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용어 21>


/ 이미지, W.J.T. 미첼


이미지와 미디어의 관계란 무엇인가? 글로벌 미디어가 곧 대다수의 문화를 가리키는 시점에서, 우리는 흔히 현대modern 미디어 문화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압도적인 이미지 폭격에 (대체로 경고와 함께) 주목하곤 한다. 전 세계적으로 어떤 중요한 사건(전쟁, 자연 재해)이 일어날 때면, 곧 이른바 ‘이미지의 폭풍이 지구를 휩쓸게 된다(이는2005년 9월 카트리나 허리케인 미디어 보도에 대한 뉴욕 타임즈의 설명을 상기시킨다).

인터넷과 글로벌 텔레비전, 디지털화된 이미지와 같은 일련의 새로운 기술들은 미디어영역을 과열시키고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특정 이미지 형식의 상스럽고 폭력적인 자극들‘
에 잠식되게끔 하면서, 이러한 폭풍을 가속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매스미디어의 문화적 영향은 사실상 불량 식품과 다름없는 이미지가 생산되는 데기여하고 있다. 스쳐가는 유명인, 팝 스타, 스포츠 영웅, 정치인, 그리고 방송에 등장하는 전문가 등, 이들 ‘이미지는 마케팅을 위해 교묘하게 다듬어지며, 폭력과 재난, 그리고여타의 자극적인 뉴스들이 고갈되었을 때에는 이들의 불행이나 실패가 스캔들 거리로제공되기도 한다.

마셜 맥루한 Marshal McLuhan이 언급했듯이, 파괴, 슬픔, 탐욕의 이미지에 의해 지배되는 뉴스들은 항상 나쁜 소식이다. 즉 "자극적일수록, 주목을 끌기 마련이다. if it bleeds, it leads."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거나 짠 불량 식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간간이 부작용에 대한 경고와 함께) 진통제, 아름다움, 건강, 그리고 성적 능력과 같은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광고의 달콤함과 짝을 이룬다.

매스미디어의 측면에서, 그 말은 곧 카메라 캐논의 광고 속 테니스 스타 안드레 아가시Andre Agassi의 대사처럼 "이미지가 모든 것이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라는 것처럼보인다. 또는 코카콜라 캠페인에서 나온 "이미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동조하기를 원하는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목마름은 모든 것이다." 라는 스프라이트 광고에서 나타나는 보다 근원적인 진실에 동의를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의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극도로 모순적인 평판, 말하자면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의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요소들, 혹은 가장 하찮거나 평가 절하된, 그리고 무가치한 평가들에 대해섬세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것들의 역설적인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이 무엇이고 왜 그러한지를 물어보면서 미디어 속 이미지에 대한 장기적인 관점을 취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미지는 숭배와 비난, 우상화와 추방을 동시에 겪었으며, 세련된 예술적 기예와 함께 제작되는 동시에 무절제한 만행에 의해파괴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미지는 이처럼 전부이거나 아무것도 아닌all-or-nothing 상태를 획득하기위해 현대적인 매스미디어의 등장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3대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교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에 동의한다. - P63

인간 존재는 "이미지 속에서" 창조되었고 인간 존재는 이미지를 만들어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헛되고 환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하느님의 이름을함부로 들먹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이미지는 이미 주어질 때부터 덧없음과 무의미함으로 오염되어 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율은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매우 명백한 입장을 보인다.

그대를 위해 천상이나 땅속, 물속의 어떤 것이든 그것과 닮은 대상이나 우상 이미지를만들지 말지어다. 스스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섬기지도 말지어다. (출애굽기 20:4-5,
킹 제임스 버전)

각 시대에 걸쳐 독창적인 해설자들은 대체로 이를 이미지의 생산 자체에 대한 금지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우상 숭배에 대한 금지로 읽어왔다. 하지만 그 계율은 분명히 어떤 이유에서든 이미지 생산을 배제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무관용 원칙의 기저에는 이른바‘경사면slippery slope 원리가 존재하는 듯한데, 이는 만약 한번이라도 우상이 만들어질 수있도록 허용된다면 머지않아 이미지가 우상이 되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가리킨다.

