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의 차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난뱅이라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졸부라고 욕설을 퍼부어댔다"고 하니까, 말 그대로 중산층이다. - P167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발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틀렸다.
*그 두 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유혹하는, 무섭고 수수께끼 같는 물건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소나 쓰러진 발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 P167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세계인가! 바야흐로 이 **두 세계가 *어떻게 **맞닿아 있고, 어떻게 **교차하며 그래서 어떤 **사건들을 빚어낼는지 기대되지는가?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었는지! 예를 들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거실 출입문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매끈하게 펴진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데, 그럴 때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들, **밝음과 올바름에 **속했다. - P167
소위 *교양소설에서 주인공은 진정한 **자기되기의 과정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이 아닌 것을 경험해야 한다.
노발리스의 말을 빌면, 거기서 *근본적인 **타자성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면 *경험이란 단지 *허울에 불과하게 된다. - P168
전혜린은 "데미안은 하나의 *이름, 하나의 *개념, 하나의 *이데아이다. 그러나 어떤 현실의 인간보다도 더 살아 있고 더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무엇이다. - P168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 크게 고무되었지만 *종의 진화라는 관점, 곧 하나의 종으로서 *다수의 인간 무리가 오랜 세월 걸쳐 아무런 **목표점 없이 *진화한다는 다윈의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진화는 **선택된 개인의 진화였고 그 목표는 인간의 **자기 극복으로서의 **초인(위버멘쉬)이어야 했다. - P170
*낙타란 *짐을 지는 *정신이다.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 총총히 사막으로 들어간다. 낙타는 **"너는 해야 한다"는 *주인의 *명령에 **순응하는 정신이다. - P171
반면에 *사자는 **"나는 하고자 한다"라고 말하는 정신이다. 비록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지는 *못하지만 사자는 그러한 *창조를 위한 **자유는 쟁취해낸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아이. **어린아이는 *순진함이자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이자 *놀이이며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여기서 니체는 *신성한 긍정이야말로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긍정인가? **운명에 대한 긍정이고 **영원회귀에 대한 **긍정이다. - P171
역설적인 일이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면서 동시에 가장 난해한 책이다. 그 난해함은 니체가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부제를 통해서 스스로 예견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나 초인 사상과 함께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구성하는 영원회귀 사상은 많은 독자를 당혹스럽게만들기에 충분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차라투스트라 자신에게도 수수께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3부의 두 번째 장인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중력의 영靈인 *난쟁이가 **"진리는 모두 곡선이며 시간 그 자체는 *원을 이루고 있다"는 *순환론적 시간관을 먼저 들먹이자 그가 너무 쉽게 생각한다고 화를 낸다.
*난쟁이는 그런 시간의 순환이 함축하는 *영원회귀의 심오한 의미에 대해서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이미 *존재했었으며, 이제 또 *시간의 *오솔길을 달려가서 *다시금 *영원히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P171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다섯번째 복음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이라면, 차라투스트라의 복음은 *초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에게선 *영원회귀가 아닐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에 이르는 문이라면, *영원회귀에 대한 *긍정은 *초인으로 넘어가기 위한 *문턱이다. - P173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영원회귀의 삶이 너무도 무거운 삶이라면, 단 한 번의 삶은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살이다.
짐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지상에 더 가까워지면서 생생한 현실감을 갖게 될 테지만, 반면에 짐이 전혀 없다면 우리의 존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지면서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쿤데라는 묻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무거움, 아니면 가벼움?" - P179
반대로 인생의 매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영원성에 못 박힌 형국이 된다.
더불어 우리는 행동 하나하나는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짐ㄹ어지게 될 것이다.
영원회귀의 삶이 너무도 무거운 삶이라면, 단 한 번의 삶은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삶이다. - P180
마치 **아무런 **리허설 없이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우리는 **썬택해야만 한다. - P181
강박적인 여성 편력에 사로잡힌 바람둥이를 쿤데라는 *여자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면서 매번 *실망하는 **’서정시적’ 유형과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언제나 만족하는 **’서사시적’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토마스는 이 가운데 후자에 속한다. - P182
돈 주앙 토마스는 한편으로 테레사만을 생각하는 트리스탄이기도 하다.
*어려운 결단의 표현이기도 한 *"그래야만 한다"는 여성 편력 때문에 자신을 떠난 테레사에게 다시 돌아가기로 한 그의 결단을 대변해준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기로 한 결단이기도 하다. 이러한 결단과 함게 토마스는 *가벼움의 세계에서 *무거움과 *필연성의 세계로 돌아온다. - P183
이렇듯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진동하는 토마스의 삶은 "한 번뿐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와 "그래야만 한다" 사이에 걸쳐 있는 삶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 옳은가? 오직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러한 가치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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