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온도>



이덕무는 18세기 일본에 관한 당대 최신 종합 연구서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책을 썼다. 바로 <청령국지>다. 옛날에는 일본의 지형이 마치 청령, 즉 잠자리와 닮았다고 해서 청령국이라고 불렀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사민 즉 사농공상 신분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경제적 · 사회적·문화적 차이를 다룬 부분이다. 이덕무는 는 조선과 일본의 시민은 신분 질서상 명확한 차이가 있다고 기록했다. 

즉, *공인과 *상인이 *농민보다 더 천하게 취급되던 조선과 달리, 일본의 풍속은 "**직위를 가진 자가 높고, 그다음이 *상인이고, 그다음이 *공장(工匠)이고, 가장 낮은 것이 *농민"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조선이 **농본주의 (農本主義)의 나라였다면, 일본은 중상주의(重商主義)의 나라였다고 할까.

더욱이 이 책은 일본에서는 "**문사라 일컫는 자는 *공업이나 *상업을 겸해 살아간다. 그러므로 하류에 있는 자 중에 실로 문인과 시인이 많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에서는 **도시 상공업 계층이 곧 지식인 세력을 형성히 성장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식인이 공업과 상업을 겸한다는 것은 당시 조선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있던 일이다.

일본의 경제 제제와 사회 구조는 상공인 계층이 강력한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상공인 계층과 **지식인들이 주도한 *사회 경제적 변화와 *문화 예술의 신사조는 **19세기 중반 메이지 유신 즉, 일본의 근대화를 추동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만약 조선의 지식인 계층인 사대부가 상인과 공장을 겸해 문화 예술 분야와 더불어 사회 경제 활동에도 힘썼다면 어땠을까? 이덕무의 사우인 박제가가 『북학의 (北學議)에서 주장한 ‘양반상인‘과 ‘청령국지>의 ‘사민‘은 흥미롭게도 글의 행간에 숨긴 의도가 매우 닮아 있다.


17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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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한 세기 전 근대 유럽의 역사 속에 무의식의 발견을 끼워 넣기 위해 프로이트는 그가 **‘나르시시즘적
질병" 이라고 부른 세 가지 연속적인 인간 모욕의 관념을 발전시켰다. 

첫째,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돈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 인간에게서 **우주의 중심 위치를 박탈했다.

 둘째, 다윈(Charles Darwin, 1809~1832)은 맹목적인 진화를 통해 인간의 *기원을 설명함으로써 인간에게서 특권적인 **생명의 지위를 박탈했다. 

셋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인간의 심리 활동에서 무의식이 차지하는 지배적인 역할을 가시화하면서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집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보다 급진적인 인간 모욕이 출현하고 있다. 최근의 과학적 성과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직 이미지에 하나의 모욕을 더 추가한다. 우리의 정신은 **데이터 처리 과정의 연산 기계에 불과하며, **자유와 자율에 대한 감각도 기계사용자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의 뇌 과학과 비교한다면 *정신분석학은 전복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최근의 모욕에 의해 위협받는 *인간주의적 전통처럼 보인다.


7쪽

<서문 2>
/ 오늘날 정신분석학의 한계 및 현시성


그렇다면 오늘날 정신분석학은 정말 시대에 뒤처진 것인가? 세 가지호 연관된 차원에서 그렇게 보인다. 

(1) **과학 지식의 차원에서, 인간정신에 대한 인지심리학자들의 **신경 생물학적 모델은 프로이트의 모델을 대체하고 있다. 

(2) **정신의학적 임상 치료의 차원에서, 정신분석적치료는 **약물 치료와 **행동 치료에 밀려 자신의 기반을 급격히 상실하고있다. 

(3) **사회적 환경의 차원에서, 개인의 **성 충동을 억압하는 사회적규범의 이미지는 오늘날 압도적인 **쾌락주의적 경향과 비교하여 더 이상 타당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의 추모 행사는 아직 살날이 남은 환자를 추모하는 것만큼 성마르다. 프로이트 비판의 ‘명백한 진실과 대조적으로, 내 목표는 오늘날이야말로 정신분석학의 시대가 도래한 것임을증명하는 것이다. 

라캉을 통해 프로이트를 읽음으로써, 즉 라캉이 프로이트로의 복귀" 라고 부른 것을 통해서. 라캉은 이 복귀를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프로이트 자신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프로이트적 혁명의 고갱이로의 복귀로 이해했다.


7-8쪽

<서문3>
/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라캉의 프로이트로의 복귀‘는 정신분석 체제 전체를 **언어학적으로 독해하면서 시작한다. 그것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라는 유명한 명제로 압축된다. 

무의식에 대한 *통상적인 인식은 *무의식이란 불합리한 충동의 영역으로서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자아에 *대립되는 어떤 것이다. 

