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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에 색을 입히는 전래동화 컬러링북
김지원 그림 / 이덴슬리벨 / 2025년 9월
평점 :
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저녁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순간 중 하나다. 내 무릎에 기대어 그림을 들여다보는 아이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잠시 잊히곤 한다. 하지만 문득, 이 소중한 시간이 나 혼자만의 독백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열심히 이야기를 건네지만, 아이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는 건 아닐까. 아이의 마음속에서 펼쳐지는 진짜 이야기의 색깔은 무엇일까, 궁금해지곤 했다.
그러다 『두뇌에 색을 입히는 전래동화 컬러링북』을 만났다. 책이라기보다는 정갈하게 차려진 놀이판에 가까운 이 책 앞에서, 나는 아이와 함께 색연필을 꺼내 들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읽어준 뒤, 우리는 호랑이가 나오는 무서운 장면 앞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으레 무서운 검은색을 떠올렸지만, 아이는 주저 없이 노란색 색연필을 들었다. "왜 노란색이야?" 묻는 내게 아이는 "호랑이 배고플까 봐. 떡 대신 바나나색이야." 라고 답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이는 이야기를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었구나. 무서운 호랑이에게 연민을 느끼고, 떡 대신 바나나를 쥐여주는 따뜻한 상상을 하고 있었구나.
색칠은 아이에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주었다. 눈으로 훑고 지나갔을 그림의 구석구석을, 아이는 색연필 끝으로 정성껏 어루만졌다. 콩쥐의 깨진 독에 물을 채워주는 두꺼비의 등을 초록색으로 칠하며 작은 생명의 고마움을 배우고, 놀부의 제비 다리를 고쳐주는 흥부의 손길을 분홍색으로 칠하며 따뜻한 마음을 표현했다. 아이는 더 이상 수동적인 관객이 아니었다. 이야기의 빛과 어둠, 인물의 감정과 분위기를 결정하는 능동적인 연출가이자, 작가와 함께 이야기를 완성하는 꼬마 창작자였다.
어쩌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정말로 해주어야 할 일은 완벽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 빈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자신만의 색으로 그 여백을 채워나갈 때, 이야기는 비로소 아이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는 진짜 생명을 얻는다. 오늘 밤, 나는 아이에게 또 물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만날 이야기의 세상은, 어떤 색깔이었으면 좋겠니?" 아이와 함께 색을 고르는 그 시간이야말로, 세상 가장 아름다운 독서의 순간임을 이제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