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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INDIGNATION > 강준만의 현대사-그리고 박정희를 위한 변명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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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책을 어느 류로 묶어야 적당할 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요즘 인문사회 계통에는 그 만큼 흥행에 성공하는 작가가 없는 듯하다. 또한 그는 상업주의를 자신이 굳이 지양할 뜻이 없음을 공언하고 있으며 <인물과 사상>단행본 시리즈이래 과도한 다작에서 오는 작품하나의 퀄러티에 대한 독자들의 의구심을 쉽게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많은 강빠(?)들을 거느린 독서시장의 거물로 성장해 있다. 이는 오히려 우리나라 인문사회 쪽으로 정말 실력있고 성실한 작자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런 류의 가벼운 농담을 곁들인 현대사류들이 권위있는 교양서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아닐까? 그 나마 다행인것은 강준만의 자료실에는 학자들의 논문은 물론 일반 대중매체, 역사적 사료가 될 만한 갖가지 자료들이 무려 1만여 개의 테마별 파일 속에 정리되어 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비전공자인 강교수도 한국현대사를 논할 자격은 있지 않은가 싶다.

한국현대사에 관하여 대학시절 기억나는 책은 강만길의 <고쳐쓴 한국현대사>,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정도다. 지금와 생각하면 강만길의 책은 너무 학술적이라 따분하고 박세길은 친북적이고 다분히 선동적 관념사관으로 문장이 거칠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강준만의 책은 흥미 본위의 사건을 많이 첨가했으며 저자 자신의 주관적인 역사의식이 과도하다고나 할까. 그는 마치 역사상의 실존인물들이 자신의 취향과 기호에 맞추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면에서 그의 독특한 양비론이 이 책 전편을 휘감고 있다. 박정희의 기회주의도 문제지만 장면의 무능도 그에게는 도저히 봐줄 수 없는 문제다. 춘추전국의 대사상가인 한비자는 요를 칭송하는 동시에 순이 풍속을 바로잡았다는 유가의 주장을 모순이라 하였다. 그런데 강준만은 쿠데타세력과 장면을 번갈아 칭찬하기도하고 비난하기도 하는점이 의아하다. 저자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면 과연 저자가 516을 긍정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대한 것이다.

어쨌든 나름대로 강준만은 균형적인 입장에 서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나름대로 박정희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면들을 실었고 장면을 위한 상당한 분량의 변명거리와 또한 그의 한계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저자의 서문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박정희를 말하여 마치 한국적 기회주의자의 대표인 듯이 묘사했는데 나는 그것이 저열한 포퓰리즘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박빠라도 된 듯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나도 박정희를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의심할 바 없이 박정희는 합법적 민주정부를 폭력으로 뒤엎고 민중위에 군림한 폭군이고 독재자이며 옛날같으면 삼족을 멸할 역적이다. 하지만, 박정희를 좀더 깊숙히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그런 이면에 나라의 대통령으로서는 할일을 했다는 점을 쉽게 무시할 수가 없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박정희에게 침을 뱉기가 망설여 진다. 요를 말하면 윤보선이 516을 올것이 온 일종의 당위라 인정하여 당시의 상황을 말했듯 그 이후의 상황도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할일을 한 것 뿐었다. 나는 박정희정도의 인간을 가지고 기회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에 찬성할 수가 없다. 물론 포퓰리즘적으로 표피적인 면만 들여다 보면 천왕에게 혈서까지 쓰고 황군 장교로 자원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민족지상과 민족적 민주주의를 외쳤으니 대단한 위선이고 기회주의라고 봐줄 수도 있다. 인간이기에 물론 실수도 있었고 대통령 한 번 더 하려고 지역감정까지 부추긴 야비함도 있었지만, 박정희시대를 잘 들여다보면 의심할 바 없이 그가 대통령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최선을 다한 사람과 기회주의자가 동일시 될 수가 있는지 한국적 포퓰리즘을 오히려 단죄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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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rsyas > [명장면] 花樣年華
화양연화 (1disc) - [초특가판]
왕가위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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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왕가위, 2000)에서 장만옥이 입고 나왔던 치파오(旗袍)의 장면만 모아 보았다. 과연 몇벌이 등장하는지 셀려고 맘 먹었지만, 너무 많아서 영화 절반에서 그만뒀다.

 반복되는 슬픈 공간들과 주인공들의 뒷모습.
그리고 그림들을 따라 흘러나오는 Nat King Cole의 야련한 목소리.

