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빙크는 구원의 복을 세 부류로 분류한다.

바빙크는, 죄 sin는 행위 언약 covenant of works의 파기, 하나님 형상의 상실, 타락의 힘에 대한 복속을 포함하기 때문에 죄책 guilt과 부패(오염)와 비참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논의를 출발시키고 있다. - P663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 율법의 모든 요구의 성취, 사망에 대한 승리를 통해 우리를 이 세가지로 부터 구원하셨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은 다음 세 부류로 구분될 수 있다.

1) 그리스도는 *칭의에 의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여기에는 *죄의 용서, *양자됨, *하나님과의 화목, *영광스로운 자유가 포함된다.

2) 그리스도는 *중생, *내적 부르심, *회심, *갱신 renewal, *성화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새롭게 하신다.

3)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원한 기업에 의해 인간을 *보호하시며, 인간을 *고통과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보존, *견인, *영화에 의해 인간이 *영원한 구원을 *소유하게 하신다. - P663

첫번째 부류의 복은 성령의 조명에 의해 분여되며, 믿음에 의해 수용되고, 우리의 양심을 자유롭게 한다.

두번째 부류의 복은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에 의해 분여되며, 우리를 새롭게 하고, 죄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속한다.

세번째 부류의 복은 우리의 완전한 구속의 보증으로서 성령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인 치시는 사역에 의해 우리에게 분여되며, 우리의 몸과 영혼을 비참과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한다.

첫번째 부류의 복은 우리를 선지자로, 두번째 부류의 복은 우리를 제사장으로, 서번째 부루의 복은 우리를 왕으로 기름 붓는다.

첫번째 부류의 축복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돌아보게 하며,

두번째 부류의 복은 대제사장으로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하늘에 계신 살아 있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고, 세번째 부류의 복은 모든 대적들을 복종시키고 자신의 나라를 아버지께 양도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동과 *재창조적인 행동 - 전자는 *칭의로서 *신분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후자는 *중생 및 회심으로서 죄인의 상황을 변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잠재 의식에서의 *성령의 사역(*중생)과 *의식 영역에서의 *성령의 사역(회심), 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데 관련되는 것들(*회개, 옛사람을 심자가에 못박음)과 *새사람을 입는 데 관련되는 것들(*중생과 부분적으로는 성화가 이에 해당함),

마지막으로 *구속 사역의 *시작(중생과 온전한 회심에서의)과 구속 사역의 *연장(매일매일의 *회심과 성화)을 구분해야 한다. - P664

2. 루터파의 견해

루터파는 하나님의 편에서 a parte Dei 행해지는 것들보다는 인간 편에서 a parte hominis 행해지는 것들을 더욱 강조하는 구원의 순서를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우선 *신앙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신앙을 인간 편에서의 *능동적 원리 즉 인간의 *행위로 이해하여 구원의 순서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루터파가 이렇게 신앙을 능동적 원리로 강조하는 것은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이신칭의의 교리- 이는 종종 종교 개혁의 결정적 원리라고 불리곤 한다-를 전명에 부각시켰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피퍼에 의하면, 루터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목케 되었다는 사실을 모든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사실을 *복음 안에서 *선포하시며,

*인간이 *죄의 용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칭의를 *주관적으로 *획득하도록 *요청하신다.

이러한 부르심에는 항상 일정한 정도의 *조명과 자극이 작용하게 되며, 따라서 인간은 성령의 구원하는 활동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회개가 일어날 수도 있고, 회개는 성령이 죄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시여하는 *중생을 야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 P664

하지만 이 모든 것, 즉 부르심과 조명과 회개와 중생은 단지 예비적인 것에 불과하며,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직 은혜의 언약의 복들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와의 *생동적 관계 없이도 *체험될 수 있으며, 단지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기능만 수행한다.

"*중생은 자신에게 *행사되는 *감화력에 *때응하는 *인간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며" 따라서 "인간의 *저항이 *점증되거나 감소함에 따라 *단번에 혹은 점진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

*중생 안에서 인간은 *구원의 믿음을 시여받고,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객관적으로 주어진 *죄의 용서 즉 *칭의를 획득하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하게 되고, 순종의 삶의 생동적 원리 즉 *갱신과 성화의 *영을 받게 된다.

이 모든 복들을 *영구적으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믿음-인간 편에서의 능동적 믿음-이 필요하다.

인간이 지속적으로 믿는다면 그는 평화와 기쁨, 생명과 구원을 누린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믿는 것을 *중단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의심스럽고 *불확실하고 잘못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지금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상실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3. 로마 가톨릭의 견해.

로마 가톨릭의 신학에서는 *교회론이 *구원의 순서에 대한 논의보다 *선행된다.

*어린 아이들은 *영세에 의해 *중생되지만, *성년이 되어서 비로소 *복음에 접한 사람들은 마음을 *조명하고 *의지를 강화시키는 **"충족 은혜"(gratia ouficiens)를 받게 된다.

*인간은 *충족 은혜에 *저항할 수도 있고 혹은 이에 *동의할 수도 있다. 만약 그가 이 은혜에 동의하면 이 은혜는 "**협력 은혜"(gratia co-operans)로 변환되며, 이로써 인간은 *칭의를 *예비하는 데 *협력하게 된다.