우상 이미지에 대한 금지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다. 몇몇 반도상적 문화는 특정 종류의 이미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겠지만(탈리반은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이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심지어 유대교와 이슬람과 같이 공식적인 우상파괴주의문화에서도 금지에 대한 수많은 예외를 용인한다(아야톨라 호메이니에서 오사마 빈 라덴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성자와 영웅들에 관한 거대한 초상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성자, 악마, 천사와 같은 도상들의 방대한 목록과 그 자체로 육화된 ‘신의 이미지‘인 그리스도의 수난 Passion of Christ 장면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기독교는 스펙터클한 의식이나 텔레비전 전도televangelism 와 같은 것들을 통해 오래 전부터 그 두 번째 계율과의 실질적인 관계를 포기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은 이른바 대성당이라는 대중적 미디어 스펙터클의 선례를 보여 주면서 중세부터 신성한 이미지의 대중적 배포를 완수했다. 게다가 대성당은 때때로 이교도 우상에 대한 숭배에 헌신해 왔던 그리스와 로마 신전의 폐허 위에 세워졌다.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그리고 ‘계몽된 문화들 역시 제의적 이미지나 신성한 도상의 설립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단적으로 프랑스 혁명의미학은 이성의 여신을 위한 신상을 세웠으며, 무신론적 공산주의도 마르크스에서 레닌,
스탈린, 마오에 이르는 자신들의 영웅적 우상들을 위해 고유의 판테온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파시즘의 지도자 숭배는 독일 시민을 바그너풍의 신과 여신들로 바꾸면서 이교도 신앙과 북유럽 신화의 도상학을 차용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국기는 일상적으로 정치적 신성화에 대한 제의를 위해 다뤄지고 있다. - P64

이를테면, 막대한 양의 과열된 수사학이 (아주 드문) 국기 훼손을 방지하는 데 소모되고 있는 한편, 모든 미국 정치인들은 스스로 국기를 걸쳐야만 하거나 사진 찍을 때마다 국기를 포함시켜야만 한다.

현대 매스미디어에서의 이미지의 역할 그리고 대규모 군중을 상대로 이미지를 유통시키는 보다 전통적인 방식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사진, 영화, 텔레비전, 그리고 인터넷의 발명은 글로벌 문화에 있어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의이미지 포화를 가져왔다. 이는 많은 학자들이 이미지의 양적인 증가에 의한 질적인 변화,
즉 현대 문화의 "회화적 이미지 전환 pictorial turn‘을 상정하도록 이끌었다.[2]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논의했듯이, 초기 기계적 복제 이미지는 사진과 영화의 기록 기술에 의해 예증된다. 그 뒤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인터넷과 같은 실시간 방송과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거쳐 전자적 커뮤니케이션(맥루한의 중심 주제), 이어서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바이오 사이버네틱스 복제를 들 수 있다.

바이오미디어biomedia (8장 참고)라고 불리게 된 영역에서 이미지 생산의 가장 최신 기술인 바이오 사이버네틱스 Biocybernetics는우리가 클론clones 이라고 부르는 "살아 있는 이미지들의 생산물에 의해 예증되고 있다.

생물 복제는 이미지 창조와 관련한 고대의 모든 공포와 금기를 다시 일깨웠다. 왜냐하면피조물 만들기라는 역할을 넘겨받음으로써 매우 직접적으로 ‘신의 역할 수행 playing god‘
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미디어와 맺어 온 관계는 기술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섬세한 지표를 제시해 준다. 그것은 아마도 이미지들을 복제하고 순환시키는 기술적 수단이 근본적으로변화하던 시기에도 그 이미지 유형들(얼굴·인물·사물 · 풍경 추상)의 레퍼토리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동전 주조에서 석판 인쇄술, 사진, 영화, 비디오,
그리고 디지털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이미지 생산과 재생산을 위해 발명된 새로운 수단들은 흔히 문화적 재앙이라는 예측과 "회화적 전환"이 발생하고 있다는 보편적인 인식을 동반한다.

다음으로, 이미지와 미디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역사는 명백히 전통적인’또는 고대의 미디어에서 ‘모던‘ 또는 포스트모던‘ 형식들로의 결정적인 변화를 전제로하는 이분법적인 서사를 경계해야만 한다. 미디어 기술의 역사는 글쓰기가 발명된 이래로, 줄곧 중대한 혁신의 영향과 함께 전개되어 왔음을 보여 준다.

단적으로 고대 로마와중국에서 금속 주조의 발명은 결정적인 혁신이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기 유화의 발명은 건축물의 벽으로부터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하고 복제 가능한 조판 기술이라는 새로운 산업 속에서 교환, 판매, 복제되는 상품, 유동적인 자산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이미지순환의 논리를 크게 변화시켰다. 또한 인공적 투시법의 발명은 이미지 제작과 기하학이나 측량술 같은 경험 과학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냈다.

물론 기술적 혁신이 미디어 역사와 이미지와 미디어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향들 또한 저마다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P65

사실상 미디어는 단순한 물질이나 기술이라기보다는 길드, 교역,
직업, 그리고 조합들과 같은 사회적 제도social institutions를 포함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대서양을 두고 양쪽이 같은 기술들 - 독립된 활자, 평판 인쇄, 전자관, 그리고 광섬유 케이블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매스미디어 역사는 유럽과 매우 다르다.