 단순한 스토리에 배우도 달랑 2명밖에 나오지 않지만 '보여주기식'의 왕가위 특유의 영상언어는 정점에 도달해 있다. (유덕화와 장만옥이 걸어 가던 <아비정전>의 뒷골목, 임청하와 금성무가 엇갈리는 <중경삼림>의 시장 길목, 유덕화와 장국영이 살던 <아비정전>의 아파트. 홍콩에는 영화 찍을 곳이 한정되어 있는지. 아니면 왕가위 감독이 특별하게 좋아하는 공간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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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요한복음강해'를 읽기 위하여

엊그제인가 운만 떼놓은 일을 해치우기로 한다. 도올 김용옥의 <요한복음강해>(통나무, 2007) '참고문헌목록'을 읽고 느낀 점 몇 가지를 적어놓는 일 말이다. 저자가 <요한복음강해>와 (아직 미출간된) <기독교 성서의 이해>, 두 권을 쓰기 위해 구체적으로 참고한 책들이자 그의 '서재에 꽂혀 있는 개인소장본"들의 목록이라고 하는데, 저자가 목차에서 '자세히 열람하시오'라고 당부해놓을 만큼 은근히 자부심을 갖고 적어놓은 것이면서 몇몇 책들에 대해서는 요긴한 사항들을 밝혀놓은 문헌 해제이기도 하다.

사실 나도 개인적으로 굉장히 많은 책들의 서지사항을 훑고 그 중 많은 책들을 구입하며(적어도 소득수준에 비하면 그렇다) 더러 읽어보지만 저자의 편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물론 나도 20년후쯤이면 2만권 이상의 장서를 갖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게 일차적인 느낌인데, 한편으론 전공과 관심이 전혀 다른지라(나는 한번도 '신학'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모처럼 좋은 '책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으론 구경 차원이 아닌 보다 실제적인 관심을 촉발시킨 책들도 없지 않았는데, 그런 범주에 속하는 몇 권의 책에 대해서 적어보도록 한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여러 권이어서 이 '책 이야기'는 '세계의 책' 범주에 집어넣는다.

저자가 첫번째 분류 항목인 '사전류'의 책 50권을 나열하면서 제일 처음에 적어놓은 책이자 "이 지구상에서 "현존하고 있는 최고의 성서사전"이라고 격찬하고 있는 책이 옥스포드 컴패니언 시리즈로 나온 <성서사전>(1993)이다. 이 컴패니언 시리즈의 책들은 나도 러시아문학 관련을 중심으로 여러 권 갖고 있지만 이 사전은 '그냥 그 정도'를 훌쩍 넘어서는 모양이다. 932쪽의 분량도 만만찮지만 도올에 따르면 "간략하면서 많은 정보가 압축되어 있고 또 매우 이론적으로 깊이가 있다. 정통신학적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다양한 최근의 학문성과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왜 이런 사전이 우리나라에서 번역 안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국 옥스포드대학 학문의 수준을 잘 나타내주는 명저 중의 명저이다."

이만한 사전이라면 이해가 안 가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국내의 출판 현황을 고려하면 이해 못한 바는 아니지만 한국의 기독교 교세와 신심을 생각하면 미스테리한 일이다(우리 교계와 신학 수준을 잘 나타내주는 지표가 아니기만을 바란다). 어쨌든 그런 격찬을 접하고 보니 한권 정도는 사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해서 최저가 중고서적을 주문까지 했으나 배송지 제한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허세를 부릴 게 아니라 학교 도서관이나 이용하라는 뜻으로 새겼다).

다음 두번째 책도 역시 사전인데, 저자의 첨언이 아니더라도 사실 "학문을 하는데 좋은 사전을 활용하는 습관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이들을 구비해놓는 데 적잖은 비용과 상당한 공간이 요구된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따름. 엘리아데의 <종교학백과사전>(1987)도 같은 경우이다. 무려 16권이 한 질이다. 역시 도올에 따르면 "신학도라면 꼭 봐야할 명저 중의 명저"로서 "이 백과사전은 세계종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기독교관련 항목도 그 정보의 깊이로 말하면 사전 중의 왕중왕이다." 일당백이란 얘기겠다(물론 이 책은 나의 '실제적인 관심'과 무관하다. 편자의 이름이 친숙한지라 그냥 꼽아보았다).

세번째 책은 보다 직접적으로 '요한복음'과 관련한 '발군의 주석'이다. D. A. 카슨이 쓴 <요한복음주해>(1991)가 그것인데, 715쪽 분량이다. 도올의 설명은 이렇다: "영어원서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책을 사서 한줄한줄 나의, 번역과 대조하여 읽어보면 매우 명료하게 요한복음 전체상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지적모험의 한 분수령을 창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책들은 아마존 등의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쉽게 구입 가능하다." 확인해보니 책값은 25불 가량이다. 하지만 나는 엊그제인가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바로 옆에 두고 있다.

그리고 네번째 책은 '예수에 관하여'란 카테고리 속에 들어 있는 책인데, 저명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예수와 말씀>(1958)이다. 도올 자신이 "인생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책"으로 꼽고 있기도 하다. 물론 원저는 독어본(1926)이며 도올이 목록에 올려놓은 것은 그 영역본이다(책의 내용에 대한 소개는 http://www.religion-online.org/showchapter.asp?title=426&C=276 참조). 도올의 평가: "우리나라에서는 불트만신학이 마치 한물 건너간 시대조류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착각이다. 우선 우리나라 신학계는 불트만을 이해하지도 앟았고 수용하지도 않았고 토론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불트만신학은 21세기 최고봉이며, 불트만을 안 거치고 21세기 신학을 운운할 수 없다."

