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유영모
/ 예수, 석가, 공자 모두가 똑같다
하느님은 공(空)이자 성(性). 예수, 석가, 공자 모두가 똑같다. 예수와 우리는 질적으로 같은 차원에 속한다.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되 하느님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미정고(未定稿)이지 완전고(完全稿)가 아니다. 예수는 시발이지 완성이 아니다. - P742
예수는 시발이지 완성이 아니라는 말은 지눌의 *돈오점수나 유가의 *수양론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사고방식보다 *동아시아적 전통에 가까운 발언입니다. - P742
유영모는 *한국을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한글은 *씨알을 위한 글씨다. 사제를 위한 라틴어도 아니고, 양반을 위한 한자도 아니다.
훈민정음은 씨알글씨, 바른 소리, 옳은 소리다. - P749
기존 언어의 틀 안에 갇혀서 생각하면 창조적 사유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 P750
유영모는 유학의 전통 윤리인 효제에 대해서도 독특한 관점으로 접근했습니다. 효제를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만 이야기하지 않고, 절대자에 대한 복종 또한 효제라 했습니다.
도교에서는 공자를 태극상진군, 현궁선이라 부르는데, 도교의 여러 신선 중에서 그렇게 높지 않는 등급의 신선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 P752
또 *절대자를 *‘아바디‘라고 했는데, *아바디의 *‘아는 *아침의 ‘아와 같은 감탄사이고, *바‘는 *밝은 빛을, *디‘는 *실천을 뜻한다고 풀이했습니다. - P757
그리고 *더럽다‘는 *’덜 없다‘ 라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참 그럴듯합니다. 더러운 것이 *더러운 까닭은 *덜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유영모는 *하나님을 *없이 계신 이라고 표현했어요. 그러고는 *인간도 없이 계신 이가 되려고 하는데 아직 *덜 없어져서 *더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P757
*『도덕경』에 *배움(學)은 *날마다 *보태는 것(日益]이고, *도(道)를 *실천하는 일은 *날마다 덜어 내는 *것(日損]이라 했어요.
그러니 *덜어 내고 또 덜어 내서 *완전히 *없어지면 그것이 *도입니다. 둘 다 비슷한 발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소를 하지 않아서 *더럽다고 할 때도 결국 *없애야 할 것을 *덜 없애서 *더럽다. 고 하는 거죠.
그가 『도덕경』을 번역해서 엮은 책 『늙은이』에서도 *성인과 현인을 각각 *씻어난이(聖人)‘, *닦아난이(賢人)‘라고 했어요.
*깨끗하게 "씻어 내서 *’덜 없지’ 않은 상태에 이른 사람이 *성인이고, *깨끗하게 닦아 내서 *덜 없지 않은 상태에 이른 사람이 *현인입니다.
이는 기독교와 『노자』와 우리말을 창조적으로 결합한 결과로 보입니다.
유영모는 이런 방식의 사유를 ‘신‘을 규정할 때도 적용합니다.
*한아님은 *없이 계신 이다. *없으면서도 계신다. *사람이란 있으면서 없다. *있긴 있는데 업신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게 슬퍼서 어떻게 우리 아버지처럼 없이 있어볼까 하는 게 우리의 노력이다. - P757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규정은 그다지 많지 않고 대신 *’무극이태극’이나 ‘일이이 이이일’ 등으로 궁극적 실재를 표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무극이태극은 없으면서 있는 것이고, 일이이 이이일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뜻인데, 유영모의 신에 대한 규정은 서구 기독교의 신에다 동아시아적 사유를 창조적으로 결합한 결과로 추정됩니다. - P758
/ 씨알과 얼의 존재론
유영모의 우리말 풀이의 *독창성은 *‘씨‘과 ‘얼‘에 이르러 절정에 달합니다.
