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우리의 성기를 인정하고, 기억하고, 말하기
버자이너 모놀로그
이브 엔슬러 지음, 류숙렬 옮김 / 북하우스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성교육 지침서 『기저귀부터 데이트까지(From Diapers to Dating)』를 쓴 데브라 해프너가 이같은 성교육 지침서를 쓰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오래 전 일인데 생후 18개월 된 딸을 데리고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Geogia O'Keeffe)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갤러리를 둘러보던 중의 일이었다.

오키프의 작품을 보고 있던 그녀의 딸이 갑자기 오키프 대표작 중 하나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딸의 목소리는 갤러리 안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녀의 딸은 “엄마, 저것 봐. 벌바(vulva)야!” 라고 외쳤다. “Vulva”가 뭔지 모르는 분들은 영어 사전을 구입하고서도 별로 궁금한 것이 없었던 분들일 게다. 통계 조사된 바는, 물론 없겠지만 통계를 내보면 섹스(SEX)를 제외하고 영어사전 검색 순위 10위 안에 틀림없이 들어갈 만한 단어가 바로 이 말이다. 아직도 이 말의 뜻을 모르는 분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찾아보시기 바란다.

미국의 유명 화가이자 여성인 조지아 오키프의 ‘꽃잎’ 그림들은 본의든 아니든 종종 앞서의 에피소드와 같이 여성의 성기를 묘사한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오키프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그와 같은 성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비춰지는 것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데브라 헤프너의 딸의 눈에 비친 것처럼 그녀가 그린 작품들은 간혹 여성의 성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vulva”는 해부학적으로는 여성의 외음부(外陰部)를 의미한다. 이브 엔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The Vagina Monologues)』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vagina”는 질(膣), 즉 음문(陰門)을 의미하지만, 이 책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Vagina”는 여성의 복잡한 성기구조 가운데 일부를 차지하는 질이나 음부 자체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어린 소녀가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보지”란 말을 했을 때(“vagina”나 “vulva”는 실감이 안 나므로), 그 어머니가 한 여성으로 느꼈을 당혹감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남자 아이들의 돌 사진 중에는 성기를 드러낸 사진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데 반해 여자 아이들의 돌 사진에서 그런 사진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물론 최근에는 남자 아이들의 경우에도 가려주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대세인 듯하다. 이 책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적인 폭력을 경험했던 저자 이브 엔슬러가 연령과 국적을 불문하고, 뉴욕으로부터 보스니아의 난민촌에 이르기 까지 각계각층의 여성 200여명을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만약 이브 엔슬러가 사회학자였다거나 인류학자였다면 책의 내용이나 형식도 달라졌겠지만, 이브 엔슬러는 극작가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몇 년 전부터 국내의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연극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 연극의 원대본인 셈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서문을 통해 나는 영어로 여성의 성기를 표현하는 단어가 우리말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하나의 사물 혹은 부위에 대해 표현하는 단어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네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친밀한 대상이란 뜻이지만, ‘보지’도 과연 그런가? 스타이넘은 “그런데도 나는 여성의 성기에 대해 정확한 표현을 들어보지 못했고, 긍지를 느낄 수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브 엔슬러가 이른바  “보지의 독백”이라고 옮길 만한 파격적인 제목의 책을 쓴 까닭이 거기에 있다. 성별(性別)을 불문하고 어떤 한 인간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열등감이 어떤 한 개인이 지극히 개인적인 까닭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한 성(性)으로 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지니도록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사회의 문제이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의 뜻도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브 엔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가장 정치적인 텍스트이다.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됩니다. 비밀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두려움과 잘못된 신화가 되기 쉽습니다. 나는 언젠가 그것이 부끄럽지도 않고 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기를 바라기 때문에 입 밖에 내어 말하기로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자신과 분리해서 사고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나의 손”이라고 느끼는 것, 내 “몸과 마음이 분열”되어 있으며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 분열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강제되고, 은폐될 때, ‘여성’으로 분류되는 인간뿐만 아니라 그것을 강제하는 ‘남성’사회도 더 크게 느끼지 못할 뿐 왜곡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끝으로 남성의 성기도 공공연히 이야기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상황인데 어째서 여성들의 성기만이 연극으로 올려지고 이야기되어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또 그와 반대로 여성의 성기를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 그것이 허락될 만큼 충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닌 - 주변의 여성에게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경우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전자의 경우,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상황 자체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면 함께 싸우면 될 일이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보지’(말하면서도 영 쑥스러운 나 자신을 느끼지만)를 죄의식 없이 느끼도록 하는 정신적/육체적 해방과 동시에 정치적/문화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엔 좀더 복잡해서 스스로 남성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척하면서 구태여 원치 않는 상대에게 과도한 언어노출을 시도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사회적인 차원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중층적인 심층구조(deep structure)란 것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이제는 우리의 성기를 인정하고, 기억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들 자신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란 것은 확실하다.  독백을 극복하는 건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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