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느꼈던 샛로운 인생의 반짝임은
아주 먼 곳에,
어쩌면 영원히 다다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나라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한,
그곳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과거의 인생으로부터 떠나올 수는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때때로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이다지도 외곩으로 그녀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는지,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모르고,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많은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가 현대의 삶이 이룩한 위대한 진보의 표식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런 견해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

비참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직업 선택의 자유란 것도 극심한 경제 불황으로 일자리가 없을 때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특징은 우리들 대다수에게 그 이전보다 선택―어떤 사람이 될지, 어떻게 행동할지, 누구 줄에 설지―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실존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저것 아닌 ‘이것’을 선택하게끔 해주는 참다운 동기가 없다는 점에 있다.

(1장, 20쪽)

-삶의 의미와 무의미의 문제

『모든 것은 빛난다』는 우리들 현대인의 실존 상황, 우리의 문화적 위기를 저 어두컴컴한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끄집어내어 성찰한 책이다.

튼튼하게 고정된 닻 하나 없이 부유하는 우리의 일상, 우리들이 매일처럼 겪고 있는 삶의 불안과 무기력증과 허무―즉 삶의 의미와 무의미의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책이다.

저자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단 하나다. 우리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찬양하는 **"개인의 자율성",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자아"는 우리 삶에 무슨 의미를 가져다주는가?

이 질문은 정말 충격적이다. 개인이 어떤 외적 강제도 없이 스스로를 책임지고 자유와 행복을 구가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데카르트와 칸트 이래, 그리고 프랑스 인권선언 이후 인류의 신성불가침한 이상 아닌가?

저자들은 아니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허무와 우울의 시대적 병증은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그릇된 신념이 최종적으로 봉착한 지점이라고 한다.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과 선택의 짐을 오롯이 개인에게 지운 결과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율적 존재이기에 홀로 *의미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삶의 피로감을 넘어 **심각한 허무주의, **의미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가 처한 정치적, 경제적 한계 상황이 개인의 삶을 질식하게 만드는 직접 원인으로 작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해소된다고 해서 우리 삶이 회생할 것인가? 또다시 그런 상황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 삶은 파탄을 맞이해야 하는가?

이렇게 보면, *성과주의의 피로감을 성공과 성취감이라는 프로작 약물로 마취시키는 사회를 비판한 『피로사회』나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의 진단은, 그에 앞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진단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겠다.

출판사 책소개 1

서양 고전에서 읽어내는 우리 존재의 빛

이 책의 저자들은 개인들이 이렇게 살지 않아도 각자가 성스러운 존재로서 충분히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단테의 『신곡』, 그리고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서양 고전들을 다시 읽어냄으로써, 어떻게 인간의 삶이 고대의 성스럽고 빛나는 경험 세계로부터 창백하고 우울한 피로 사회로 떨어져버렸는지를 이야기한다.

한 마디로 저자들은, **의미의 다양한 생산지를 하나의 원천으로만 응집시키려 한 서양 사상사의 시도야말로 허무주의의 주범이라고 말한다.

**의미의 원천을 초월적인 신의 사랑에서 찾으려 한 중세나, 자율적 개인의 내면에서 찾으려 한 근현대의 시도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말한다. 우리가 "자각된 개인" "계몽화된 개인"이라는 내면의 견고한 영웅주의에 취해서 스스로를 꽁꽁 닫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세상이 던져주는 빛들에 대해 열린 존재가 된다면, 성스러움을 다시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보고 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뛰어드는 행동, 야구장 관중석에서 하나 되어 환호하는 기쁨, 아침에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 한 잔의 즐거움이 그런 빛들이다.