 

 

 

 

검색해보면 불트만 관련서는 10여 권 이상 찾아볼 수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평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게 도올의 판단인 듯싶다.

끝으로 예수와 관련한 책을 한권 더 꼽자면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여태까지의 모든 성과를 종합한 사계의 최고봉"이라고 도올이 격찬하고 있는 존 도미닉 크로산의 <예수: 혁명적 전기>(1995). 224쪽에 불과하니까 모처럼(!) 단숨에 읽어볼 수 있을 만한 책이다. 도올의 서지에는 빠져 있지만, 보다 두꺼운 책인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1993)은 <역사적 예술>(한국기독교연구서, 2000)으로 번역돼 있다.

07. 02. 18.

 

 

 

 

P.S.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희랍미술사의 지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서 저자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라 꼽고 있는 것은 존 보드먼의 <그리스 미술>(시공사, 2003)이다. 나이즐 스피비의 <그리스미술>(한길아트, 1998)이나 뒤센의 <트로이>(시공사, 2004)도 목록에 올라와 있다.  

 

 

 

 

 

창해ABC북으로 나온 <알렉산드리아>와 <레바논>도 "성서이해를 위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좋은 서적이다"라는 게 저자의 평이다.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은 책 몇 권 정도는 직접 참고해볼 수 있겠다. <요한복음강해>를 읽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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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훌라 > 빼어난 기획, 평범한 진술
온달, 바보가 된 고구려 귀족
임기환 기획, 이기담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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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

-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역사는 진실이고, 소설은 거짓이다”라는 말은 착각이다. 그것도 아주 위험하고도 분명한.


  역사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 자체가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아주 위험한 방향으로, ‘진실’의 가면을 쓴 거짓으로 왜곡되기 십상이다. 독일 히틀러 정권의 게르만 신화 조작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거창한 일이 아니더라도 역사가 잘못 알려질 경우, 현실에 잘못된 영향을 미치는 예는 너무도 많다. 일본 사람들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진실이라고 교육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자신들의 옛 영토를 되찾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1984』의 빅브라더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를 자신이 발명한 것이라고 국민들을 속였다. 그래서 그들은 빅브라더를 위대한 구원자라고 착각한다. 이런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서, 그들은  잘못된 현실을 만들거나, 현실의 잘못을 유지시키는데 (자신들도 모른 채) 협조하게 된다.

  잘못 알려진 경우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알려지지 않는, 더구나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감추어진 역사도 역시 문제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간혹 우리의 광복이 오로지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의 승리에 의해서만 얻어진 타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감추어진 역사 역시 현실을 잘못된 방향으로, 혹은 현실의 질서를 유지시키려는 세력에 협력하게 된다.


  역사를 바로 아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는 결코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현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역사를 발굴하고, 가르치고 거기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의 역사 발굴 및 해석 수준은 아직 부족하기만 하고, 역사 교육 방법에 대한 논의도 충분하지 못하고, 더욱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현재화 작업은 수준을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은 <온달 이야기> 역시 다르지 않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온달을 옛 이야기 속의 주인공, 그것도 ‘바보’로 한정시켜 받아들였고, 교육해 왔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전부였을까? 바보에게 시집을 갔던 평강공주는 정말 현실감각이 부족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나? 결혼한 후 짧은 시간 동안 명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온달이 과연 바보에 지나지 않았을까? 온달은 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전투에 자진해서 나갔던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기존의 연구(역사학과 국문학 모두)에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책이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은 탁월하고, 이런 문제에 천착한 이 책의 기획의도 역시 탁월하다.


  「나는 먼저 온달 이야기를 분석한 모든 연구논저를 연구자의 시각과 분야에 따라 재분류했다. 그러자 역사학자들과 국문학자들의 연구 경향이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역사학자들은 온달이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데 초점을 둔 반면, 국문학자들은 온달이 설화 속 인물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삼아 접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다보니 어느 한족의 연구 성과에만 의존하다 보면 균형 잡힌 결과를 도출해내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p.74.


  그러나 이 책 역시 온달 이야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 더구나 이처럼 탁월한 문제의식을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했던 것도 역시 문제이다. 타당하고 또 타당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이렇게 반복해서 듣게 된다면 누군들 지겹지 않겠는가?


  사실, 이처럼 오래된 이야기의 진실은 연구를 통해서 확인될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과학적 논리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소설을 비롯한 예술작품이 가진 상상력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비판받을 여지가 많고, 또한 역사적인 오래를 일으킬 여지도 많이 있지만 (그래서 이 책에서도 설화나 허구에 대한 부분은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는데 있어서 예술이 가진 영향력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야, 연구인력 및 연구결과에 대한 수용 인력도 늘어날 것이고, 그래야 보다 정밀한 연구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옛 이야기에 대한 예술적인 상상력을 통한 접근이야 말로, 역사적 사실을 밝히기 위한 첫 번째 단계라고 하겠다.


