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이 총체보다 더 크고, 심오하고, 생명력이 있고, 강렬하다. - P5

내가 말하는 은둔은 초연하고 귀족적이고 고상한 탈속이나 고고한 정신의 세계 도피가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의 한복판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거리의 생산’ 혹은 ‘간격의 조립’과 같은 미시정치적 실철을 가리킨다.

은둔기계는 거리를 새로운 삶의 원리를 삼는다. 기존의 경계 너머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의 배치를 바꾸고자 한다. - P6

은신처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
은신처 속에 숨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
사회의 지배적 여론과 정동으로부터 집요하게 탈주하는 것,
과잉 연결된 관계들을 해체하는 것,
인간들의 세계를 떠나 비인간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
과열된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을 벗어나는 것,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가능세계를 발명하는 것,
이것이 21세기 새로운 은둔의 실천이다.

내가 야구를 좋아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삶의 방식이 고정된 이후인 듯하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그어진 이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것들이, 지금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다른 상황이었다면 주어질 수 있었을 것들과 *필연적으로 *상호 배제적 관계를 이룬다는 사실.

*무언가를 할 수 있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 - P13

*삶의 바탕에 존재하는 것은 전진이나 확장이나 강화가 아니라, 포기다. *코나투스 혹은 *힘에의 의지가 아니라 *자기-비움이다.

*자아의 일부를 잘라버리지 않았다면, 그것을 아직도 *나의 것이라 고집하며 *붙들고 있었다면 *지금 주어진 삶은 *존재할수 없다.

*힘의 제한, *힘의 자발적 파괴가 *삶의 조건이다.

이 인식에는 *비애가 스며 있다.

*풍요롭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금 *주어진 삶의 *‘의미‘를 즐길 수 있으려면, *기능과 *불가능을 가르는 *선분에 대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승복이 있어야 한다.

이 *구별, 선택, 배제의 불가피성에 대한 승인은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포기를 통해 *자아를 *축소시키는 것이 *존재의 묘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자질구레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삶의 문제들과 *싸우는 과정속에서 *깨달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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