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b > 이념 논쟁이 필요해.
이정 박헌영 일대기
임경석 지음, 이정박헌영기념사업회 엮음 / 역사비평사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이정 박헌영 전집의 일부입니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함께 해방 이후 정국을 주도했던 그에 대해서 객관적인 자료는 부족한 채, 왼쪽이든 오른쪽의 편향적인 평가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쓰여졌습니다.
일대기는 그와 관련한 신문이며, 경찰 및 미군정의 자료들을 연대기 대로 나열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저자의 판단은 최대한 절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의 역사에 대한 어리석은 접근 중의 하나는, '왼쪽이 옳으냐 오른쪽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며, 자칫 소모적인 비난으로 치우치기도 합니다.
좀 더 발전적으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그들의 행보를 둘러싼 이해관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해방이라는 권력의 공백기 상태에서 각각의 세력과 인물들이 구상했던 사회상과 실천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박헌영이라는 인물에 대한 연구가 50년 동안이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치가는 대중들의 정치적 열망을 대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대한 연구는 곧, 해방 직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 대한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에 대한 연구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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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통해서 우리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전형을 옅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와있지만, 박헌영 역시도 그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1919년 3ㆍ1 운동을 통해 정치활동을 시작하며, 이어진 일제의 탄압, 그리고 망명. 망명지는 1923년 간도대지진 이전까지는 일본이었고, 이후에는 중국이었습니다. 물론, 정치활동과 상관없이 일제 하 200만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일본, 만주, 중국, 미국, 등지로 떠나게 되죠.

여튼, 1923년 이후 중국으로 모인 조선의 정치가들은 자연스럽게 러시아 및 중국의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게 되고, 그 속에서 그(녀)들 각자의 정치적 경향은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박헌영의 경우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조선에서부터 외국어(영어 및 에스페란토어)에 능숙했던 그는 러시아 대학에서 수학합니다. 그가 러시아로부터 정치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이후의 그의 활동은, 조선 내에서 공산당을 설립하는 것으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두차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해방이 될 때 즈음 그는 목수로 위장해 지하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조선공산당을 수면 위로 띄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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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좌익' 내지는 '공산당' 이라는 한마디로 일축하는 해방 이후의 세력이란, 사실 굉장히 다양한 세력들의 집합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좌익' 으로 묶인 상당수 세력 중에, 실제 해방 이후에 사회주의 강령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세력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해방 이후의 정치적 이슈는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오랜 일제 치하와 독립에 대한 열망 속에서,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슈는 (1) 친일파 청산 (2) 봉건적 지주제의 청산 (3) 스스로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닦는 것 이 세가지에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해방 직후 대중들의 정치적 지지는 이러한 요구의 대변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었죠. 조선공산당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세가 급변하는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직후 불거진 찬탁/반탁이 정치적 이슈로 부각하면서 부터입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조선인들 스스로 국가를 수립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서 당시 조선에 진주하고 있던 미국과 소련 양국이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제반 원조 방안을 논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 회의안을 기점으로 조선은 찬탁/반탁의 열풍으로 휩싸이게 되고, 응당 이 회의안에 찬성했던 정치세력들의 입지가 줄어들게 됩니다.

더 이상은 외국에 의한 지배를 원하지 않았던 조선인들의 열망에 비해, 그것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다수 정치세력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이 조선인의 정부 수립을 인정하고 지원한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었던 듯 하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안에 찬성했던 정치세력들이 찬탁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 반사적 이익을 통해 정치적 입지가 넓어진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을 제출했던 미국과 미군정, 그리고 한국민주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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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탁/반탁 논쟁과 더불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 정체성을 옅볼 수 있는 것은, 좌우합작입니다.
좌우합작은 조선인민당의 여운형 선생이 주도합니다. 그런데, 좌우합작의 핵심은 좌와 우를 합작한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의 핵심은 자주적 정부의 구성에 있습니다.

앞에서 해방 이후 정치적 이슈의 핵심은 (1) 친일파 청산 (2) 봉건적 지주제의 청산 (3) 스스로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닦는 것 에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좌우합작이란 (3) 을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공산당은 (1)과 (2)가 전제되지 않은 좌우합작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좌우합작은 여운형의 암살과 함께 실패하고 맙니다.

조선공산당이 좌우합작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남과 북의 분리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1) (2) (3) 세가지 모두에게서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조선공산당이 스스로의 정치적 목표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1) (2) 없는 (3) 만을 이룰 수는 없었던 조선공산당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1) (2) (3) 모두를 이루고자 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좌우합작 실패를 즈음하여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이, 활동의 축을 북으로 옮기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3당 합당을 통한 남로당의 결성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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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옮겨간 이후의 박헌영의 행적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없었습니다.
곧 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정전협상 이후 그는 미국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합니다. (조선노동당 내에 남과 북 모두 여러 경향이 혼재되어 있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는 사실이나, 새로운 자료를 통해 신중히 접근해야 할 부분입니다.)

박헌영. 그 역시 정치 외에 개인적 행적을 거의 남기지 않은 열정적인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조선공산당 당수이기 이전에, 해방 이후 조선인들의 정치적 열망을 대변하고자 했던 정치가였고, 북으로 넘어가기 까지 친일파 청산, 봉건 지주제의 청산, 자주적인 국가의 수립이라는 열망 그대로를 포기하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불필요한 이념 논쟁' 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념 논쟁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불필요한 것은 이념 논쟁의 흉내를 내는 엉터리 편가르기 싸움입니다.
박헌영 그에 대한 연구가, 해방이라는 정치적 열망으로 가득찬 역사의 한 순간을 돌아보는데 있어서, 진정한 이념 논쟁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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