*칭의에 대한 *예비 과정은 다음 7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수용함,
(2) 자신의 *죄악된 상태를 *자각함,
(3) 하나님의 *자비를 *소망함,
(4)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함,
(5) 죄를 *혐오함.
(6)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겠다고 결단함,
(7) *영세를 희망함. - P665

여기에서 *믿음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단지 *여타의 *예비 과정들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신앙이란 단지 *교회의 교리들에 대한 *지적인 동의만을 의미 하며(ides infornis), *주입된 은혜(gratia injusa)에 의해 부여된 사랑을 통해서만 (fides cartne jomata) *칭의의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신앙은 단지 위에 열거한 예비 과 정 중 첫번째 과정으로, 모든 칭의의 기초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만 칭의적 신앙이라고 명 명될 수 있다.

이러한 *예비 과정 후에 *칭의 자체가 영세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칭의는 *죄의 용서에 뒤따르는 *은총과 초자연적인 *덕목들의 주입으로 이루어진다.

*죄의 용서의 분량은 *죄가 실제로 *극복되는 정도에 *비례한다.

여기서 우리는 칭의가 값없이 주어지며, 선행된 이비 과정에 의해 획득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칭의의 은사는 *계명을 지키고 *선행을 함으로써 *보존된다.

*주입된 은혜에 의해서 *인간은 *선행을 할 수 있고, 따라서 차후의 모든 *은혜와 영생에 *합당한 *공로 -*실제적 공로(me ritum de condigno) -를 이용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층은 인간에게 *구원에 *합당한 *능력을 *부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따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죄의 용서를 *계속 보유하게 될지는 *확실하지 않다.

*칭의의 은사는 *불신앙뿐만 아니라 *중죄로 인해 상실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칭의의 은사는 *참회, 고백, 사죄, 선언, 보속 행위로 구성된 고해 성사에 의해 *재획득될 수 있다.

*죄의식과 *영원한 형벌은 *사죄 선언에 의해 제거되지만, *현세적인 *형벌은 단지 *보속 행위에 의해서만 소멸될 수 있다.

4.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견해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구원의 순서는, 외면적으로 구속 사역을 하나님께 귀속시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인간의 태도와 행위에 부수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그 기회의 이용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온 세상의 죄에 대한 제물과 만족(satisfaction)", 즉 인류 개개인의 죄에 대한 제물과 만족이라 이해한다. - P666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아담의 죄의 죄책은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되며, 인간은 본성상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따라서 어떠한 영적인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의 결과로 선상되고 부패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인간은 여전히 본성상 영적으로 선하며, 따라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따고 믿는다.

하지만 죄인 된 인간 본성의 사악한 편견, 완고함, 나태로 인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비로운 도움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가 선택하기만 하면 완전한 영적 본과 구원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충족 은혜를 베푸신다. 복음은 인간 모두에게 무차별적으로 제공되며, 단지 그들에 대해 도덕적인 감화력만 행사하게 되고, 그들은 복음을 거부할 수도 있고 이에 순종할 수도 있다.

만약 인간이 복음에 순종한다면 그들은 회개와 신아을 통해 그리스도에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영혼의 운동은 칼빈주의에서처럼 중생의 결과가 아니라 소위 은혜의 상태를 예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신앙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정착할 때 이 신앙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그들에게 의로 전가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 자신의 것으로 전가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행하신 것이라는 관점에서 순종, 정직한 마음, 선으로의 경향의 원리를 포함한 이들의 신앙이 완전한 순종 대신 용인되면 의로 간주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이러한 근거로 칭의되는데, 알미니우스의 도식에 따르면 칭의란 일반적으로 그들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의로운 자로 용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한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의 인정은 율법에 대한 순종 혹은 복음적 순종에 기인하는 것이다.

신앙은 칭의하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죄인들은 중생시키는 데에도 기여한다. 신앙은 인간에게 복음적 순종의 은혜를 보증해 주며, 일생 동안 계속된다면 견인의 은혜를 야기시킬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거부될 수 있고 잘못될 수도 있다.

웨슬리적 혹은 복음주의적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17세기읭 ㅏㄹ미니우스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장은 원래의 알미니우스주의보다는 칼빈주의와 유사하지만 알미니우스주의보다 더 비논리적이다.

그들은 아담의 죄책이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되었고 이러한 죄책이 출생시 단번에 제거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그들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전적인 도덕적 타락을 인정하면서도, 현재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이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므로 인간은 자연 상태에 실존하지 않고,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은 죄인의 갱신과 성화를 야기시키는 ‘초자연적인’ 은혜의 사역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완성 또는 완전한 성화가 현세에서 이루어진다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또 한 가지 추가로 언급할 것은 ,알미니우스는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 공의의 사건이라고 이해했지만, 웨슬리는 이를 순전한 은혜의 사건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입잗들을 비단 감리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들, 그리고 특별히 오늘날 특정 교파에 소속되지 않은 다수의 교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 P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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