미디어 혁신과 후퇴의 반복된 순환은 결국 이미지에 관한 문제를 남기고 있다. 인간과 그들이 만든 이미지 사이의 깊고 모호한 관계는 기술적 혁신의 순간, 즉 새로운 매체가 새로운 종류의 이미지를 가능하게 만들 때, 그리고 종종 전례가 없을 정도로 실제같고 설득력 있을 때, 또한 훨씬 가변적이고 치명적이라고 여겨질 때, 이미지가 이미지소비자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한 미생물인 것처럼 일종의 위기로 내몰리는 듯하다.

이것이 아마도 우상 파괴의 선지자인 이미지 이론가들과 미디어 분석가들의 기본 입장이 문화적 문외한들Philistines — 현대의 키치와 대중문화 속에서 환생한 전형적인 고대 우상 숭배자 - 에게 경고하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같은 비평가가특정 미디어의 몇몇 이미지들을 예술적 지위로 승격시키는 전형적인 작업에 개입하기도 할 것이다.

미학적 지위는 흔히 인정받지 못하던 이미지를 구제하는 과정에서 형성되곤 한다. 여기서 그 이미지는 어떤 용인된 미디어 틀(전형적으로 갤러리, 미술관, 그리고고급 컬렉션) 내에서 재매개됨으로써 상업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함의가 어쨌든 정화된 것처럼 보인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실크 스크린에서 나타나듯, 심지어 대중문화로부터 온 노골적인 상업 이미지도 이러한 방식으로 구제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미디어 연구에서의 비평적 용어로서, 이미지는 적어도 잠정적으로 가치의문제를 보류하는 것을 포함하여 보다 냉정한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이 논의의 남은 부분을 위해, 나는 이미지와 그것이 미디어와 맺는 관계를 규정하는 데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지가 어떤 열정을 이끌어 내는 근원을 이해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우선 [이미지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어떤 이미지는 그것이 재현하는 것에대한 그것의 감각적인 닮음 때문에 무엇인가의 기호이거나 상징이다. 어떤 이미지, 혹은철학자 퍼스C.S. Peirce가 규정한 것처럼, 어떤 아이콘은 단지 무언가를 의미하거나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그가 1차성 firstnesses‘(파노프스키가 특정 이미지의
"전前도상학적pre-iconographic"성질들 이라고 부르는 것, 즉 우리가 그 이미지가 재현하는것에 관심을 갖기도 전에 우리가 지각하는 것들) - 색이나 질감, 또는 형태와 같이 우리의 감각들에 가장 먼저 와 닿는 근본적인 성질들 - 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지니기 마련이다.[3]

이러한 성질들은 다른 것에 대한 닮음의 지각을 이끌어 내고 그러므로 그 사물은 일종의 연기된 반응a double take을 만들어 낸다. 즉, 그것은 그 자체(그려진 캔버스 한점)인 동시에 다른 것(영국의 자연 풍경) 같기도 하다. - P66

이 닮음이나 유사성이 발견되는 지점과 그것이 구체적으로 구성하는 장면은 자주 논의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몇몇은 그것을 사물의 특수한 성질에, 다른 이들은 보는 이의 마음속에 위치시키며, 한편으로 누군가는 절충안을 찾기도 한다. 몇몇 철학자들은 닮음이라는 전체 개념이 지시적이거나 암시적인 관계의 토대가 되기에는 너무 모호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모든 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 결국 여타 다른 모든 것을 닮았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4]

닮음에 대한 지각은 이미지를 위한 토대라기보다는 그것의 결과로서 드러날지 모른다. 예컨대 피카소는 그가 그린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초상이 그녀와 닮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비평가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걱정 마시라. 그렇게 될 테니까."

우리는 이미지를 나타남과 인식의 이중 순간, 물질적인 사물과 일종의 환영, 어떤형태나 변형을 동시에 인지하는 것으로서 경험한다. 이미지는 물질적 대상으로서 또는그 위에서 또는 그 속에서 나타나지만 동시에 희미하게, 유령처럼, 그리고 덧없이 나타나기도 하면서, 언제나 거기 있으면서도 없다.

