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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과 반역 - 전환기 일본의 정신사적 위상 나남신서 705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 나남출판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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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루틴화된 생활환경에서 돌연 회사의 부도, 생활기반의 붕괴, 종신고용제의 붕괴와 같은 상황은 기성집단에 대한 귀속감을 감소시키고 충성을 전이시킬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러한 소외감과 무질서 의식이 반역의 직접적인 조건이 되는 경우, 자연적인 자아(서구적인 의미에서의 개인의 발견을 거치지 않은 곳에서의 자아)는 내면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이 경우 창조적이며 지속적인 질서형성의 에너지를 기대할 수 없다. 설령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 혁명적 이데올로기가 침투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자아의 차원에서는 이데올로기와의 타성적인 일체화이기 때문에 그 사상적 부동성을 면할 수 없다.


  마루야마는 기성의 충성대상의 급격한 붕괴와 대량적인 충성의 전이라는 의미에서 메이지유신에 비교될 수 있는 1945년 이후의 변혁기에 충성과 반역의 교착이나 모순의 역학을 자아의 내면으로부터 조명하여 나온 자료, 또는 그 문제를 자각화하려고 하는 시도가 전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결국 이 문제는 충성대상이 무엇이었는가를 넘어서서 충성 그 자체의 내적 구조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고 마루야마는 말한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근대 일본에서 충성과 반역의 문제를 자아의 내면성이라는 부분까지 외연성을 넓혀갈 때, 거기에 직접적으로는 ‘부정’의 영상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이중적 의미에서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그러한 에토스를 지탱하는 역사적 = 사회적 기반이 당연히 근대화와 함께-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근대화이든지간에- 해체되어 갈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봉건적인 충성관을 전제로 하는 한 ‘모반’은 가치상징으로서는 어떤 수단으로든지 부정적인 성격을 불식시킬 수 없다는 것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 충성의 실질이 해체되어감에 따라 ‘간쟁’이라든가 ‘모반’이라는 용어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는 것은 자명한 역사적 과정이다. 또한 근대국가의 주권관념이 봉건적인 신분, 길드, 자치도시, 지방단체 등 ‘중간단체’의 자주성과 자립성을 박탈하지 않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국가에서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간세력의 자주성 전통이 근대일본에서는 왜 자발적 집단 속에서 생겨나지 않았으며, 절대주의적인 집중이 국가와 사회의 구별을 명확하게 정착-그것이 절대주의의 중요한 사상사적 역할이었음에도 불구하고-시키는 대신 오히려 국가를 사회로, 역으로 사회를 국가로 함몰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는가. 여기에 함축된 의미를 묻는 것은 단지 역사적 과정을 서술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학적으로도, 사고의 패턴에서도 현대까지 연결되는 테마이다.


  과연 봉건적 충성의 해체에 따라 충성의식 자체가 수동성과 자발성의 이분법적인 긴장을 상실하고 진행되었는가. ‘모반’이 마치 부정의 상징으로서 강력했기 때문에 충성의 轉移는 통절한 자아 내부의 갈등으로서 의식되고 그 마찰이 또한 반역의 내발적인 에너지를 축적시킨 것은 아닌가. 자아의 차원에서의 모반의식이 세계문화적인 대세인 ‘인류해방의 신기운’으로의 협조나 역사적 필연으로서의 체제적 혁명사상 속에 흡수되었을 때, 오히려 조직에 대한 충성과 원리에 대한 충성이 유착하는 경향을 강하게 띠지는 않는가. 한편, 조직의 관료화에 대한 반역은 천황제의 경우에도, 이단의 ‘천황제’화의 경우에도, 모든 자발성을 결여한 자아의 물리적인 폭발, 육체적인 난무로서 나타난 것은 아닌가. 원래 근대 일본의 조직의 에토스는 구체제 하의 충성구조의 어떤 것을 계승하고, 어떤 것을 계승하였는가-이러한 문제는 현대에 있어서도 나날이 결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채무관계로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부정을 부정인 채로 미화한다던지, 배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오늘날 책임과 행동에서 부정의 상으로부터 긍정의 상을 읽어내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본래 충절이 없는 자는 역심도 없다’라는 패러독스는 여기에 얽혀있는 모든 역사적 제약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어떤 영원한 모순을 말해준다.


  ‘닫힌 사회’인 바쿠한(幕府)체제의 기본적 특징은 祖法墨守, 新儀(철저한 전통주의) + 지족안분(소극적 보신주의)이다. 그 결과 토쿠토미 소오호오(德富蘇峰)는 당시 일본의 실제의 주권자는 관습이라 하며, 후쿠자와 유키찌(福澤諭吉)는 일본 국내의 천만인의 사람들은 각기 천만 개의 상자 속에 갖혀 있으며, 천만 개의 벽으로 서로 유리되어 있고, 신성화된 타부에 의해 지켜지는 것은 경험적,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구체적으로 형해화된 루틴으로, 태평세월의 지속은 자연적인 소여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고 한다. 닫힌 사회가 완전히 이질적인 것에 접촉할 때 나타나는 반응의 모델케이스는 본능적인 혐오감과 공포의 콤플렉스이다. 몇 가지 반응을 보면 간사한 민중과 교활한 양이(奸民狡夷)라는 의식, 일본과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中華와 洋夷라는 도식을 차용하여 파악하는 양이론 등이 그것이다. 교활한 양이에 대한 경계감은 교역을 통해 잠입하는 邪敎와 교역에 수반하는 금은유출과 물가앙등을 통해 증대된다. 다만, 이 요소는 양이론의 근거가 되면서 하급무사 및 서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후에 討幕운동을 일으키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유학사상은 華夷內外의 구별이라는 배외사상이, 코쿠가쿠(國學, 復古神道)는 일본은 神國 내지는 皇國의 나라라는 배외사상으로 나타난다.


