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반계수록 1 - 토지제도 반계수록 1
유형원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7세기 유형원의 저작 『반계수록』의 '새' 국역본이 출간되었다. 짐작건대 이 번역작업은 이미 마무리되었겠지만, 총 4권 분량 중 첫 번째 권에 해당하는 '토지제도'(田制)편만 먼저 나왔다. 역주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한국에서 흔히 '실학'의 비조(鼻祖)로 통칭되는 유형원의 주저 『반계수록』의 남·북한 국역본이 각각 출간된 지도 이미 반세기가 지나고 그것이 세간의 기억에서 사라진 마당에 그의 저술을 직접 지금의 한국어로 확인할 길이 열린 점이 반갑기 그지없다. 이제 역주자가 강조한 그의 개혁책과 '상고주의'가 어떻게 당대에 평가 되었는지, 또한 지금의 한국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을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학'의 면모가 과연 어떠한지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판단할 일이 남았다.


참조: 반계수록의 구성

개혁안

고설(攷說)

전제(田制) (上, 下)

- 전제후록(田制後錄) (上, 下)

전제고설(田制攷說) (上, 下)

- 전제후록고설(田制後錄攷說) (上, 下)

교선지제(敎選之制) (上, 下)

교선고설(敎選攷說) (上, 下)

임관지제(任官之制)

임관고설(任官攷說)

직관지제(職官之制) (上, 下)

직관고설(職官攷說) (上, 下)

녹제(祿制)

녹제고설(祿制攷說)

병제(兵制)

- 병제후록(兵制後錄)

병제고설(兵制攷說)

-병제후록고설(兵制後錄攷說)

속편(上, 下) (고설 포함)

보유(補遺) - 군현제(郡縣制)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선 2019년 한국에서 로베르 르파주(Robert Lepage)가 연출하고 출연한 연극 <887>을 직접 관람할 수 있었다는 점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고 싶다. 원래 희곡을 먼저 읽고 해당 연극을 관람하는 것을 원칙으로 여기지만 (연극은 무대 위에서 관객과 함께 동시적으로, 일회적으로 벌어지는 일인데, 이 행위의 참여주체인 관객이 무대 위에 서기 위해 연출가나 배우들이 수백 번도 더 읽었을 해당 희곡을 읽지 않고 관람한다는 것은 연극을 이해하길 포기하는 일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베르 르파주라는 연출가 겸 배우에 대한 과문함보다 호기심이 더 앞섰기에 예정에 없이 공연을 관람했다. 연극을 본 결과, 2019년 한해를 넘어 평생 기억에 남을만한 연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연극은 기억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연출가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연극은 시간과 기억의 예술이므로, 이 연극은 연출가 자신의 기억을 소재로 삼아 연극 속에서 기억의 문제를 성찰하는 메타 연극이라고 볼 수 있다. 연출가는 시를 암송하는 행사를 위해 어느 시를 외우는 데 겪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제목이 가리키는 주소지에 있던 어릴 적 자신이 살던 퀘벡(Quebec City)의 아파트를 기억술에서 사용하는 '기억의 궁전'으로 삼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는 어릴 적 가족과 집을 둘러싼 개인적인 기억을 통해 기억의 문제에 접근해나간다. 이를 바탕으로 당대 퀘벡과 캐나다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떠올리며, 그 기억 속에 잠재해 있던 언어적, 문화적, 계급적 갈등 양상 역시 풀어낸다. 배우는 기억술, 기억과 예술, 기억과 매체, 개인적 기억과 집단기억, 역사적 기억 간의 관계, 기억들 간의 투쟁, 기억과 망각 등 기억과 관련된 온갖 문제들을 무대 위로 소환하며,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연극이라는 예술이 얼마나 탁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기억의 이면에 놓인 망각은 등장인물이자 연출가 겸 배우의 할머니가 겪었던 치매가 암시하듯이, 일차적으로 신체적 노화와 질병과 관련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인간에게 신체의 연장체가 돼 버린 전자기기에게 기억하는 능력 혹은 기억할 권리를 빼앗기고 있는 상황과도 맞닿으며, 나아가 기억의 예술인 연극이 오늘날 처한 위기와도 연관된다. 고대 시인 호메로스가 무사 여신에게 의탁하여 서사시를 읊었다는 것이 신화가 돼 버린 오늘날의 이런 상황에서 시를 암송한다는 것, 더 나아가 무대 위에서 기억을 바탕으로 일회적인 공연을 한다는 것은 이제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일이 돼버린 걸까? 온갖 멀티미디어 장비를 동원한 이 마술 같은 연극에서 르파주가 전달하고자 하는 대체 불가능한 본질적인 연극적 경험은 그런 위기상황을 연극이 극복해나갈 수 있는 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이르러 예정된 '시의 밤' 행사에서 열변을 토하는 연설자처럼 거침없이 쏟아내는 미셸 라롱드(Michèle Lalonde)의 <Speak White>라는 시는 (아래의 영상에서 시인 자신이 낭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흑인 노예에게 영어로 '백인처럼 말하라'는 인종차별을 배경으로 한 원래의 말뜻을 되살려,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말하라'는 당대 퀘벡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영국계 지배계급에 맞서는 날카로운 문화적, 계급적 저항시이기도 하다. 이 시가 가진 이러한 역사적 맥락 역시 기억을 통해 행사장이자 무대 위로 그대로 이어져 시와 예술이 장식품으로 전락해버린 '시의 밤' 행사장과 그곳을 채우고 있는 가식적인 유명인사들 앞에서 과연 주인공 자신이 이 시를 읊고, 과연 그들이 이 시를 들을 자격이 있는지 되물으면서 예술이 가진 계급적 차별성을 폭로하는 동시에, 기억의 힘에 의존하는 시와 연극이 어떻게 합일하여 두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그 힘을 관객들이 무대를 통해 생생히 경험하도록 하는지 보여줌으로써 이 연극을 끝맺는다. 이 연극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무한히 재생, 반복 가능한 영화가 보여줄 수 없는 연극의 일회적 경험이 가진 힘과, 그 힘의 원천인 인간의 기억, 그것을 경험하면서 관객이 받는 고유한 감동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다.