그는 우선 한글의 모음 아래 *아(·)‘를 *우주의 탄생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는 빈탕한 데(허공)에 점 하나를 찍은 형상을 뜻하며, 텅 빈무(無)에서 무엇인가 생겨 나오는 존재를 그린 것이라고 했는데, 곧* 우주가 발생하는 모습이 *‘·’에 그려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 P758
그리고 ‘씨알‘을 풀이하면서 ‘을‘은 ‘’에 ‘ㄹ‘이 합해진 글자이고, ‘ㄹ‘은 변화를 표현한다고 풀이한 다음, ‘알‘은 모든 변화를 품고 그 변화를 자신안에서 풀어 나가기 시작하는 단계를 표현한 글자라고 했어요.
그러니 ‘씨알’은 **온갖 변화가 *가능한 *씨를 품은 상태라는 거죠.
그런데 유영모는 이말을 백성이라는 뜻으로 쓸 때가 많았습니다. 『도덕경』에 나오는 백성(百姓)과 『대학』에 나오는 민(民)‘을 모두 ‘씨올‘로 번역했거든요. 그러니 ‘씨을은 온갖 변화가 가능한 씨를 품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에 이어 ‘을‘을 풀이한 다음, ‘씨알‘이라는 말을 창조하고 다시 ‘얼‘로 나아갑니다. 유영모는 ‘얼‘은 *정신을 뜻하기도 하고 사람의 *생명을 뜻하기도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생명은 영성(靈性)‘을 가리키므로 생물학적 의미라기보다 종교적 의미가 강합니다. - P759
이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얼굴은 **얼의 골짜기(谷)‘로 *어른‘은 ‘얼온이‘, 곧 *얼이 *온전한 사람을 뜻하고, *‘얼간이‘는 *’얼이 빠진 사람‘을 뜻한다고 풀이했습니다.
또 나를 제나와 얼나‘로 구분했습니다.
*‘제나‘는 *자아(自我)‘를 가리키고 *‘얼나‘는 *영아(靈我)‘를 가리키는데,
*제나는 *자기만 아는 놈이니 사람은 모름지기 얼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외에도 *없꼭대기(無極)‘, *쓸몬(貨)‘, ‘씻어난이(聖人)‘, 닦아난이(賢人)‘, 속알(德)‘ 따위의 풀이가 있는데, 완전한 체계를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말에 숨어 있는가능성을 끝까지 추구한 결과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30장 함석헌
함석헌 사상의 많은 부분은 유영모에게 빚지고 있는데, *사유의 폭에서는 함석헌이 더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씨알이 참나, 얼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유명모가 *개인적 실철을 통해 그 과정을 보여 주었다면, 함석헌은 *사회적 실천을 그 영역을 확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769
함석헌의 저항 방식은 독특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면서 권력을 비판했어요.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과 싸우고, 또 공산주의와도 싸웁니다.
소련군에 붙잡혀 들어가기도 했고 미 군정하에서도 저항을 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비판할 때 대체로 *동아시아 고전과 성서를 인용했습니다. 고전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현실 비판이니 이런 방식의 읽기야말로 제대로 된 고전 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전은 시서입니다.
가장 오래된 금서는 무엇일까요? 그 또한 시서입니다.
진나라 승상 이사는 시경과 서경 이 두 책이 "옛것을 가지고 지금을 비난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에 해롭다는 것은 현재의 권력에 해롭다는 뜻이죠.
*함석헌은 자신이 읽은 고전을 가지고 시대를 재해석하고 권력과 불화합니다.
고전을 그냥 글로 치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통해 고전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함석헌의 고전 읽기는 오늘날 우리가 고전을 읽을 때도 전범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하빈다.
이후 아홉 살 때 나락 아주 망했는데 어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영국 낭만파 시인 셸리의 <서풍의 노래> 마지막 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언의 나팔이여, 오 바람이여. 겨울이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 The trumpet of a prophecy! O wind.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 P773
독재 정권을 겨울에 빗대고, 지금 비록 *씨알이 *고통받고 있지만 기어코 *씨알의 생명이 *움트는 *봄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희망을 실어서 씨알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한 의도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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