  쿠로후네(黑船)는 강고한 조직력, 계획성, 단호한 외교방침을 지닌 근대 주권국가의 상징이며, 아편전쟁의 지식을 통해 상상하고 공포였던 사실을 현실화했다. 그것은 유교사상 및 코쿠가쿠사상에 공통요소였던 배외사상의 파산을 의미하며, 현실에 대한 적응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양자는 어떻게 스스로의 입장을 변화해 갔는가. 이것은 양이론의 변질과 국제환경에 대한 적합의 문제이며, 특히 국제사회에 대한 인식의 문제와 개국을 정당화하는 방편의 문제이기도 하다. 먼저 국제사회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보면, 세력균형, 국민국가의 동렬적 병존 의식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주자학에 내재하는 일종의 자연법적 관념의 매개적 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국제법적 관념의 수용을 보면 유교사상은 유교적인 天道, 天理의 관념에서 초월적인 규범성의 계기를 철저화하는 것을 통해 국가들의 행동을 구속하는 국제법규의 존재의 승인이 순조롭게 행해졌다. 국제법규, 국제도덕의 존재와 국제신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우주를 지배하는 조리가 동시에 인간사회에 도로서 타당하다고 하는 유교적 자연법 관념을 여과하는 것에 의해 내면적 근거를 얻었다. 코쿠가쿠사상의 입장에서는 기성의 사고범주를 넘어설 수 없는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행하는 역사적 역할을 승인할 필요성에서 근대적인 국제법 의식, 국가평등 관념의 확립은 전통적 사유양식의 내부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러나 사고나 관념에서는 제도나 기구보다 강한 타성이 있으며, 새로운 관념이 순조롭게 내면화되기 위해서는 종종 과거의 관념의 외투를 입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일본의 개국은 격식(禮)의 급속한 해체에 의해 열린 사회와 그 논리를 발아시키는 동시에, 항상 공격 또는 방어를 대비하는 즉, 전투태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전국시대의 군사적 사고양식을 부활시켰다. 닫힌 사회의 급속한 붕괴가 발생시킨 현상에 대한 메이지정부의 대책( 정책)은

   - 수 없이 많은 포고문 : 혼란한 상황에 대해 메이지정부는 포고문을 최저변에까지 하달하기 위해 지금까지 최하층과 온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나누시(名主)나 토시요리(年寄り)를 말단관료로 이용하고 그들에 의해 신민의식의 철저화를 도모

   - 하급무사의 분해 : 권력탈취의 과정에서 가장 급진적인 분자를 신정권의 기반구축을 위해 도태시키는 시책을 폄으로써 메이지정부에 대한 저항, 반항운동의 에너지를 낳게 되어 민권운동으로 연결

  그리고 닫힌 사회의 붕괴가 낳은 적극적 요소와 그 좌절로는

   - 민간 저널리즘의 발달과 다양한 진로 앞에 자주적인 선택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하는 합리주의적 사고의 발아

   - 자주적 결사의 발상 : 자립성과 자발적 연대의 발상


  자주적 결사의 발상으로 메이로쿠샤(明六社)를 들 수 있다. 비정치적인 목적을 지닌 자주적 결사가 그 입지에서 정치를 포함한 시대의 중요한 과제에 대해 부단히 비판하는 전통이 형성되어 갈 때, 비로소 정치주의냐 문화주의냐 라는 양자택일의 사고관습이 타파되고, 비정치적인 영역으로부터 발하여지는 정치적 발언이라고 하는 근대 시민의 모델이 육성되는 것이 기대된다. 그러나 정치와 다른 차원(종교, 학문, 예술, 교육 등)에서 조직된 자주적 결사의 전통이 정착되지 않은 나라(일본이 그렇다)에서는 모든 사회적 결사는 구조상으로도, 기능상으로도 정치단체를 모델로서 그것에 가장 근접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정당은 정당으로서 가장 강력한 정치단체로서의 정부의 축소판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사회단체가 국가에 병탄되어 흡수되기 쉬운 磁場이 형성되게 된다.


  민권운동은 포고에 의한 위로부터의 공세에 대하여 아래로부터의 에너지가 명확한 목표와 형태를 갖고 발생한 저항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에너지는 정부의 교육통제나 언론․집회의 탄압에 대하여 일시적으로는 저항 에너지를 지속시켰지만, 이질적인 것과의 교섭이 발달하지 못한 메이지시기에는 전통적인 대륙문화권에 대한 의존의 탈각이 서구세계를 향한 인식의 해방과 문화에 대한 개인의 자각이라는 양방향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은 압도적으로 개인보다는 내셔널리즘 차원에서 행해졌다. 그 경우 개인은 일본이라는 국가와 동일시된 개인이었다. 결국 문명개화적 생활양식으로의 급변은 다분히 집단전향의 경향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닫힌 사회의 장벽을 불식시키고 발생한 다이나믹한 요소들을 천황제 국가라는 또 다른 하나의 닫힌 사회의 형성을 위한 방향으로 집단적 에너지를 수렴해 갔다는 비밀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 체험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는 어디까지나 제3의 개국에 직면하고 있는 현재, 우리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의 문제라고 마루야마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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