라캉은 이런 식의 무의식은 낭만주의적 생철학(Lebensphi-losophie)에 속하지 프로이트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보았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놀라운 것은 이성적 자아가 그보다 훨씬 큰 영역의 맹목적이고 불합리한 본능의 영역에 종속되어 있음을 주장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무의식 자체가 오직 자신의 문법과 논리에 복종하고 있는지 무의식은 생각하고 말한다를 입증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자아가 정복해야 할 *야생적인 충동의 저장고가 아니라, **외상적인 진실이 말을 하는 장소다. 라캉이 프로이트의 모토 wo es war, soll ich werden(그것이 있었던 곳에 나는 있어야 한다)"을 "에고가 이드, 즉 무의식적 충동의 자리를 정복해야 한다" 로 읽지 않고, "**내 진실의 자리에 나는 과감히 접근해야 한다"로 읽는 것은 그 때문이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내가 동화시켜야 할 심오한 진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참을 수 없는 **진실이다.


8-9쪽

서문 4>
/ 주류 정신분석학과의 차이점


그렇다면, 인간 사고에 관한 라캉의 관념은 주류 정신분석학의 관념과 어떻게 다르고 프로이트와는 또 어떻게 다른가? 

다른 정신분석학파와 비교할 때 라캉의 이론이 지닌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것의 **철학적 면모다. 라캉에게 정신분석학은 근본적으로 *심리적 장애를 다루는 이론이나 기법이 아니라, 개인들을 **인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영역과 대면시키는 이론이자 실천이다. 

그것은 개인들을 사회적 현실의 영역에 적응시키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현실‘ 이란 것은 처음부터 구성된 어떤 것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존재가 그, 그녀 자신의 억압된 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차원이 인간의 현실 속에 어떻게 출현하는지 설명한다. 

라캉의 관점에서, 신경증, 정신병, 도착증 같은 병리적 형식들은 근본적으로 현실에 대한 철학적 태도들을 지니고 있다. 만약 내가 신경증을 앓고 있다면, 이 ‘질병‘은 현실에 대한 내 모든 관계를 물들이고, 내 인격의 전체 구조를 결정한다. 

라캉이 다른 정신분석학파를 비판하는 초점은 그들의 *임상적 편향에 맞춰 있다. 라캉에게 정신분석 치료의 **목적은 환자의 복리나 성공적인 사회생활 내지 개인적인 자기 성취가 아니라, 환자로 하여금 그, 그녀의 **욕망의 기본 좌표와 곤경을 대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9-10쪽

<서문 5>
/ 프로이트와의 차이점



프로이트와 비교하여 주목할 점은 라캉의 ‘프로이트로의 복귀‘ 에 사용된 *수단이 *정신분석학 바깥의 영역에서 왔다는 점이다. 

프로이트 속에 숨어 있는 보물을 발굴하기 위해 라캉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부터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을 경유하여 *수학의 집합 이론, 플라톤, 칸트, 헤겔, 하이데거의 철학까지 광범위한 이론을 동원하였다. 그래서 라캉의 핵심 개념 중 대부분이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응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상상계(想象界), *상징계(象아界),
*실재계(實在界)의 세 항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상징적 질서로서의 **‘대타자‘를 말한 적도 없다. 또한 프로이트는 *‘주체‘가 아니라 **‘에고‘에 대해 말했을 뿐이다. 

라캉은 이처럼 다른 분야에서 수입한 용어들을 가지고 프로이트도 인식하지 못한, 그러나 프로이트 안에 이미 존재해온 구분의 도구로 사용한다. 가령, 정신분석이 오직 말로 병리적 장애를 치료하는 **‘대화 치료‘라면, 그것은 특정한 발화(發話) 관념에 의존해야 한다. 라카이 명제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과 실천에 함축된 발화 관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때 우리는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의 언어학, 발화 행위 이론 그리고 헤겔의 인정(recognition)의 변증법을 참조함으로써 프로이트의 발화 관념을 정교화할 따름이다.

라캉의 프로이트로의 복귀‘는 임상 분석에 새로운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 라캉은 일생 동안 끊임없는 논쟁과 분열과 추문까지 일으켰다. 그는 1953년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 파문당했으며(라캉의 생애 참조), 그의 논쟁적인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자에서부터 페미니스트에 이르는 진보적 사상가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서구 학계에서 라캉은 보통 포스트모더니스트나 해체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이런 꼬리표의 지시 영역으로부터 명확히 벗어난다. 라캉은 일생 동안 자신의 이름에 달라붙은 현상학자, 헤겔주의자, 하이데거주의자, 구조주의자, 탈구조주의자 따위의 꼬리표를 떼고자 했다. 라캉의 가르침이 지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끊임없는 자기 질문인 것도 놀라운 것이 아니다.


라캉은 탐욕스러운 독자이자 해석자였다. 그에게 정신분석은 구술(환자의 말), 혹은 기술(記述) 테스트를 독해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라캉을 읽는 좋은 방법은 그의 독법(讀法)을 실천하여 라캉으로 다른 텍스트를 읽는 것이다. 


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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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괌심이 필요하다고.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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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동이란 **단단한 바위 덩어리나 축축한 습지에 근거를 둘 수도 있지만,

나는 일정한 단계가 지난 뒤에는 그 행위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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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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