『모든 것은 빛난다』는 이것을 고대의 다신적(多神的) 사고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다신적’이라는 것이 종교적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우리는 세상의 무수한 신들이 던져주는 의미의 순간들을 만끽하고 감사함으로써 성스러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의미의 생산자나 부여자로 보지 말고, 세상이 일으켜 보여주는 **의미들의 발견자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만 바꾼다고 해서 저절로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매순간 스쳐지나가는 **사건들(physis)에 대해 우리의 지성과 신체를 끊임없이 밀착시키고 연마하는 **활동(poiesis)을 함으로써, 광포한 감정의 선동이나 차디찬 이성의 명령 어느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지키는 **기술(meta-poiesis)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7장 참고).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은 빛난다"(All Things Shining)라는 말의 뜻이기도 하다.


출판사 책소개2


<내용 소개>

1장 선택의 짐 ― 선택의 짐을 회피하는 두 가지 방식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은, 신이 없기에 모든 것을 인간이 책임져야 한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로도 읽힌다.

이처럼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모든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이런 실존적인 선택을 회피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선택 대신 완강한 자기 확신에 취해 있는 인간형이나, 대중오락, SNS, 약물 등에 매달려 자신을 잊는 유형이 그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고현장에서 망설임 없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 경기장에서 몰아적인 플레이를 행하는 선수처럼 주저 없이 선택을 행하는 영웅적 인간형도 많다.

그러나 어떤 태도를 취하건 **선택의 상황 앞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개인의 모습은 지극히 근대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의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극한까지 맞서는 사람은 일쑤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곤 한다.


2장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 ― 실존의 과도한 짐은 허무주의를 부른다


자살한 미국의 천재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David F. Wallace)는 아직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이 없지만, 그런 실존의 상황을 가장 극한까지 감당하려 했던 인물이다. 월러스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고 스스로 의미를 생성해야 하는 오늘날의 반복적인 삶에서도 끝까지 삶의 가치를 추구했고, 그런 과제로부터 주의를 빼앗고 정신을 중독시키는 모든 유혹을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제는 결국 월러스를 자살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와 달리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의미의 창조자’라는 짐을 개인이 지는 것은 부당하며, 우리는 순수한 은총에 의해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둘 중 누구를 택해야 할까?


3장 신들로 가득한 세상 ― 호메로스의 행복했던 세상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에서 칭송한 인물들은 그런 현대적 실존 상황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헬레네는 파리스와 연정에 빠져 도망쳤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게 남편의 칭송을 얻는 여인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와 가정의 신 헤라가 한 인물을 동시에 지배하듯이, 신들이 정해주는 정조(mood)에 자신의 전 존재를 조율(tunning)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특징이었고, 그것이야말로 현대의 윤리적 관점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고대의 미덕(arete)이었다.

그들은 그런 신들의 은총에 대해 경이와 감사를 바침으로써 자기 문화에 온몸으로 참여했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4장 유일신의 등장 ― 기독교가 바꿔놓은 삶의 가치

호메로스 시대의 충만했던 삶은 그리스 전성기인 아이스킬로스의 시대와 초기 기독교를 거치면서 통일적이고 일원론적인 인간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복수와 분노가 지배하던 고대의 원시적 정념들이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아폴론의 법질서로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준 역작이다.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 공동체의 율법 질서를 인간의 내면적 욕망의 문제로 돌림으로써 문화의 획기적인 재설정을 이룬다.

호메로스 시대의 무질서한 정조들은 아이스킬로스의 그리스 문화와 유대 문화를 거치면서 공동체의 법적 질서 안에 포섭되었지만, 다시 예수와 바울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내면적 욕망이라는 한 가지 기준만이 인간의 삶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

물론 그 욕망은 신에 대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수렴될 때만 인정될 수 있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개인의 욕망을 신의 사랑과 일치시키려고 한 내면적 투쟁의 기록이었다.


5장 자율성의 매력과 위험 ― 악마의 특징이 인간의 미덕으로 변하다

예수와 바울,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치면서 인간을 이해하는 초점이 된 내면의 욕망 문제는, 육체와 물질로 이루어진 인간의 현세적 삶과 신의 정신적 사랑을 일치시킬 수 없다는 문제에 늘 봉착하곤 했다.