비록 이미지들이 대체로 자동적으로 공간내 사물의 재현과 관련되더라도, 어떤 일시성temporality의 형식이 이미지와 우리의 만남마다에 내장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상학자들은 우리가 이미지의 시작onset‘이라고 부를 법한 것, 그에 대한 인식 순간,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상相의 여명Thedawning of an aspect" 이라고 부른 "다시 보기" 나 뒤늦은 반응 에 주목한다.[5]

이미지는 아마 시간성 - (사진의 존재론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근원 또는 생산 날짜, 역사적 양식,
(역사화에서) 묘사된 서사, 또는 관람자를 점차 깊은 곳으로 이끄는 미로 내부 등 마치점차 형상을 갖춰 가는 그림을 보는 듯, 무언가의 흔적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가시화되는 것-에 대한 다른 기호들도 전달할 것이다. 흔히 이미지는 십자가의 길Stations of theCross에서처럼 연속적으로 나타나며, 이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이야기하고 관조자들로하여금 제의적 의식을 수행하도록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가 발명되기도 이전부터, 이미지는 언제나 잠재적으로, 가상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물(대상)로존재해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실시간 이미지들은 대상들이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며, 그럼에도 그들의 고요함(웹 카메라나 감시 사진들과 같이)은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동시대 사례들이 만일 타임스탬프와 함께 1/1000초까지 기록된다면).

플라톤의 동굴 위에 투사된 실루엣들은 형상화된 이미지들의 움직이는 행렬에 의해 투영된다. 극적 의식의 전체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옵시스opsis(광경)와 렉시스lexis(글자), 그리고 멜로스melos(음악)라고 부른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대 위의 배우는 자신들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배경 그림scenographic 이미지인 무대 속에서의상과 제스처를 통해 인물들과 행위들을 모방 - 말하자면, 그런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생산 - 한다. - P67

왜냐하면 설계자의 예술적 설정이나 관조자의 상상적 활동 중 하나 때문이다(글로브 극장의 앞좌석에서 "프랑스 한복판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라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말에서처럼). [6] 성서상의 전통에 따르면, 최초의 이미지는 창조자에 의해생기와 동작이 불어넣어진 흙으로 형상화된 사물이다.

그러므로 그런 이미지는 매체의 친숙하면서도 언캐니한uncanny 성질, 그것이 취하는 형태나 형상, 매체 자체가 매체로 나타나도록 하는 동안 매체 속에서 자신의 외형을만드는 사물을 가리킨다. 그것은 가 본 장소나 마주친 얼굴, 풍경이나 신체, 대지나 형상, 반복될 수 있는 제스처나 운동 이미지‘로서 기억 속에 남는다. 이것이 이미지가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서사나 시에서 나타날 수 있고, 동일한(혹은 적어도 유사한) 이미지로 인식될 수 있는 이유이다.

예를 들어, 황금 송아지Golden Calf는 텍스트와 회화, 그리고 (일반적으로 친숙한 모습인) 조각상으로 나타나게끔 "재매개 될 수 있다.[7] 이미지는(문화적 도상들과 대조적으로) 그렇게 특별하거나 독특하지 않다. 그들은 일상 속 주변 잡음과 같은 것으로서 도처에 존재한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우발적인 지각들을 유발할 수도 있고 그리하여 우리는 구름 속에서 얼굴을 보거나, 벽에 뿌려진 진흙 얼룩 속에서 풍경과 전투 장면을 찾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이미지와 미디어의 관계를 둘러싼 모든 문제는 모순적인 경향들을 노출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재현적이거나 지시적이거나, 혹은 ‘추상적’(순수하게 기하학적인 원은 자리를 잘 잡은 하나의 표식에 따라 웃는 입의 얼굴이 된다)일 수 있다.

형식적으로 그 범위는 엄격하게 규정된 형태에서 무질서하게 뒤범벅된 것, 기하학적으로 엄격한 디자인에서 미니멀리스트가 흩어 놓은 조각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또한형식적인, 변형된, 혹은 비정형의 상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쉽게 표준화된 스테레오타입이나 기괴하게 변형된 캐리커처, 미신에 필요한 영적 환영이나 회의적인 관찰자를 위한검증 가능한 과학적 모델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림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건축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으며, 경험적 현실, 또는 네버랜드와 유토피아의 지도를 제공할수 있다. 나아가 치명적 아름다움, 추함, 괴이함, 불가사의함, 귀여움, 우스움, 수수께끼,
투명함, 혹은 숭고함일 수도 있다.

