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1945>

/ (해제)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하여, 이만열


사진은 대부분 외형을 가진 실체를 순간적으로 포착한것이다. 한순간의 실체를 드러내려고 한 것이지만, 그것은 그 순간 속에 **응축된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다.

*말과 글로 표현되지 않은, 수많은 자기 이야기들을 갖고있는 것이다.

*포착 순간의 공간적 상황 외에도, 이해하기에 따라서는 *그 앞뒤의 *역사적 상황도 풀어낼 수 있다. 공간만이 아니라 그 공간이 형성되기까지의 시간도 그 속에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진 한 장은 *수많은 글자와 *문장으로 만든 책자보다 *더 많은 사실을 이야기할때가 있다. - P8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것은 사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활동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임시의정원은 오늘날의 **국회와 같은 기능을 맡아 *임시정부가 *법적 뒷받침 속에 기능할 수 있도록 했고, **임시정부는 오늘날 **행정부와 같아 임시의정원에서 제정한 법률에 따라 그 기능을 수행했다.

*어떤 때는 구성상으로 명확하게 구분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임시의정원 의원이 *임시정부 *행정직을 맡기도 하여 그 *구분이 애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립 초기와 *마지막 1940년대에는 그 양자가 *명칭뿐아니라 *활동에서도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 P9

대한민국은 **제헌 헌법 전문에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하였고,

**현행 헌법 전문에도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밝힘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위상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조선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진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에 나타난 **자주독립 이념을 기반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민국‘을 표방하면서 수립된 **독립운동의 **총지도 기관이었다.

임시정부는 **27년간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긴 세월 동안 **풍찬노숙하면서 국권 회복과 항일 전선을 이끌었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

*1392년 창건 이래 숱한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져 오던 조선조는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 포기와 함께 사라졌다.

**519년간이나 지속되었던 조선조는 그 말기에 **민권民權을 신장시켜 *국권權을 회복할 기회가 있었으나 끝내 비운을 맞았다.

**한말 국권을 수호하려는 **민중의 자각이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으로 나타났으나, 제국주의 일본과 그 배후 세력은 한국민들의 이 같은 끈질긴 저항을 압살하고 끝내 한반도를 강점했다.

강점 초기 한국인들의 국권회복운동은 국내외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조직은 *와해되었지만, 국내는 물론 *만주와 *연해주에서 *국권회복운동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강점 초기의 **국권회복운동은 *조선왕조를 회복하려는 **복벽 운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복벽 운동은 *구왕조를 회복하고 *구질서를 온존시키려는 것이었다. *반상의 차별을 그대로 두겠다는 것은 **구시대의 혈통 신분제를 그대로 두겠다는 것이고, 따라서 **민중이 계속 억압과 수탈을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같은 **복벽 운동은 한국인들의 **전폭적이고 **자발적인 국권회복운동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 P10

**국권회복운동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국민주권론을 공론화한 **대동단결선언‘이었다.

**1917년 7월 신규식 · 박은식 · 신채호 · 조소앙 · 신석우 등 *14명의 이름으로 발표된 이 선언은 *주권 행사의 권리와 의무가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 주권론을 주장하면서 **‘정부 수립 의지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선언은 **"우리 한국은 한인韓人의 한이요, 비한인韓人의 한이 아니다. 한인 간의 **주권 수수授受는 역사상의 불문법이요, *비한인에게 *주권 양여與는 *근본적으로 **무효이다. 경술년 *융희 황제의 주권 포기는 우리 국민에 대한 **묵시적 선위禪位이다"라고 하여 국민 주권론과 주권 양여론을 주창하였다.

이선언은 **한국의 주권이 **한국인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권은 **순종純宗으로부터 **일반 국민에게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의 한반도 강점이 무효라는것을 선언한 셈이다.

‘대동단결선언‘에서 주장한 국민 주권론은 **신한청년당활동과 **3·1 독립선언을 거쳐 **1919년 4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현실화되었다.

*3·1 운동을 통해 *독립을 선언하면서 한민족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설립하려고 했다. 이는 *3·1운동 민족 지도자들의재판 진술에서도 나타났다. *독립을 선언하였으니 *국가를 세워야 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으로 나타났고, 이 국가를 운용하기 위해 정부를 세워야 했는데 *이것이 *‘임시정부라는 것이었다. - P11

**임시정부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정부‘, 그리고 *서울에 세워진 **한성정부‘ 등 **세 갈래로 나타났다.

그중 **상하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한 **13도 대표 **29인이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모여 ‘임시의정원을 설립한 뒤 그 이튿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나라를 세우고 *10개조로 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해 발표했다.

**임시헌장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이었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헌법 제1조를 민주 공화제‘로 못박은 민주국가가 건립된 것이다.

이는 곧 *종래의 복벽적 독립운동이 *민주적 독립국가 건설 운동으로 전환한 결실이며, **한민족 최초의 민주국가가 건설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을 운영하려는 임시정부가 세 군데나 서게 되어 혼선을 줄 *우려가 없지 않았다. 1919년 5월, 상하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 임명된 *안창호는 상하이에 도착한 뒤 이 *세 정부를 *통합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한성정부의 정통을 잇고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하면서 *세 정부를 아우르는 **‘통합 임시정부가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재출범했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정부였다. 통합 임시정부는 국내의 *비밀 행정조직망인 *연통제와 *임시정부 통신 기관인 *교통국을 설치하고 *애국공채를 발행하여 *국민 의연금을 모금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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