  일본과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 일본만 하더라도 자신들의 역사와 설화에 대한 현대화 작업이 활발하게, 소름끼칠 정도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현대화 된 설화, 만화 <배가본드>를 통해서 재해석되는 미야모토 무사시와 같은 역사적 인물, 그리고 각종 게임에 도입되는 일본의 전래적 이야기 및 디자인적 요소들. 이런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도 대단하지만, 이것이 대부분 자신들의 역사를 보다 멋지게 왜곡하고 있다는 점은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이런 작업이 거의, 정말로 거의, 없다. 흔히 소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소재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소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인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소재는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온달이 아닐까?

  물론 우리에게 이러한 시도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시나리오(스토리텔링)에 있다. 이에 가장 적합한 말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다.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그것을 잘 꿰어야 보배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꿰는’ 작업을 하는 것이, 이야기 즉 서사예술의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한계를 가진다. 이 책은 역사학과 국문학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온달’의 역사성에 집착한 나머지, ‘온달과 평강공주’가 가지는 이야기성(敍事)을 간과하고 말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온달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가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는 인물이기 ㏏?甄?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은 거짓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 한다는 것, 더 나아가 시대를 뛰어넘은 예술적 초월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와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 ‘온달이야기’의 예술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 2 ]


"아아, 온달이여, 살아서는 어리석지 않았고 죽어서는 신이런가.(嗚呼溫達 生亦不遇死猶神)"

- 이학규의 시 「우온달(愚溫達)」 중에서


   물론 이 책에서도 온달에 대한 설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나열과 소개에 그쳤을 뿐, 이를 재창조하는 작업, 혹은 재창조 작업에 대한 분석에 이르지 못했다. 이 부분을 강조했다면, 보다 드라마틱한 전개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문학작품에서 온달이야기를 재해석 한 것으로는, 최인훈의 희곡「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김지원의 소설 「편강공주와 바보 언달」등이 있다. 이에 대한 분석, 혹은 작가와의 인터뷰가 포함되었다면 더욱 다채로운 해석 가능성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희곡의 경우에는 그것을 공연했던 배우들이나 관람객들과의 인터뷰도 가능했을 것이다.)


  앞으로 이와 같은 기획의도를 가진 저술이 보다 많이 발표되어야 한다. 그러나 책도 역시 하나의 문화상품이라면, 보다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흔히 문화산업의 가치를 강조하는 예로 영화 <타이타닉>이 거둔 수익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예는 <타이타닉>이 얼마를 벌었는지에만 집중하고 있지, 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이 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좋은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뿐만 아니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책도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좋은,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 ]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겉모습은 꾀죄죄하여 우스웠으나 속마음은 맑았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늘 먹을 것을 빌어 어미를 봉양하였다. 찢어진 옷과 헤진 신발로 시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 하였다.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曉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삼국사기』권45 열전5 온달편


  사족이다. 온달이야기의 원문을 처음 공부했을 때부터, 나는 이 점이 참으로 궁금했다(그런데 왜 선생님들께 질문하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후회될 뿐이다).


  원문에는 ‘愚溫達’이라고 되어 있다. 어리석을 (우)에 온달이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를 ‘바보 온달’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해석되는 것일까?

  어르신들의 호를 살펴보면 종종 ‘愚’자를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愚巖’과 같은. 그런데 이 경우에 ‘愚’는 ‘바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리석다’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의 어리석음이란, “세상 풍파에 어울리지 않는” 혹은 “부귀권세를 탐내지 않는”이라는 의미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愚溫達’ 역시 ‘바보 온달’이 아니라, ‘어리석은 온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세상 풍파에 어울리지 않고 청렴하게 살아가는 숨은 인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공주가 그에게 끌린 이유도, 온달이 어여쁜 공주를 거절하는 이유도, 공주와 결혼하면서 짧은 기간에 갑작스럽게 성장하여 용맹을 떨치는 원인도 해결될 수 있다.


  물론, 이런 해석은 한 문장만 가지고 짐작할 수는 없다. 아마도 이를 해석한 연구자들은『삼국사기』전체 혹은 당대의 한문학 전체를 가지고 이 문장을 해석했으리라. 그러나 나의 상상력은 이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계속하게 된다.


