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기사도
중세의 지배 계급은 기사들이었다.
**서양의 역사와 동양의 역사에서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대목이다. 동양의 지배층은 대개 문관이었다. 이에 비해 서양에서는 지배층이 무사들이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기사의 기능은 무력을 사용해 주민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좋게 말해 보호이지만, 실제로는 주민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사법권을 행사하며, 그 대가로 각종 세금을 거두어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보호와 착취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있었다. 그 중 어느 한 쪽만 강조하면 사실을 왜곡하게 된다. - P171
기사의 일생‘을 살펴보도록 하자.
기사의 자제는 대략 *7~8세가 되면 집을 떠나 다른 기사의 *시종 노릇을한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기사로서의 몸가짐에서 노래 부르기까지 기본적인 소양 교육을 받는 것이다.
*14~15세가 되면 *종자(squire)로 한 단계 올라간다. 그는 기사의 *조수이자 몸종 생활을 하면서 언젠가 그 자신이 정식 기사가 되는 날을 기다리며 *본격적인 기사 수업을 한다.
기사의 *무기와 갑옷을 들고 다니며 기사가 무구를 착용하는 것을 돕고, *말을 돌보며, 전투에서 주인이 다른 기사를 *포로로 잡으면 그를 잡아 두는 역할도 한다.
이런 식으로 *일종의 도제 기간을 기치다가 *큰 무공을 세우든지 또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아서 *기사 서임을 받으면 정식 기사가 된다.
기사의 서임 방식은 흔히 무릎을 꿇은 사람의 머리와 양쪽 어깨를 칼로 가볍게 건드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래 방식은 그보다는 과격했으니, *칼등으로 기사 후보의 목을 있는 힘껏 내리쳐서 기절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아마도 상징적인 죽음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기절했다가 깨어나면서 어린아이나 종자로서의 자아는 죽고 정식 기사로서 생명을 받아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때 그에게 기사 서임을 해 준 사람의 *지위가 높을수록 그에게는 큰 영광이 된다. - P171
기사도, 기사 길들이기
말이 좋아 ‘귀족‘이지 원래 기사들은 *‘깡패‘와 다름없었다. 기사들이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기사도‘를 갖춘 고결한(적어도 겉으로는 고결해보이는) *귀족으로 변모하기 시작하는 것은 유럽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무력 충돌이 완화된 **11~12세기 이후의 일이다.
걸핏하면 칼을 휘두르는 단순무식한 칼잡이들을 얌전하게 길들인 데에는 **교회의 역할이 컸다. 무력이 여전히 지배층의 핵심 사항이기는 했지만 그들 간의 거침없는 유혈 충돌보다는 *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방향으로 유도한 것이다.
먼저, 싸우더라도 **서로 정정당당하게 싸우도록 *규칙을 정해주는 일부터 필요했다.
뒤에서 공격하기 없기, 갑옷을 미처 입지 못한 상태일 때 공격하기 없기, 부상당한 기사를 더 이상 공격하기 없기, 포로로 잡았을 때 잘 대해 주기……,
이런 식으로 그들의 투쟁 본능을 될 수 있는 대로 억제하고 규칙을 지키면서 싸우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국왕권이 차츰 강화되어 간 것도 이들을 길들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제대로 된 국가라면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무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칼싸움을 벌이면곤란하다. 무력이라는 것은 국가 기구에 모두 집중되고 시민들은 이에 따라야 질서가 잡힌다. 따라서 *왕은 무엇보다 개인적인 결투를 억압하였다.
더 나아가서 기사들이 무력을 사용하더라도 그냥 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훌륭한 **대의명분을 위해서 싸우도록 만들어 줘야 했다.
그래서 교회가 주장하는 여러 덕목들을 지키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하도록 가르치고, 여성을 비롯한 약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부여해 주었다.
결국 이들에게 ‘명예‘의 개념을 심어 준 것이다. 야만인에 가까웠던 마초들이 이렇게 해서 차츰 길들여졌다. 드디어 ‘기사도‘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 P173
중세 말의 현실은 난폭하고 냉혹하며 잔인했다. 기근과 질병과 전쟁이 곳곳에 만연해 있어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는 시기였다.
이때가 페스트로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져 갈 만큼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이렇게 **현실이 어둡고 괴로울수록 사람들은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꿈을 꾼다.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버텨나가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환상이었다.
그래서 **현실을 **기사도적 이상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기사들은 스스로에게 고난을 부여했다. 이 시기는 그래서 서약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 P174
기사도라는 환상과 그 잔재
기사도에는 삶을 **아름답게 꾸며 주는 *허구의 요소가 강하게 들어 있다. 문제는 이런 허구를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드는 기사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크나큰 불일치가 존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모든 아름다운 환상들은 깨져 갔다. 모든 것이 바뀐 시대에 여전히 과거의 환상을 지키려고 하면 그것이 얼마나 슬프고도 웃기는 코미디가 되는지는 <돈키호테>같은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 - P178
16. 인쇄술
**인쇄술의 발명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이다. 그것은 근본 혁명이다.
인류의 *표현 양식이 완전히 새로워지고, 인간의 *사상이 하나의 형태를 버리고 *다른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인쇄술이라는 형태 아래 사상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불멸의 것이 되었다. 그것은 날아다니고, 붙잡을 수 없고, 파괴할 수없다. 그것이 *공기에 섞여든다.
*건축의 전성기엔 그것은 산이 되어 강력하게 *한 시대와 장소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제 그것은 한 떼의 새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동시에 모든 공간의 점을 차지한다.
홍수가 온다 하더라도, 산은 물결 아래 사라져 버릴지언정 새들은 역시 날 것이며, 대홍수의 표면에 단 한 척의 방주라도 떠 있다면 새들은 거기 앉아 배와 더불어 맑은 날을 볼 것이며, 그 혼돈에서 솟아 나올 새로운 세계는 눈을 뜨고서 삼켜져 버린 세계의 사상이 자기 위에 살아 날개를 펴고 둥둥 떠돌아다니는 것을 보리라.
_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트르담 중에서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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