요컨대, 그것은 인간 상상력과 지각, 그리고 감각적 경험이 관조나 정신 분산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이미지 개념과 관련하여 가장 난해한 것들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우리는 이미지를 세계 내 물질적인 그림들이나 대상들, 혹은 창조되고 부서질 수 있는유형의 사물들로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것들을 정신의mental 산물들 - 기억, 판타지, 꿈, 최면중의 공상, 환각, 그리고 언어적 서술이나 그래픽 묘사를 통해 오직 간접적으로만 접근될 수 있는 여타 다른 심리학적 현상들-로 여기기도 한다. - P68

미디어 연구의 견지에서 심적 이미지의 상태란 무엇일까? 확실히 기억memory이 매체로 여겨진다면, 이미지는 서사, 가사, 단어, 그리고 문구와 더불어 기억의 내용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우리가 정신적 이미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할 때마다, 우리는 부득이하게 정신의 모형에 해당하는 몇몇 외적·물질적 기구들 - 극장이나 영화관, 상상의 박물관 musée imaginaire, 카메라 옵스큐라, 컴퓨터, 카메라 ㅡ에 의존하게 되는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을 종종 내적 표현이나 투사, 또는 이미지들의 저장과 복원을 수반하는 어떤 종류의 매체에 비교하지 않고서는 정신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 미디어 내n의 이미지들 옆에서, 마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심적 과정들의 주관적 그림들로 내면화하는 미디어의of 이미지들을 소유하는 것 같다 ㅡ 사진적 기구 또는 빈 석판, 프로이트의 "마술 칠판"으로서의 정신은 인상들을 수용하기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얼마나 유명하고 구체적이든 간에, 그들을 지각하는 정신들을 지닌 생명체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모든 이미지들은 심적인 것들이다(일례로, 일종의 미끼와 같은 이미지들은 인간 의식의 경계 선상에서 동물들의 관심을 끈다).

물론 이미지 저장과 복원을 위한 매체로서의 정신을 다루는 과정에서, 우리는 즉각적으로 모든 정신이 몸 bodies 안에 수용되어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이 현상학에서의 일반화된 ‘인간 몸이든 역사적으로 특징지어지고 정리된 인종, 젠더, 성적성향, 장애, 그리고 생명 의학 기술상의 몸이든(2장 「몸」 참고), 심적 이미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체현embodiment 의 문제, 그리고 감각적인 경험의 물질적 세계에 대한 문제 속으로 이끌린다.

미디어를 가로지르는 이미지에 대한 연구는 끝없는 순환, 즉온갖 종류의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형상과 재현물의 실제 세계에서 출발하여,
이들 미디어의 생산자들과 소비자들의 정신적 삶으로 빠르게 이동한 후, 실제 환경 속그들의 육체적 실존으로 돌아가는 순환 과정처럼 보인다. 미디어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미지는 여러 가지 미디어 기능에서도 중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외형상으로나 전달된 내용상으로나 상상 가능한 모든 미디어 양상들을 순환하며, 전체 과정을위한 모델들을 제공하는 두 번째 반성의 순간, 이 흐름 속에서 발생된다. 다시 말해, 이미지는 미디어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원의 중심인 동시에 둘레이다. 이미지는 어쨌거나매체에서 나타나고, 우리는 그런 이미지들에 대한 이론적 구축 없이 미디어를 이해할수 없다.


감각과 기호

기본적으로 이미지는 시각 이미지‘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비시각적인 의미들에 의해 이해될 수 있고, 여타 비시각적인 의미들을 설명하는 개념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청각적,
촉각적, 미각적, 그리고 심지어 후각적 이미지는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며, 그러한 이미지는 이미지의 기본적인 정의, 즉 감각적 닮음에 의한 기호들이나 상징들, 각기 다른 감각적 매개물에 의해 전달되고 지각의 경로에 의해 수용된 아날로그 정보 다발과 같은 개념을 충족시킨다. - P69

설탕 대용물은 그저 단맛을 의미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설탕이 관련된 감각을 깨운다. 누트라스위트 Nutrasweet 가 혀에서 느껴지는 맛뿐만 아니라설탕의 과립 알갱이와 결정체 모양까지 흉내 내게 될 때, 그것은 보다 완벽한 아이콘이될 것이다. 등호’, ‘~는 ~와 일치하다‘, 그리고 ~은 ~과 비슷하다‘ 등과 같은 대수학 표기법은 퍼스가 언급한 것처럼 그들이 닮음이나 등가와 관련하여 고도로 추상적인 관계를 즉각적으로 가시화한다는 의미에서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경로나 감각들이 교차하거나 혼동될 때, 우리는 색이 소리로 들리거나 그 반대이기도 한 ‘공감각적‘ 이미지들을 이야기하게 된다. 음악의 일반적 어휘는 색, 선, 제스처, 그리고 언어적 울림들,
모음운, 두운법, 그리고 반복된 형상과 운율 등 단어들의 소리에서 발생하는 청각적 이미지와 관련하여 일련의 시각적이고 도식적인 유사성을 불러일으킨다.

