뿐만 아니라 그것을 강제하는 ‘남성’사회도 더 크게 느끼지 못할 뿐 왜곡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끝으로 남성의 성기도 공공연히 이야기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상황인데 어째서 여성들의 성기만이 연극으로 올려지고 이야기되어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또 그와 반대로 여성의 성기를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 그것이 허락될 만큼 충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닌 - 주변의 여성에게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경우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전자의 경우,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상황 자체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면 함께 싸우면 될 일이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보지’(말하면서도 영 쑥스러운 나 자신을 느끼지만)를 죄의식 없이 느끼도록 하는 정신적/육체적 해방과 동시에 정치적/문화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엔 좀더 복잡해서 스스로 남성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척하면서 구태여 원치 않는 상대에게 과도한 언어노출을 시도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사회적인 차원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중층적인 심층구조(deep structure)란 것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이제는 우리의 성기를 인정하고, 기억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들 자신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란 것은 확실하다.  독백을 극복하는 건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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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率路 > 아리스토텔레스, 경제학을 구출하다(?)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소재의 독창성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곤한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능력있는 젊은 인문학자들을 새로이 발굴해내는 기능 또한 이 시리즈의 무시못할 장점이기는 하지만, 이 문고본의 가장 큰 의의는 역시 그 짧은 분량상의 한계를 독창성으로 커버해 낸다는 점에 있는 듯 싶다.

아리스토텔레스 관련 서적들을 검색하다보면 대부분은 철학과 정치학 관련된 것들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는 제목부터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사실 책의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이라고만 국한해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외려 본서는 '경제학의 계보학'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맑스가 '자본'을 쓸때만해도 '경제학'이라는 용어는 없었다. 단지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만 있었을 뿐.(때문에 '자본'의 부제는 '경제학 비판'이 아닌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그 이전에도 경제학은 경제학 그 스스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과거 아테네의 폴리스 운운하던 시절까지 내려갈 것도 없이 산업화 초기단계까지만해도 경제학을 다룸에 있어, 무엇이 좋은 삶이고, 무엇이 옳은 삶인지에 대한 논의를 경제학으로부터 떼어놓지 않았다. 그거 아는가? 오늘날 경제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아담스미스는 경제학자(물론 당대에는 그나마도 '경제학자'가 아닌 '정치경제학자'로 불리웠다)이기 이전에 윤리학자였음을. 경제학을 사회, 정치 및 가정으로부터 독립시키고, 희소성(사실, 희소한 물건은 '없다' 단지 그것을 독점해낼 수 있는 권력이 희소할 뿐이다.)과 시장가격이란 개념을 우상화 시키는 행태는 유구한 인간 역사속의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경제 관료들과 경제학자들에서부터 오늘도 여기저기서 찌질한 댓글달고 앉아있는 키보드 워리어들까지 경제가 우리 삶의 가장 우선된 무엇이라는 가정하에 세상만사를 논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것이 '경제'라면 '경제학'을 인간이 배제된 '순수한'경제학으로 다루는 것은 경제학 자신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박탈하는 일일게다. 실제로도 그런 '순수한'경제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파레토 최적이니 이런게 실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은, 모든걸 시장에 맡겨야 하기에 노동시장도 '완전개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임은, 다른 누구보다 경제학자들과 관료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경제학은 수익성이 맞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을 실업의 구덩이로 몰아놓고, 혹은 제3세계 어린이들을 저임금과 장시간의 중노동 속에서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해놓고, 그것이 시장의 뜻입네 하는 식의, 그저 가진자의 좋은 핑계꺼리가 되고 말았다.(그런면에서 오늘의 고상한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도덕적 판단 기준조차 시장에 맡기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알고보면 불쌍한 영혼들인지도 모르겠다.)그럼, 시장이 신인가? 이것이 신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극복해 내어야할 신이 아닐까? 안되면 되게하라는 식의 구호는 사회적 약자를 탄압하는 곳이 아닌 이런 곳에 써먹으라고 있는 멘트이다.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기 보다는 오늘의 삶이 피폐해진 이유를 변명하는 데에나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이러한 오늘의 경제학 속에서는, 사실상 어떤 한 순간에라도 '경제가 좋아졌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저 한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경제학을 극복해 내고 새로운 경제학에 대한 논의를 해 나아가는 것은 기존 경제학의 '신화'가 너무도 강고하기에 쉬운 일은 아닐게다. 아마 저자가 오래전 철학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경제학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한 것은 그 새로운 논의를 위한 시작지점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 시작지점을 만들기 위한 저자의 이러한 '희생타'는 매우 멋졌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제 문제는, 저자의 그 멋진 희생타를 기초로 삼아 새로이 경제를 이야기 해 나가야 할 우리 모두의 노력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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