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는 곧 질병에 대한 역사이다>

/ 황상익


전성기를 구가하던 도시국가 아테네와 로마 제국 멸망의 중요한 원인으로 많은 역사들이 역병의 만연을 꼽고 있다.

14세기의 흑사병 창궐은 중세 유럽을 끝장낸 재앙이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를 연 중요한 동인이기도 하였다.

질병은 인간의 **사회적 의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1980년대부터 에이즈 대유행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낳고 있으며, 동성애자에 대한 부당한 핍박 및 성과 관련한 인간의 의식과 태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 P14

인류의 역사는 곧 질병의 역사라 했지만, 질병은 생명체의 탄생과 함게 나타난 것으로 인류보다 몇백 배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 P114

"인간의 질병은 사회와 문명이 만든다. 그리고 질병은 다시 인간의 역사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라는 논지가 이 책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 P14

질병, 특히 **대유행병은 개개인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해왔고, *문명에 넓고도 뿌리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 - P15

질병은 의심할 바 없이 생물학적 현상이다. *발열은 기도에 침입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때문에 일어나고, 간암은 간조직에 생겨난 암세포들이 비정상적으로 증식한 것이다. 

그것뿐이라면 질병은 *바이러스와 세포 등의 문제, 즉 *생물학적인 것일 뿐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아서 이 질병이라는 단어 속에는 *넓고도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이러스나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세포일지 모른다. 

하지만 **병원체는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져, 어디로 어떻게 전해져서 **질병을 일으키는가? 

조직에 장해를 일으키는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어떠한 물질이 어떤 과정에서 발암인자로 작용하는가? 또 그 물질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가? 

이렇듯 어떤 *직접적 원인도 *근본적으로 천착해보면, 사회와 문명을 함께 고찰할 때에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기수은 중독, 기관지 천식과 같은 환경성 질병, 교통사고, 신경증과 같이 *문명병이라고 부르는 질환, 그리고 *직업병 등은 문명이 낳은 질병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결핵이나 성병과 같은 만성감염병, 콜레라나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도 다만 *병원균이 있기 때문에 저절로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병원균을 전파, 증식시키는 **조건이 더불어 있기 때문에 질병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한 조건에는 *자연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것, 곧 **문명적이고 사회적인 조건이다.
- P16

*문명의 교류는 *질병의 교류기도 하다. 사람과 물건이 오가면서 질병도 전해진다. 

경제와 정치만 질병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상도 질병을 만든다. 

**정신병은 시대사조의 굴절된 투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약물피해나 의원병(醫原病) 등, *의학 자체가 질병을 만들기도 한다. 

- P17

또한 거꾸로 질병은 문명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움직인다. 

질병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을 멸망케 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한 가지였다. 

*중세말 유럽을 덮친 흑사병은 근대 사회를 여는진통이 되었고, 
*발진티푸스는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퇴한 결정적 원인이었다.

아무리 파괴력이 큰 무기라도 국가와 민족 그리고 문명에 미친 영향력으로 볼 때, 발진티푸스를 매개하고 페스트를 전파하는 벼룩에 비하면 보잘것 없었다. 

어떤 문명은 *말라리아 원충 때문에 쇠퇴했고, 어떤 부대는 맨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작은 *콜레라균이나 *이질균 때문에 궤멸했다. *결핵과 매독이 없었더라면 근대 문명의 색조는 크게 달랐을지 모른다.

**문명이 질병을 만들고, 또한 질병이 문명을 만들어왔다. 이 두 가지 과정이 서로 겹쳐져서 나타나며, 역사를 통해 그러한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질병 자체에는 뚜렷한 역사적 성격이있다. 질병의 역사적 법칙성이라고 일컬을 만한 것도 있을지 모른다.

- P17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의 생물화석에서도 질병의 자취가 보인다.

중생대에 살았던 공룡의 화석에서 종양의 흔적이 발견된다. 기생출병에 걸린 조개류, 뇌막염에 걸린 공룡도 알려져 있다.

또한 여러 가지 동물의 전염병이 사람에게 전염된다. 그것이 이윽고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파되는 질병으로 변하기도 한다. - P19

전염병 이외의 질병들도 매우 오래되었는데, 화석인류에서도 현대인에게서 볼 수 있는 여러 질병이 나타난다. 이러한 화석이나 발굴된 사람뼈 등의 자료로부터 원시 시대와 고대 시대의 질병을 연구하는 학문을 고병리학(古病理學)이라고 한다.

고병리학의 성과에 따르면,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의 미라로부터 밝혀진 질병으로 **폐렴, 규폐증, 늑막염, 신장결석, 담석, 간경변, 중이염, 충수염, 축농증, 임질, 홍역, 한센병, 말라리아, 결핵, 충치,
눈병, 기생충병에서 *암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질병들이 많이 있다. 

또한 부조나 벽화로부터도 고대인의 질병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기원전 1500년 무렵의 이집트 부조는 *소아마비가 그 당시 이집트에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인간이 자연생활에서 문명생활로 접어든 뒤에는 질병도 그때까지의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만든 문명과 사회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겪어왔다.