단테에게도 이 문제는 여전히 큰 난제였다. 단테는 『신곡』에서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실존의 상황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을 악마의 특성으로 돌린다.

단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일 운동자’를 신의 특성이라 보고, 신의 사랑의 움직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자유를 주장하는 개인의 의지를 꽁꽁 얼어붙은 지옥의 것으로 돌린다. 인간의 욕망은 그의 연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지순한 사랑을 거쳐 신에 대한 사랑에 이르는 것처럼 신의 은총 안에서만 일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테는 이렇게 자율성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옥에 가둔 반면, 인간의 의지로써 순수성에 이를 수 있다고 본 마르틴 루터를 거쳐 데카르트와 칸트에 이르면, 자율성은 인간의 가장 존엄한 특징으로 복권된다. 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 인간은 "스스로 세운 도덕 법칙에 따라서만 행동하고 평가될 수 있는 자율적 주체"가 된다.

6장 광신주의와 다신주의 사이 ― 개인 대 신의 싸움
이 책 6장에 이르면 우리는 "의미의 무한한 원천"이라는 자리를 두고 개인과 신이 벌이는 장엄한 투쟁을 볼 수 있다. 멜빌의 『모비 딕』이 바로 그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소다. 흰 고래는 무한대의 힘을 감추고 있지만 얼굴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같은 존재다. 반면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의 다리(자신의 실존)를 물어뜯은 존재를 이해하고 정복함으로써 자신을 의미의 완성자로 세우려는 인물이다. 이런 영웅적 개인과 기독교적 유일신의 싸움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배와 선장이 함께 침몰함으로써 파국을 맞는다. 신이자 우주의 비밀인 흰 고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신비로 남는다.
그러나 『모비 딕』의 화자(話者)인 이슈메일이 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언제든지 자신의 입장을 변화무쌍하게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에게 고래는 의미의 원천일 수도, 그냥 무심한 우주일 수도 있다. 이슈메일은 유일신의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다양한 문화적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성의 소유자다. 저자들은 이슈메일에게서 다신적 사고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7장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 ― 성스러움을 회복하는 길
이 대단원의 장에서 저자들이 집중하는 것은 다신적 사고가 현대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다신적 사고는 우선 퓌시스(physis)라는 세계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한다. ‘자연’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퓌시스’는 어느 날 피어났다 사라지는, 휙 스쳐가는 사건들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우리는 삶의 순간마다, 즉 야구장에서, 군중집회에서, 일의 몰입에서, 아침 식탁의 향기에서 늘 퓌시스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퓌시스는 거칠고 일시적인 힘의 형태로 나타나기에 그것만으로는 히틀러의 위험한 선동 같은 데 빠질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포이에시스(poiesis)라는 고도의 양육적인 기술을 갖춰야 한다. 원래 예술적 ‘창작’과 ‘제작’을 의미하는 포이에시스는 장인이 갖춘 기예처럼 숙련되고 안목이 높은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퓌시스의 계기들을 포이에시스로 함양함으로써 삶의 의미들을 성스럽게 가다듬고 균형감 있게 만드는 메타-포이에시스(meta-poiesis)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사건들이 보여주는 구별과 차이에 대해 둔감한 사람은 의미의 구별도 할 수 없으며, 걸어다니는 자동기계와 다름없게 된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의 커피 마시기를 성스러운 의식(儀式)으로 행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이 던지는 다신적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 존재의 성스러움이란 이런 문화적 실천(praxis)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서 온다는 것이고, 이것이 허무주의와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세기의 고전이자 21세기의 책>


<계몽의 변증법>은 **20세기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씌어진 책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마르크스를 비롯한 *쇼펜하우어, *니체, *딜타이, *프로이트, *베르그송, *베버, *벤야민 등 서양 문명을 비판하는 학자들의 모티프에 대한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의 대화의 산물이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탈마르크스주의적 뉘앙스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저자들은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분리가 제거되었음에도, ***‘억압‘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임금 노동의 지양이 비록 인간적인 사회 조직을 위한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생가갷ㅆ다. **계급은 철폐했지만, 억압은 근절하지 못한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환멸, 혁명성을 상실한 서구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실망, 문화산업이 발휘하는 괴력에 대한 경악 등은 이들로 하여금 정통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발길을 돌리게 하였다.