  내 해석과는 약간 다른 측면이지만, 愚溫達’이란 구절을 다르게 해석한 분도 있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님의 블로그를 방문해보시기 바란다. 관련 게시물의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blog.naver.com/art2173/12001189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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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8년 만의 로마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 7 - 악명높은 황제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7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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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오래 전부터 책을 읽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바로 리뷰를 쓰는 것을 최소한의 원칙으로 삼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렇지 못한 책은 있게 마련이다. 그나마 다행인지 그런 책은 아직 10권이 채 되지 않는데, 이 책이 그 중 하나이다. 내가 쓴 로마인 이야기 리뷰가 그 먼 옛날인 1997년에서 멈춰 있는 이유는 책을 안 읽은 것이 아니라, 리뷰를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 역시 처음 발간되었던 1998년에 재빨리 사들였다. 중학생 시절에 이 책을 발간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살던 곳보다 신간이 더 빨리 도착하는 전주까지 가서 책을 사온 기억이 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다 읽었었다. 하지만 왜 리뷰를 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그 후 2001년에도 다시 한번 읽고 리뷰를 쓰려고 했지만, 역시 쓰지 못했다. 여러모로 퍽이나 어수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데, 그 이후로는 한동안 아예 책도 안 읽고 리뷰도 안 썼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완독을 하고도 아무 기록도 못 남긴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 결국 나 자신의 강박관념과 이 책을 다시 한번 읽고 리뷰를 쓰지 않고서는 로마인 이야기의 다음 권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이 책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리뷰를 쓸 때보다도 책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 책의 내용이 기억에 더 많이 남았던 것도 당연하다.

 그렇게 머리 속에서 오간 생각들은 이번에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역시 로마인 이야기라는 시리즈 자체에 대한 세간의 인식에 대한 것이었다. 역시 이 책이 기본적으로 로마 제국으로 대표되는 힘에 의한 제국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조명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무엇 때문에 시오노 나나미가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좀더 살펴볼 만한 점이 있다. 물론 그녀가 일본인이며, 한때 미-일 안보동맹에 반대하는 좌파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 이들일수록,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관(觀)에 대해서 그 원인을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어진 외적 정보만을 가지고 단칼에 판단을 내리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인이니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한때 학생운동을 했었다고 하니 우리 주위에도 그리 드물지 않은 '왕년의' 민주화 투사(내지는 변절자)의 뻔한 궤적이라고 단정해버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했다면, 내가 할 말은 결국 정해져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저술에 일본 제국주의가 로마와 같았다면,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희망 내지는 앞으로 일본이 동아시아 세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조언의 성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녀가 희망한 또는 조언하는 그 제국주의와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일본 제국주의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가볍게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 의문이 남는다. 단순히, 일본인이 제국주의를 이야기한다는 것만으로, 그녀가 과거에 행해졌던 일본에 의한 제국주의를 옹호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나태한 판단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18∼19세기 무렵의 영국의 제국주의도, 프랑스의 제국주의도, 일본의 제국주의도 아닌, 고대의 로마가 행한 제국주의인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일본의 제국주의를 옹호하고자 했다면, 직접 근대 일본사를 저술해서 그 시대를 변호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분명한 저술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로마인 이야기를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교묘한 프로파간다 정도로 생각 혹은 주장하는 것은 명색이 역사 연구자로서 30년 넘는 세월을 투자한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좋아하는 경제적 관점에서 생각할 때 30년을 투자해서 로마사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것보다는, 10년만 투자해서 직접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이지 않은가? 결국은 작은 단서만 보고 단정하거나, 타인의 단정만 믿고 단정하기 전에 내가 직접 읽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마음을 열고. 

 이어서, 흔히 원조 우파보다 더 과격하고 비합리적인 성향을 띠고는 하는 좌파에서 우파로의 전환자에 대한 일반적인 판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인물들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사고의 전환을 이유로 과거에 그들이 좌파로서 보여주었던 말과 행동에 대한 진정성을 일방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는 너무도 상이한 현재의 그들을 보며, 그들의 과거가 우파로서의 삶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이미지 관리였다는 생각을 지우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시오노 나나미는 어떤 쪽일까. 내가 그녀의 전기 작가도 아닌 이상, 그녀가 얼마나 좌파로서의(?) 학생 운동에 충실했는지를 상세히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녀의 대담에서, 그 자신이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 일본 내각의 대신 중 한 사람이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후에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된다.)와도 면담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미래의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도, 게리 쿠퍼가 죽었다는 이유로 학교를 쉴 정도로 자유분방했던 젊은 시절의 그녀가 미래의 커리어를 염두에 두고 학생운동을 할 정도로 주도면밀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녀가 스스로 밝혔듯이, 학생운동을 그만두게 한 계기로서의 '마키아벨리'다.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마키아벨리는 자유가 없는 질서와 질서가 없는 자유 중에서 전자를 택하겠다고 말한 인물이다. 또한 이 말은 시오노가 그녀의 책에서도 직접 인용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은 그 전성기, 다시 말해서 고유한 그들의 시스템이 잘 작동되던 시기에 제국 전역에 질서와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었다. 로마 제국의 테두리 안에서 약육강식의 살육전은 없었고, 원활한 자원의 유통 속에서 먹고 살기도 어렵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처벌하지도 않았다. 물론 황제와 원로원 사이에서는 국가반역죄를 명분으로 한 일방적인 축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일반 민중들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제 할 일만 한다면, 그들은 죽을 때까지도 황제의 근위병이나 군단병에게 끌려가서 목을 잘릴 일은 없다. 국가에 협조하고, 그 대신에 국가는 그들에게 안락한 생활을 보장한다. 국가에 대한 시민의 협조가 질서라면, 국가가 시민에게 해주는 것은 역시 빵과 서커스, 그리고 안전보장이라고 시오노 나나미는 말한다. 이 생각은 앞서서 말했던, 로마 제국주의에 대한 그녀의 관점과도 연관되는 데, 그녀는 국가와 시민의 상호합의와 상호간의 의무 준수로서 성립되는 제국주의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로마제국이 유지되던 시대가 지닌 난점으로 인해 적지 않은 차이점이 오늘날과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자유에 대한 통제로서 성립되는 질서를 바탕으로 국가는 효율적인 통치를 수행하고, 그 성과를 국민들에게 분배함으로써 그들의 자유에 대한 대가를 주는 것, 그것이 그녀가 바라본 로마의 제국주의다.

