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우리는 도덕에 속기 쉽지 않을까? 그 여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밝음은, 곧 참인 것에 대한 정신의 열림은 전쟁의 영속적 가능성을 간취하는 데 있지 않을까? 전쟁 상태는 도덕을 중지시킨다.
전쟁상태는 영구적 제도와 의무에서 그 영원성을 벗겨 내고, 그렇게 하여 임시적인 것을 통해 무조건적 명령을 파기해 버린다.
전쟁 상태는 우선 인간들의 행위에 그 그림자를 던진다. 전쟁은 도덕이 겪는 시련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자리 잡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쟁은 도덕을 가소로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전쟁을 예측하고 모든 수단을 다해 승리하는 기술인 정치는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이성의 실행인 것처럼 행세한다. 철학이 어리석음에 맞서, 정치는 도덕에 맞선다.
철학적 사유의 눈에 존재가 전쟁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전쟁은 가장 공공연한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실재의 공공연함 자체로 - 즉 진리로 - 존재에 관계한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굳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애매한 단편들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쟁 속에서 현실은 자신을 가리는 온갖 말들과 이미지들을 찢어 버리고 적나라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냉혹한 현실 (이것은 같은 말의 되풀이처럼 들린다!), 사물들의 냉혹한 교훈, 전쟁은 환상의 장막을 태워 버리는 전쟁의 번개가 치는 그 순간에 순수 존재의 순수 경험으로 나타난다.
이 어두운 명료함 가운데 뚜렷이 드러나는 존재론적 사건은 그때까지 자신의 정체성에 닻을 내리고 있던 존재들을 요동케 한다. 그것은 우리가 모면할 수 없는 객관적 질서에 의해 절대적인 것들이 움직이는 사태다.
힘의 시련은 실재의 시련이다. 그러나 폭력은 피 흘리게 하거나 죽이는 데서 생겨나기보다, 인격체들의 연속성을 중단시키는 데서 생겨난다. 인격체들이 더 이상 자신을 찾을 수 없는 역할을 하게 하는 데서, 그들로 하여금 약속뿐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실체를 배반하게 하는 데서, 모든 행위 가능성을 파괴해 버릴 행위들을 수행하게 하는 데서 생겨난다.
현대의 전쟁이 보여 주듯, 모든 전쟁은 이미,
그 무기를 쥔 사람에게 적대적으로 되돌아오는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전쟁은 누구도 거리를 둘 수 없는 질서를 만들어 낸다. 이제는 아무것도 외부에 있지 않다. 전쟁은 외재성을 보여 주지 않으며, 타자로서의 타자를 보여 주지 않는다. 전쟁은 ‘동일자‘Merne의 정체성을 파괴한다.
전쟁에서 보이는 존재의 면모는 서양 철학을 지배하는 전체성 개념 속에 자리 잡는다. 여기서 개인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들에게 명령하는 힘들의 담지자로 환원된다. 개인들은 이 전체성으로부터 (이러한 전체성의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자신들의 의미를 빌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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