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레비스트로스와 끝나지 않는 증여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이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5년 동안 프랑스 사상계에 군림해온 *실존주의에 실질적인 *사망선고를 내리게 됩니다.

언어학을 모델로 삼아 ‘미개사회‘의 현지조사를 자료로 활용하는 문화인류학이라는 매우 비정서적인 학문이 *마르크스주의와 *하이데거 존재론으로 완전 무장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분쇄하는 것을 보면서 동시대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을 기해 프랑스 지식인들은 **‘의식‘이나 ‘주체‘에 대해 말하기를 그치고 **‘규칙‘과 ‘구조‘에 대해 말하게 되었습니다. 명실상부한 ‘구조주의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 P153

‘실존한다 ex-sistere‘라는 동사는 말의 뜻만 보면 *‘바깥에 선다‘라는 의미입니다.

자기존립의 근거가 되는 발판을 *‘자기의 내부‘가 아니라 ‘자기의 외부‘에 두는 것이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이 점만 보면 ‘인간은 생산=노동을 통해서 만들어낸 것을 매개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라는 헤겔/마르크스주의와 기본적인 틀이 같습니다.

‘실존‘이라는 학술용어는 일단 ‘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실마리로서,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 P154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은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로서,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초적인 이해에 대해서는 구조주의자도 별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양자가 대립하는 것은 논쟁이 **‘주체‘나 ‘역사‘와 관계될 때입니다.

*참여 engagement(앙가주망, 원래의 뜻은 *‘구속되는 것‘)라는 사태입니다. 내가 처해 있는 *역사적인 상황은 중립적이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으며 *결단을 요구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가 어떤 결단을 내리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백 퍼센트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단편적인 자료나 직관에 의지해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답을 모르는 채로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에 판단이 틀릴 수도 있지만 *‘잘 모르는 상태에서 결단을 내린 것‘이라는 이유를 대며 *책임을 *회피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다소 슬픈 결단이 ‘참여하다‘ engager라고 불립니다.




- P156

사르트르의 *‘참여하는 주체‘는 주어진 상황에 과감하게 몸을 던지고 **주관적인 판단을 토대로 자기가 내린 *판단의 책임을 숙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수용을 통해서 *‘그러한 결단을 내리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자기의 **본질을 구축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의 논의에서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는 불화를 일으킵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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