 그러나 과연 로마의 번영이 자유와 빵 혹은 서커스의 일대일 교환만으로 유지되었는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자유 대신 밥을 보장한다던 박정희 정권이 결국은 무너졌듯이, 로마 역시도 자유의 통제를 통한 효율성의 극대화와 반대급부의 제공이라는 시스템만으로는 일찌감치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록 인간 개개인의 인식과 삶에 있어서 식량과 안전보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현대보다는 클 수밖에 없었던 고대 사회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빵의 보장과 일신의 안전을 대가로 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인간의 자유를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로마 제국은 종교의 자유, 세제의 합리성, 재판의 공정성 등을 통해서 제국민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틀을 확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제국 발전의 또다른 동력으로 기능했던 것이 바로 로마의 개방성이었다. 로마의 개방성은 공화정 시절부터의 전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때의 개방정책은 최종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로마를 이탈리아 반도 안의 여러 도시국가 중 하나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이탈리아의 기득권층으로 구성된 원로원에 의한 공화정 하에서 지도층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이탈리아 반도 밖의 피지배층까지 확대시키려는 의지는 갖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기득권층-원로원-의 소극성은 제정으로 접어든 이후에도 종종 눈에 띄는 사실이다.

 결국 로마의 두 번째 성장 동력으로서의 개방성에 추진력을 더한 것은 사실상 제정의 문을 연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부터 갈리아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해외 속주 역시 보다 적극적으로 포용하게 된다. 이는 그 이전에 교사나 의사와 같이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보유한 외국인들을 받아들이던 것과도 궤를 달리한다. 그러한 형태의 개방정책이 단순히 기능을 가진 당사자를 겨냥한 1대(代)를 위한 정책이라면, 피정복자라고 할 수 있는 속주민을 대상으로 원로원의 문호를 열고, 시민권 획득의 기회를 여는 것은 이민족과의 영속적인 공존공영을 목표로 하는 적극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피정복자 스스로 질서와 생활의 유지를 보장하는, 차별 없는 운명 공동체로서의 로마의 존재 의의를 인정하고 그 구성원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로마는 그들을 강제로 자신들의 시민으로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단지 속주민도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그들 이민족들이 지니고 있는 민족의식과 실제 그들이 구성하는 민족국가의 차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며,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위험도 여기에 있다. 국가라는 공동체의 역할을 단순히 생활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만 접근한다면, 역시 우리가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한일합방 역시 그 요건만 충족된다면 정당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민족국가의 존재가 반드시 민족의식의 존재와 일치하는 것인지, 혹은 민족국가의 부재 하에서도 생활의 안정이 보장된다면 제국주의 체제 하에서의 민족의식의 유지도 가능하고 용인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시오노 나나미의 저서를 읽고 내린 결론은, 로마 제국은 물론이고, 각 시대에 사람들이 요구하는 생활의 안정과 사회체제의 공정성이 보장된 다민족 국가 체제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민족 간의 납득과 인정 가운데 성립하는 운명공동체적 체제 혹은 인식은 그것이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록 이것은 제국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제국주의와 동일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본다. 당연히 이러한 시오노 식 제국주의는, 그 체제가 단일 민족 중심의 국가 체제 보다 생활과 안전의 보장에 유리하며, 적어도 다 민족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인식과 동시에 개별 민족으로서의 의식이 보장되는 혹은 최소한 탄압 받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론 후자의 조건에 있어서 시오노의 저서 속에서 로마가 자신들이 포용하고 있는 수많은 민족들의 고유한 민족의식을 보장했다는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 물론 자신들과 유사하고, 자신들이 따랐던 그리스 민족에 있어서는 특별한 배려를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특별히 보편적인 민족의식 유지책을 제시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민족의식을 억압하거나 억제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생활과 질서의 안정이 보장되는 다 민족 공동체 자체가 고유한 민족 의식을 유지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네로의 정치를 견디다 못한 갈리아 족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 갈리아 인의 독립이 아니라, 로마를 위한 황제의 교체를 요구했던 데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로마의 개방노선은 시민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법의 하나이자, 자유의 통제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국가 운영이 요구하는 효율성의 새로운 동력을 찾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의식을 의도적으로 억압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그럴 수도 없었다.