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자기 정체성은 *이용자가 드러내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 기술되는데,
그 하나는 자신을 소개하는 *자기 기술(self description)이고, 다른 하나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행해지는 *메시지 내용이다.

SNS의 경우, 자기 기술은 페이스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령, 위치, 학교, 종교,
문화적 취향 등의 프로필이나 프로필 사진, 커버 사진 등이 해당한다.

오프라인에서 아는 사람의 경우에도 이는 그 이용자를 인식하는 주요한 자료가 된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의 메시지는 이용자가 제공하는 프로필 등 인적 사항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많은, 어쩌면 더 의미 있는 정보를 드러낸다. 이용자의 가치관이나 행동 양식, 특정 사회 정치적 이슈에 대한 태도, 독특한 문화적 취향 등은 이런 과정에서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종종 이런 요소들은 확인한 친구는 미처 알지 못했던 그 사람의 또 다른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 P260

예를 들어, 페이스북의 프로필 입력 항목은 28개 정도이며, 트위터의 경우 한 번에 게시할 수 있는글자 수는 "얄팍한 읽기와 쓰기"14를 만들어 내는 140자에 불과하다.

**이런 기술적 규정은 **자신을 규정하는 다른 가능한 방식들 대신에 **소셜 소프트웨어가 정한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을 *기술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기술적 쓰기‘의 한 측면이다. - P261

그 다음의 문제가 더 중요한데, 이는 **‘나‘에 대한 소프트웨어의 이런 **기술적 규정이 어떤 문제를 가지는가 하는 점이다.

이 글은 이 문제를 **"보기의 과잉(excess of seeing)"15 개념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이는 원래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이 제안한 문학 비평의 개념으로, *"자기의 머리나 얼굴처럼 *자신의 시선으로는 *볼 수 없는 *신체 부분들을 **타자의 시선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타자의 시선을 통해 이렇듯 **자신을 **완성(completion)‘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타자의 시각 없이는 결코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개념이다. - P261

그렇지만 타자와 시선을 교환하는 SNS상에서 *보기의 과잉‘은, 위에서 언급한 기술적 규정의 두 가지 계기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 하나는 **내적 관계에서 **나를 대상화하는 계기에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노출증(exhibitionism)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 관계에서 *계량화된 나를 보며 드러내는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도취증)이다. - P262

*노출증은 정신 병리지만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역사(The Histories)』에서 이미 노출증적 행동을 기술한 바 있다.

우리는 페이스북과 같은 SNS 서비스의 *프라이버시 노출을 염려하지만, 그리고 그 문제가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부바스티스로 축제를 가는 그리스인들처럼 자신의 프라이버시 정보를 드러내고 **강박적으로 자신의 *의견, 감성, 위치 등을 드러내는 포스트를 게시한다.

소셜 소프트웨어에 의해 *기술적으로 **계량화된 *나를 보며 드러내는 **나르시시즘 역시 정신 병리지만, 고대부터 문학, 음악, 회화등에 등장하는 나르시시즘의 모티브는 우리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듯하다.

SNS 이용자로서 *우리는 단순히 *친구 수, 댓글 수 등 *계량적 지표를 보고 자신이나 자신의 글이 갖는 *영향력을 가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수치 자체를 **나르키소스가 보는 **자신의 얼굴처럼 간주하며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자신이 올린 글이나 사진, 그리고 그것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반복해서 *보는 것은 바로 *나르키소스가 떠나지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계속 보고만 있던 상황과 *유사하다.

이처럼 SNS와 같은 소셜 소프트웨어의 **‘나‘에 대한 기술적 규정은 *노출증과 *나르시시즘이라는 병리 현상을 활용하면서 그와 동시에그것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은 모두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는 보기의 과잉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음에 살펴볼 관음증과 더불어 동일한 심리적, 사회적 의미를 공유한다.

이렇게 볼 경우, sns는 노출증과 나르시시즘이라는 정신 병리의 상업적 전유로 간주할 수 있다. - P262

문제는 이런 *‘친구‘의 구성이 *‘나‘의 **주관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SNS라는 소셜 소프트웨어에 의해 *기술적으로 *규정되면서 **객관화‘
된다는 것이다.

이를 이 글에서는 *‘친구의 기술적 범주화‘라 부르고자 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에 대항해 구글이 만든 SNS인 구글플러스는 ‘서클(circle)‘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이용자로 하여금 친구를 분류하도록 (강제는 아니지만) 유도한다.

페이스북은 원래 친구라는 개념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글플러스의 영향으로 세분화된 친구 분류체계를 도입했다. 그리고 이런 분류는 이용자가 포스트를 올릴 때 그포스트를 볼 수 있는 ‘친구‘를 제한하는 기준으로 삼도록 하고 있다.

이런 *분류 체계는 *실제 세계에서의 *다중적인 대인 관계와 *커뮤니케이션 관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를 *기술적으로 *범주화하고 이에 기초해 *상호작용을 수행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모호하기도 해야 할 *미묘한 대인 관계를 **명시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sns와 같은 소셜 소프트웨어는 **관계 테크놀로지인 셈이다. - P265

그루밍은 노동 집약적이고 시간 소모적인 일이며, 따라서 집단 구성원의 수가 대략 **150명에 이르게 되면 그루밍은 더 이상 집단 내 유대를 유지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던바는 **언어가 *그루밍을 대체해 **사회관계망 유지(social networking)‘의 **효율성을 높여 준 것이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언어‘, 즉 *사회관계망 수단인 SNS는 그 효율성을 더욱 끌어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던바가 추정한 150명을 "던바의 수(Dunbar‘s Number)"
라 부른다.

던바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의 구성을 네 집단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는 주로 *가족이나 친족인 *최상위 5명, *매주 연락을 하고 지내는 *그다음 상위 *15명,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연락을 하고 지내는 *50명,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유의미한 관계를 유지하는 나머지 등이다.

던바의 주장대로,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성을 투자하는
*‘진정한 친구의 숫자는 *150명 정도인데, SNS에서 던바의 수 이상의‘친구’를 유지할 경우 그런 친구들에게도 과연 그런 그루밍을 해 줄수 있는가?

*페이스북의 *평균 친구 수는 2014년 1월 현재 *130명으로보고되고 있다. 이용자별 친구 수 분포는 좌측으로 편향되어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친구 수는 더 많아 보이며, 실제로도 대략 150명에서500명 정도의 친구를 둔 이용자가 많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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