미디어 연구에서는 일반적으로 시각적 미디어‘나 ‘시각 예술과 같은 용어를 대략서로 같은 대상, 즉 회화, 사진, 조각,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 등 근본적으로 눈과 관련된 형식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이들은 흔히 ‘언어적 미디어‘ - 문학, 책, 신문(‘인쇄‘ 미디어) - 와 구분되며, 그러한 구분은 읽고 쓰는 능력의 감퇴, 그리고 관람이 읽기를 대체하는 상황을 넘어 거의 항상 제의적인 애도와 더불어 나타난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면 그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시각적 미디어의 모든 예들, 특히 매스미디어는 시각과 청각 이미지들, 광경과 소리, 그림과 단어를 조합하는 혼합mixed 미디어가 되어 가고 있다.

둘째, 이른바 인쇄 미디어는 탄생부터 인쇄된 그림들pictures 과 그래픽 이미지들을 포함해 왔다. 게다가 물질적 매체로서 인쇄 자체는 눈을통해 전달된다. 활자체나 글자체 선택은 그 자체로 어떤 텍스트의 ‘보기‘에 관한 선택이다.

주지하다시피 마셜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혁명이 이전의 구술 문화에서 시각 문화로의 전환이었음을 논의한 바 있다. 그가 제안하기로, 읽기의 선형적 과정은 인공적인 시점에 따라 기하학적으로 규정된 공간, 선형적인 발달과 더불어 엄밀하게 조정된다.

‘언어적 미디어’와 ‘시각적 미디어’를 다루는 경우, 우리는 기호학(기호들에 대한 분류)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기호의 영역에서 볼 때, 언어와 시각사이의 차이는 퍼스가 상징이라고 부르는 자의적이고 관습적인 기호, 그리고 감각적 닮음에 따라 무엇인가를 상징하는 아이콘적 기호 간의 차이와 같다.

인쇄 미디어(말하자면 신문이나 잡지 등)의 사례 중 대다수는 단어들 - 자의적 상징들로 읽히게 되는 언어적 기호들과 시각적 이미지들, 세계 속의 사물들에 대한 그들의 유사성을 검토하는아이콘적 기호들을 함께 배치한다.

반대로 감각의 영역에서 볼 경우, 언어적/시각적 구분은 듣기와 보기, 말하기와 보여 주기, 구술적·시각적 커뮤니케이션 사이에 있다. 기호와 코드 사이의 구분은 희미해지며, 아이콘과 상징은 분기점의 양쪽에서 나타날 것이다. - P70

관습적으로, 자의적 상징들은 아이콘적 기호들처럼 눈 혹은 귀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에 기초한 미디어는 인쇄 문화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며, ‘청각적 이미지‘에 기초한 미디어는 말과 음악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래의 그림은 언어적 · 시각적 미디어의 애매한 범주 아래에 놓인 ‘기호 SIGNS’와 ‘감각SENSES‘ 사이의 교차점을 명료하게 해줄 것이다. [8]


그림 글
도상- SIGNS > senses ->상징
음악말



/ 디지털 이미지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몇 가지 논의 없이는 미디어 연구 속 이미지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완전해질 수 없다. 몇몇 학자들은 컴퓨터 이미지의 등장이 인간 체험의 대상과 같은 기본적인 본질을 바꾸면서 이미지 존재론의 근본적인 전환을 만들어 냈음을 논의한 바 있다.

한 학설에 따르면, 디지털 이미지가 의도적인 조작 가능성을 내포하게 됨에따라 (화학에 기반한 전통적인 사진과 반대로) ‘실재‘와의 인과적 지표적 연관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처럼 누구도 본 적 없는 것들을 재현하는 일은 수공예적 이미지를 통해서도 가능했다(용어 속에 인간 손의 이미지라는 뜻을 내포하는, 조작에 대한 강조는 디지털로 형상화된 손가락들의 관계에서 흥미롭게 나타난다).

이 물음을 사진사에 한정시켜 본다면, 포토샵과 같은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편리함이나 신속함과 별개로, 필름에 기록되기 전pro-filmic의 사건과 암실 작업의 과정 속에 언제나 조작 가능성이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작 가능함이라는 사진의 근본적인 성질을 염두에 두더라도, 아부 그라이브 Abu Ghraib 수용소의 고문 장면을 담은 디지털 사진 이미지는실제 있었던 사실로 다가온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진과 ‘실재‘의 연관성에 대한 주장들이 실재에 대한 관념, 그리고 언제 누가 그 사진을 찍었는가와 같은 제반 환경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단적인 예로, 사진은 법정에서 ‘신뢰‘되어 오지 않았었다. 사진의 진실성은 반드시 2차적인 증언과 목격자에 의해 보증되어야만 했다. 어떤 매체든 이미지에 붙어 다니는 자명함의 아우라, 이를테면 이미지의 감각적 현전이나 1차성firstness(퍼스의 용어를 떠올리자면)은 그들에게 아마도 실재에 대한 신념을 느끼게끔할 신뢰성을 손쉽게 제공하거나 혹은 (바로 같은 이유에서) 그들을 의심의 대상으로 만들 수도 있다. - P72