"Hello Fred, it's Robert here. I know there's not enough space on your answering machine to leave a long message, but still, it's probably quite a bit more time than you spent summing up my entire career. So let me ask you this: Does thirty-five years in the theatre mean nothing at all? If something has never been electronically or digitally recorded, does that mean it never existed? If so, then the fundamental philosophical question is this: If a tree falls in the forest, and no one is there to record it on their goddamn iPhone, does it make a sound? Am I to understand that a five-minute cameo on a Radio-Canada comedy show is worth more than thirty-five years in the theatre business? Or was that the only clip you had in your archives?" (Lepage, Robert, 887: A Play, trans. Louisa Blair, Pref. Denys Arcand, Toronto: Arachnide, 2019, p. 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라딘 문방구야, 리커버판 많이 팔렴. 난 이거면 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식인들의 스승: 중세사상에서 지식과 권력의 역설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

번역: humilis


지식과 권력이라는 현상에 대한 중세사상의 시각에는 역설과 모호함이 가득하다. 이런 견해를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만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다. 단테의 서사시는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분 짓는 것이 지성과 학습능력이라는 중세의 시각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자 애썼다. 단테의 지식에 대한 개별적인 열정과, 지식을 갈구하는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그 시대의 보편적인 믿음은 『신곡』에서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덕과 지식을 따르기 위해 태어난 것(「지옥」, 26곡, 118-120)이라고 자기 동료들에게 주장하는 오디세우스를 통해 드러난다. 동시에 단테와 그 시대 사람들은 권력이 선과 악 모두에 거대한 힘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예컨대 (동)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절대 권력을 행사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천국의 어엿한 성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지식을 탐색하는 가운데 보인 오만함(hubris) 때문에 지옥행을 선고받았으며 오만방자한 교황 보니파키우스8세는 (단테가 보기에) 성 베드로의 발언처럼 “내 무덤이 놓인 곳을 피와 악취의 시궁창으로(「천국」, 27곡, 25-27) 만든 죄로 똑같은 운명에 처하였다. 중세의 관점에서 그들은 어디로 길을 잘못 들었는가? 정당하고 부당한 지식의 추구와 권력의 행사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단테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해답은 각 행위의 적절한 한계를 파악하는 데 있었다. 중세사상의 주류는 인식론의 핵심에 인간 지식의 유한함을 설정하였다. 물론 궁극적인 신비는 하느님이었다. (테니슨의 시구처럼) “인간 사상의 최대한의 경계를 넘어서” 지식을 추구할 것을 동료들에게 역설한 오디세우스[율리시즈]는, 특정한 지식은 인간이 간파할 수 없는 채로 항상 남아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는 시각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브처럼 이 그리스 영웅 또한 궁극적인 신비를 알고자 애썼으며 그 결과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완전한 의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반면에 이교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신곡』에서 “지식인들의 스승”(「지옥」, 4곡, 130-132)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고, 피조물인 인간 존재의 한계 내에서 알 수 있는 것만을 추구한다는 중세사상에 의해 그러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역시 그가 편찬한 법전과 그의 회심에서 드러나듯이 정치권력 심지어 군사력도 특정한 범위 내에서만 적법하게 행사할 수 있다는 한도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법과 정의가 권력을 가진 자의 위에 있다는 제한을 서술했다.

  지식과 권력의 정당하고 부당한 형태의 구분은 지식과 권력의 적절한 관계에 대한 단테의 생각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그는 지식과 권력, 이 두 영역이 견고하게 맞물리는 데 제3의 현상인 지혜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향연(Convivio)』에서 단테는 윤리학이 더해진 자연적 지식의 총합으로서의 지혜를 찬양하였다. 실로 지혜란 한계의 인식과 다름없었다.

  오늘날 중세 시대는 지식의 추구가 권위 앞에서 꺾이고, 지식에 필요한 한계라는 개념이 지적인 탐구를 가로막으려는 본질적인 의도의 증거로 간주되는 시기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세의 사상가들은 인간이 그 한계선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앎으로써만 그에게 허락된 방대한 양의 지식을 배우거나 가능한 만큼의 권력을 최대한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중세 사상가들은 알 수 없는 것의 신비와 알 수 있는 것을 드러내는 힘 모두를 경험하기 위한 한 순간의 경우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믿었다.


Pelikan, Jaroslav, "Master of Those Who Know: The Paradox of Knowledge and Power in Medieval Thought", Knowledge and power : the life of the mind and the conduct of government(Washington, D.C., 1988), pp. 13-15.


P.S. 이 글이 수록된 위의 책은  『지식과 권력』(김세준 옮김, 새물결, 1994)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rsg. von Otto Brunner, Werner Conze und Reinhart Koselleck, Geschichtliche Grundbegriffe: Historisches Lexikon zur politisch-sozialen Sprache in Deutschland (Bände 1 - 8)Stuttgart: Klett-Cotta, 1972-1997.

*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인데, 여기서의 강조점은 '독일'(Deutschland)에 있다는 것이다.


번역서명: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총 119개 항목 중 10개 항목을 번역하여 각 권으로 출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