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생활의 안정과 안전의 보장을 오늘날보다 더 중시했던 당시로서는 일종의 자발적 망각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로마 제국 체제가 가진 의도적 오류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30만의 신을 받아들일 정도로 타문화와의 접촉과 융합에 관대했던 로마 제국에서 제국 체제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 이상, 각 민족의 고유성을 부인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그들이 요구하는 제국 운영의 효율성에도 배치될뿐더러, 로마 제국의 원주민(?)의 문화에도 배치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제국의 관점에서 볼 때도 각 민족의 그들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은, 하나이자 여럿인 다 민족 제국, 로마 제국 자체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민족인 그들 모두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고 국가는 그들에게 책임을 진다는 구성원과 국가 모두의 자부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고 싶었던 또 하나의 문제는, 단지 어느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국가 통치의 효율성 자체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시오노 나나미가 제국주의 옹호론일 수도 있는, 민족 의식과 민족 국가가 분리 가능할 수도 있다는 낙관론을 제시하면서까지, 국가에 의한 시민들의 생활과 안정 보장의 측면을 강조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의 어느 민족이라는 정체성 혹은 이 국가가 어느 민족의 국가라는 자각이 국가가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의무에 우선하는가, 혹은 그 두 가지는 반드시 일치할 수밖에 없는 지, 더 나아가서 현재의 국가체제만이 우리의 요구사항을 지키고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인지에 대해 우리는 너무도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 아닐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로마 시대에 비해 국가를 상대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오늘날이라고 해서 반드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만이 그것을 받아줄 수 있으며, 혹은 단일 민족으로서의 의식이 반드시 필요한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시민들의 요구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민족 의식보다 우선하는가. 설령 정작 그 당사자인 시민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고 해도 그 요구를 보장하는 지도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그래야만 하는가. 진정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 요구를 받아줄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간단히 말하면 이런 식의 자발적 통합은 국가의 당대가 아니라, 영속을 위한 개방정책이었다. 큰 호수에 끊임없이 맑은 물을 공급하듯이, 로마 제국에 검증된 인적자원을 지속적으로 제공한 동시에, 이미 말했듯이 제국의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한 두 번째 동력이기도 했다. 이미 얘기했듯이 로마 제국 발전의 첫 번째 동력은 생활의 안정을 위한 시민 자유의 합리적인 제어였다. 그 결과 시민들의 자유가 적절히 보장되고(적절히 통제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활과 질서의 안정이 보장되는 제국 체제가 원활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첫 번째 동력만으로는 그 한계가 명백했기 때문에, 제국의 개방노선은 반드시 필요했고, 또한 원활한 제국 체제가 속주민들이 제국에 편입되도록 자발적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속주와 제국 체제가 결속되는 효과를 가져오고, 또한 이러한 결속이 제국 체제의 원활한 유지에 기여하는 선순환 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다시 말해, 로마 제국의 개방노선은 기존 시민들의 자유의 범위를 보장하기 위해,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함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독립된 체제대신 새로이 로마 제국으로 들어오는 이들에게도 그 자유를 보장했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도 일방적으로 이익 보거나 손해보지 않는 균형 위에 수립되어 있었다.