*토대/상부구조의 관계에 대한 재해석, *문화에 대한 주목, *강령으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 *계급투쟁의 자리를 대신하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관계에 대한 성찰이라는 측면에만 주목하면 <계몽의 변증법>의 진정한 목표는 마르크스주의 비판 그 이상이다.

32-33쪽

저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주춧돌인 계급갈등보다 **인간과 자연(내부와 외부)의 대립을 주목한다. 이들은 지배는 점점 비경제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파악했기에 경제분석 뿐만 아니라 문화비판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렇기에 저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연상시키는 용어들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지만(교환원칙 등), 더 이상 **사회의 물질적 하부구조에서 상부구조의 해결방안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저자들의 분석방법은 자본론보다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연상시킨다.

저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거리를 둘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사상 자체도 계몽의 원리에 포획되어 있다고 파악한다.

저자들이 보기에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부자유와 불평등의 근거는 **계급적 지배관계의 유지로 환원될 수 없고, **억압은 보다 깊은 근원을 지니고 있다.

호크하이머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환원시키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는 **자연을 인간착취의 영역으로 물화시키는 경향이 깔려 있다고 비판하였다.

저자들은 **계몽의 원리에 근거한 모든 전통을 비판한다. 저자들은 막스 베버가 **‘탈신화화(die entzauberung der welt)‘라 명명했던 **인간해방의 탈신화화 과정을 비판하려 한다. 저자들은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베버의 합리화 개념과 물상화 개념을 결합시켰던 방식을 따르고 있다.

33-34쪽

저자들이 보기에 사회주의는 합리적인 형태의 사회가 언젠가 실현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역사유물론적 해석의 낙관주의는 **계몽의 원리로부터 유래한다고 확신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계몽주의 철학의 견해, 즉 *보다 나은 정보를 통하여 **비판적인 사고와 **자율적 행위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증진됨으로써 마침내 **이데올로기적 억압과 경제적 억압이 제거될 수 있으리라는 견해를 물려받았고, 따라서 **계몽의 원리가 낳은 또 다른 아들이라는 견해이다.

계몽주의 철학은 모든 시민이 법 앞에서 평등한,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의 이상을 옹호하였다. 이성과 합리주의를 내세우는 계몽주의 철학은 반봉건주의라는 혁명적 성력을 지닌 이념이었다.

하지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계몽주의 철학의 이성과 합리주의의 진보성은 퇴색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발발은 부르주아 혁명을 이끌었던 이성과 합리성의 진보적 의미에 대한 지식인들의 회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계몽의 변증법>은 마르크스 이후 포괄적인 사회비판, 문회비판, 과학비판 속에서 이러한 변화된 통찰을 고려한 최초의 철학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스탈린주의적 사회개조에 대해서도, *부르주아적 계몽주의의 지속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또한 *20세기의 문화에 대해 비판적이며, 더 나아가 20세기의 *과학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계몽주의의 아들인 과학주의는 과학의 발전을 인간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재앙을 막을 수 있는 구세주라 찬양했다.

하지만 저자들에 의하면 과학은 **과학은 진보의 수단이 아니라, **지배의 도구로 전락했다.


35-6쪽


모든 책은 역사적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역사를 초월하는 ‘고전‘이라는 형이상학적 색채가 강한 표현이 거북하다 하더라도, ‘역사성‘을 뛰어넘은 저서들이 있다.

3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대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단편적인 정보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어떤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 트위터에, 각종 소문 속에 그들은 있다.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9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