만일 디지털화가 이미지의 존재론 속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 냈다면, 다음으로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변화된 세계 내의 존재 상황 - 이미지 생산과 순환의 변화된 조건, 이미지의 급격한 양적 증가, 그리고 특히 인터넷을 통한 신속한 전송 - 속에서 더 그럴 듯하게 추구될 것이다.

한편으로, 디지털의 새로움에 대한 보다 급진적인 주장은 그것이 이미지를 지나간‘전통적인 의미 속에서 그려 왔다는 것이다. 순수한 수적 정보로서 재코드화된 이미지는 원리상 인간의 몸과 감각으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이다. 이미지의 감각적 1차성‘, 그리고 무한히 분화된 인상과 유사성들의 아날로그 코드에 대한 긴밀한 관계는 기계에 의해읽히고 쓰이는 언어에 의해 대체되었다.

감각적 이미지들의 오래된 양식은 그저 표면적외형이나 ‘눈속임으로 평가 절하되었다.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결국 중요한 것과 실재하는 것은 이진 부호의 1과 0이다.

새삼스럽게도, 이러한 주장은 종종 ‘포스트휴먼‘ 체제의 어둡고 디스토피아적인 비전과 더불어 나타난다. 만약 세속적 인문주의의 시작과 함께 인간이 신의 이미지 속에서 창조되었고, 신은 인간과 더불어 재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인공 지능과 생각하는 기계의 발명이 인간과 이미지의 동반 종말을 표시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어진다.

포스트휴먼이라는 상상은오늘날 생명체의 출현이라 할 수 있는 로봇과 바이오메카닉 혼종인 사이보그를 가정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스테레오타입 이미지는 낡은 범주가 되었으며, 실제로 존재하는 남성들과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간 과거와의 급진적인 단절로서의 디지털 이미지라는 가정에 대한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상 과학 영화와 소설들(둘 다 전통적인 장르인) 속에서, 포스트휴먼디지털 시대의 가장 생생한 이미지들은 여전히 미래를 가리킨다. [9]

아날로그 체험의 ‘눈속임‘ 아래에 있는 수적 혹은 ‘디지털 인프라 digital infrastructure‘는 일반 사용자가 아니라디지털 이미지를 아날로그 이미지처럼 다루는 기술자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복사와 배포가 쉽다는 점을 제외하고 말이다). 종종 디지털화는 보는 이와 이미지의 상호작용에있어서 전통적인 이미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요소를 보여 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사용자는 디지털 이미지의 핫스팟을 클릭하여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또는 이미지의 모습을 바꾸거나 별도의 해설을 열 수 있고 심지어 (레프 마노비치의 "이미지-인터페이스"와 "이미지-도구" 개념에서) 이미지를 정보 조작을 위한 컨트롤 패널로서 다룰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동굴이나 카니발의 시작 이래로 이미 상호작용과 몰입은 이미지 문화의 요소로 여겨져 왔다. 아날로그 이미지의 쇠락에 대해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 바로 그 제목에 의해 알파뉴메릭alphanumeric 암호의 흐름이 디지털 ‘매트릭스의 심오한 진실로 드러나는 순간, 사람들은 숫자들이 스스로를 매트리스의 ‘에이전트를이자 아날로그 인간 형제들로 조정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마련이다. - P72

디지털 이미지의 근저에 있는 모든 집계 계산 연산은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가 "아날로그의 우월성"
이라고 언급했던 맥락에서,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만일 1과 0이 인간 감각에 있어서친숙하고 전통적인 관습을 전하는 이미지와 합쳐지지 않았다면, 디지털 혁명이 그처럼추진력을 갖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미지에 관한 한, 이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움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디지털 이미지를 그것을 진행시킨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분법적인 역사로는 잘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 중 하나로, 디지털이라는 관념이 모호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넬슨 굿맨 Nelson Goodman은 디지털 코드를 만드는 것은 숫자나 계산이 아니라 서로 차별화되며 한정된 양의 특징들이나 요소들의 쓰임이라고 논의했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알파벳은 디지털이다.