 단순히 이탈리아 반도에 '의한' 다민족 지배 체제를 넘어서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실질적으로 경제 중심지인 3대 도시 중 2개 도시는 동방에 있었다) 통합 구조를 구축한 개방체제가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는 로마 제국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제국주의는 일방적인 지배를 통한 착취 체제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얻는 것이 있는 만큼 지배자 역시 그의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에너지 소모는 피지배자의 반발이 심해질수록 이익과 손해의 균형이 붕괴됨으로써 제국주의 체제 자체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든다. 반면에 수많은 민족들을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구성원으로 편입시키는 정책은 이탈리아로 대표되는 로마 제국과 그들의 공존공영을 의미한다. 서로 간에 한 체제의 구성원으로써 필요한 것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번영이 공동체의 번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과도 연관될 수 있기에 표현이 망설여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수사에 불과했으며, 한번도 그 의미에 걸 맞는 실행을 보이지 못했다는 점에서 무시하기로 했다. 어떤 체제도 일방적으로 나쁘기는 어렵다. 결정적으로 잃는 것이 있는 만큼, 결정적으로 얻는 것이 있다. 다민족 제국으로서 이민족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문화를 인정하는 제국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가. 여러 가지 다른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로마인들은 단순한 시혜(施惠)나, 문화적 특성의 차원을 넘어서서 그들 자신을 위해서 그러한 개방노선이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그들이 원하는 국가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정책이 시행되었다. 시오노가 주목한 제국의 이 측면은 단순한 사기가 아니다. 세상에 이익만큼 인간을 과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면, 애초에 좌파를 가장했던 우파도 아니고, 그렇다고 좌파의 과거를 부끄러워한 나머지 의도적으로 오버하는 우파 노친네도 아닌 그녀는 시민 일반이 지닌 자유의 제어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반대급부를 제공했으며, 또한 그렇지 못한 지도자-칼리굴라와 네로-를 제거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던 제국 체제의 실체를 조명하고 있다. 결국 그녀는 일반적인 시민들이 원하는 것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당위성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다. 그런 까닭에 자유의 제어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시민들이 절실하게 원하고 또한 그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보장해준 제국 체제를 그녀 나름의 시선으로 재평가한 것이다. 물론 현대 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자유를 제어하는 것을 공식적인 통치의 일환으로 표명하는 것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흔히 이야기하듯이, 그 시대의 특성에 주목해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오늘날도 분명 여러 형태로 우리의 자유는 제어되고 있지 않은가 하고, 그리고 우리도 그 대가로 국가로부터 얻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단순히 고대 사회에 자유를 제어했다고 해서 무조건 오늘날보다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로마제국의 시대적 특성에 주목해야 할 지점은 오늘날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자유의 제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구체적 방법이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엄존하는 자유의 제어 그 자체는 시대상의 차원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정치의 현실이다. 그 자체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구체적 실천은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대상의 고려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은 선심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태도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정치의 운용이 예나 지금이나 적절한 대가를 국민들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했듯이, 바로 사람들이 원하고, 그들 삶에 중요한 부분 속에는 자유 역시도 포함된다. 자유와 빵을 교환하는 체제가 지닌 맹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로마 제국의 개방성을 더욱 주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녀가 무조건 보수적 혹은 우파적 관점에서 자유와 맞바꾸어진 질서만을 옹호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미 장황하게 말했듯이 그녀는 시민들에게 적절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개방성을 조명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방성은 질서와 자유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로마가 찾은 저울추였던 셈이다. 이런 그녀를 단순히 보수 우파 역사가 혹은 변절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어디까지나 그녀 자신의 주체적인 선택과 판단에 의해 질서를 중시하는 시각 혹은 역사관을 갖게 되었다. 어느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펜을 휘두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유를 제어하는 정치의 장점과 동시에 그 통제의 남용을 막기 위한 정책을 동시에 조명했을 뿐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는 역시 독자의 주체적인 비판의식에 달려있다. 물론 결정적인 단점은 존재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유와 교환된 질서가 지닌 단점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자유가 희생되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와는 달리 질서 자체가 지니고 있는 내재적인 단점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바꿔 말하면 질서를 양보하면서 자유의 입지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를 자유의 장점에서는 찾을 수 있지만, 질서가 지닌 단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시 이는 궁극적으로 그녀가 식량과 안전보장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집착했기 때문에 빚어진 허점이다. 그녀 입장에서는 역시 이 중요한 두 가지를 위해서는 자유보다 질서가 우선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말을 하자면, 자신에 대한 비난과 혹평을 무릅쓰고 질서를 보장하는데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던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결과적으로 그에 걸맞는 시민과 원로원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질서가 지닌 내재적 모순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이는 어떤 뚜렷한 실책으로 인해 빚어진 것이 아니라, 질서의 수립과 유지가 단순히 그 자체만으로는 그 수혜자인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심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식량과 안전보장이라는 물리적인 문제에  집중한 그녀로서는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두 황제를 서술하면서, 정치에 있어서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무관심한 결과 빚어지는 불필요한 오해와 비난의 문제를 나름대로 지적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녀는 비록 자유와 대비되는 질서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말한 것은 아니지만, 질서의 추진과 유지에 있어서 빚어지는 문제를 간과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진정 국가의 질서를 위해서는 티베리우스나, 클라우디우스와 같은 방법으로 하는 것이 신속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것이 결국 질서 자체가 궁극적으로 지닌 문제의 지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작 질서의 수혜자가 되는 시민들이 질서의 추진에 거부감 혹은 싫증을 느끼고, 결과적으로는 비협조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확대해서 바라본다면 이는 결국 지도자가 구축한 질서 자체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 티베리우스 이후의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이후의 네로처럼 말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파괴가 질서 자체에 내재되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오노 나나미가, 카이사르가 청사진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했으며, 티베리우스가 반석 위에 올린 제정을 손질했다고 평가한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네로에 이르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단절되고 말았다. 과연 그는 무엇을 손질했던 것일까. 결국 무너지기 위해서 손질하는 것이라면, 자유와 맞바꾼 질서는 어디까지나 오늘은 보장해줄 수 있어도, 내일은 장담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더 필요할 수도 있고, 더 불필요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난 시오노와 비슷하게 질서에 눈이 간다는 것이다. 독재는 싫지만, 문화대혁명은 증오스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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