모자이크 타일은신문 이미지의 망점benday dots이 그렇듯이 디지털 매체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만약 디지털화가 숫자들을 사용하는 체계, 구체적으로 컴퓨터 프로세스를 이루는 이진법 체계로만 제한된다면, 동시대 디지털 이미지화 과정의 어떤 특수성은 식별 될 수 있을 것이다. 마크 핸슨 Mark Hansen 은 마노비치와 반대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미지는 단순히 사용자들에게 동시대 물질 문화의 ‘인포스케이프(infoscape)‘를 조작하는 도구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 그보다 ‘이미지‘는 스스로 과정이 되고, 말하자면 일종의 몸의 활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특권적인 기술적 형식(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포함하여)에서 실례를 찾기보다는 이제는 이미지가정보를 지각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과 함께 몸이 정보에 형태를 부여하거나 혹은 정보를 형성(in-forms) 하면서 다름 아닌 과정을 확정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요컨대, 그러한 이미지는 더 이상 외형의 층위로 제한될 수 없으며, 그보다는 정보가 체현된 경험을 통해 지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전체 프로세스를 포함하도록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디지털 이미지로 부르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Hansen2004, p.10)


나는 술어들의 시제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이 문장에 동의한다. 이미지의 경우 언제나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지만, 그러한 상호 연결은 이진법적 전산화 속 디지털 이미지의 전개로 인해 이제야 분명해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진이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내고 시각적 현실, 즉 발터 벤야민의 표현에서의 "시각적 무의식"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리고 영화가 인간의 시각적 경험에 대한 새로운 분석과 역사적 변형 둘 다를 생성해내듯이, 디지털 이미지화는 우리가 항상 그곳에 있다고 인식하는 지각적 인지 세계의또 다른 층위를 노출시킬지도 모른다. - P73

우리는 가장 고풍스러운 이미지는 언제나 "몸의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된 어떤 과정"을 수반해 왔음을 아는데, 그 과정은 항상 정보에형태를 제공해 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디지털 이미지화의 발명 덕택에 그것을 새로운방식으로 이해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의 상황은 아마도, 예술가들은 깊이와 단축법, 그리고 투시법의 일종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했던 알베르티Alberti의상황과 흡사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회화론Della Pittura」은 이러한 실천들을 체계적 수학적 분석과 의외의 추정과 더불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새로운 기술 매체는 이미지의 질적인 측면은 물론이고 그것의 생산과 배포, 소비에 명백히 기여한다. 마셜 맥루한이 관찰한 것처럼, 예술가들은 종종 새로운 미디어의가능성과 더불어 실험의 최전선에 있으며, 사진과 영화처럼 태생적으로 예술적인 표현에 적대적으로 여겨져 왔던 초기 미디어 혁신은 이제 가장 중요한 예술적 미디어로서 확고히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미디어 혁신은 다른 요소들에 의해서도 이끌려 왔는데, 이를 테면 기술 과학적 연구, 이윤 추구, 그리고 전쟁과 같은 긴급한 상황이 그것이다.

만약 폴 비릴리오 Paul Virilio나 프리드리히 키틀러 같은 연구자들이 옳다면, 폭격기의 조종사들이 안개 속에서 ‘계기計器, blind‘ 비행을 할 수 있도록 발전된 유도 장치를 고려하지않고서는 스테레오 음향을, 그리고 기관총에서 시작된 진화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서는영화 카메라를, 또는 군사용 통신에서의 그 기원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인터넷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이들 발명의 전통적인 궤적, 즉 감각의 1차성’, 아날로그 체험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을 인식하게 된다. 폭격기 조종사의 스테레오 헤드폰은 현실적인 음향 공간의 이미지를 매개하는 수단으로서 콘서트 홀 내 오케스트라 사운드라는 그들의 문화적 천직을 찾아낸다.

기관총의 연발은 한데 모여 움직이는 신체의 운동 이미지‘를(혹은 크리스 마르케Chris Marker의 고전 영화 「라제테 La Jetee 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정지 이미지들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신체의 시간 이미지’를) 형성하는 사진들이 된다. 인터넷은 우편 체계, 텔레비전,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화, 신문, 잡지, 게시판, 광고, 은행 거래, 그리고 잡담을 통합하는 일종의 메타 매체가 된다.

이미지는 그 모두를 기록하기는 불가능할 정도로 매우 빠르게 전이되고 진화되면서이들 새로운 미디어 속에서 계속 생겨나고 순환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 꼭 이미지나 감각적 1차성, 닮음, 또는 아날로그 코드를 낡은 유산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런 성질들은 이미지가 얼마나 계산 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것이 되든지 간에, 특유의 기이하고 모호한 속성, 즉 처음부터그들을 매혹과 불안의 대상으로 만들어온 속성을 계속해서 이어 갈 것이다. 우리는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지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뭘 원하는지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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