 인간생활의 기본인 의식주는 무엇보다도 질병과 오랜 관련을 가지고 있다. 특히 기아와 과식은 질병의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아와 과식은 말할 것도 없이 문명과 사회의 소산이다.

- P19


기아, 곧 영양부족 때문에 유행병이나 영양장애가 일어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과식도 이른바 영양병을 일으킨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네릿사라는 시녀는 지혜롭게도 "나머지 음식까지도 다 먹으면 오히려 굶주린 사람과 마찬가지고 결국은 병이 날 거예요"라고 말한다.

*근대 유럽에 유행병처럼 발생했던 제왕병, 즉 *통풍은 *사치스런 식사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식량사정의 악화로 심장혈관병이 감소했다가 전쟁 뒤 다시 사정이 나아지자 이러한 질병이 증가했다. - P20

문명과의 접촉이 새로운 질병을 만들어낸 경우는 너무나 많다.

*16~18세기에 아메리카 원주민과 폴리네시아인 그리고 아프리카원주민들은 *유럽의 침략자들이 가져온 *두창, 홍역, 인플루엔자, 결핵 등으로 거의 궤멸당했다. 

슈바이처가 적도 아프리카의 원시림에서 맞서 싸웠던 질병 가운데 사실은 유럽인들이 가져다준 것들이 많았다.

**전쟁과 빈곤과 질병은 인간이 짊어진 *세 가지 원죄라는 말이 있다. 

그것들은 흔히 역사 속에서 겹쳐 나타나 인간들을 더 큰 불행에 빠뜨려왔다. 

전쟁, 빈곤, 질병이 함께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그것들끼리 필연적인 관련을 갖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빈곤과 질병이 긴밀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질병의 계급성이라는 문제도 생겨났다. 이와 비슷하게 질병의 민족성도 논의해볼만할 것이다.
- P20

**질병의 본질과 원인을 어떻게 생가하는가, 즉 *질병관에 따라 치료법이 좌우된다. 

예컨대 질병을 *신의 처벌로 보는 질병관에서는 *신에게 저지른 죄를 회개하는 것이 적절한 치료법이 될 것이다. *귀신이 들어 병이 생긴다고 여기면 몸에 들어온 귀신을 내쫓는 것이 타당한 처방이 될 것이다. 

이렇듯 *질병관은 어떠한 의학체계에서든 가장 중심적인 구실을 한다. 현대의 과학적 질병관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정립되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현대인이 보기에는 유치하고 황당하기조차 할지 모르지만 *선사시대의 원시인들도 나름대로 질병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삼라만상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으며 *세상만사가 *정령들의 작용으로 생긴다고 생각했다. 질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령이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들은 정령이 뱃속에 들어와 배탈을 일으키고 머리 속에 들어와 두통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질병과 질병의 원인을 해석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치료법은 *질병관의 논리적 귀결이다.

우리 몸에 들어와 말썽을 일으키는 정령을 내쫓는 것이 *당연하고 타당한 치료법일 것이었으며 실제로 원시인들은 그렇게 행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대의 고등종교와는 차이가 있지만 기도를 드리고무당굿과 비슷한 행위를 했다.
- P21

선사시대 두개골들에서 종종 구멍이 나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선사시대인들은 왜 머리뼈에 구멍을 뚫었을까?
머리 속에 들어와 두통과 같은 탈을 일으키는 정령이 쉽게 빠져나가도록 배출구를 만들어준 행위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서양에서는 18세기 말까지 그러한 치료법이 사용된 것을 보아 치료효과를 상당히 믿었던 것 같다. - P22

인류가 선사시대에서 벗어나 문명을 이루고 살게 된 뒤에도 초자연적인 세계관은 여전했다. 

*선사시대의 정령 대신 *고등종교의 신들이 탄생하여 문명의 발전을 반영했지만 *신의 뜻으로 온갖 세상일이결정된다는 점에서는 선사시대의 연장이었다. 

질병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올림푸스의 여러 신이나 기독교의 야훼가 질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치유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종교적인 질병관은 고대와 중세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고대에 들어서면서 합리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질병관도 생겨났다. 

그러한 질병관은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의학과 고대 중국의 『황제내경』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이 신의 뜻이 아니라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생긴다고 했으며 『황제내경』의 저자도 비슷한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 P22

히포크레테스 의학,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로마의 갈레노스 의학과 그 질병관은 고대와 중세의 정통의학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흔히 서양의학이라고 부르는 과학적 현대의학은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고대 서양의학을 극복하면서 탄생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와 중세의 정통적인 질병관은, 선사와는 달리, 대체로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한의학에서는 중국의 한나라 무렵부터 음양의 조화 여부에 의해 건강과 병적 상태가 좌우된다는 이론이 성립, 발달하여 아직도 큰 권위를 누리고 있다.

인도에서는 베다 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사대부조설과 삼고설이, 고대와 중세의 유렵과 중동에서는 고대 그리스에 연원을 두는 **사체액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질병관들은 구체적인 모습에는 차이가 있지만, **음양 또는 **네 가지 체액 사이에 **조화와 균현이 유지되는 경우에는 건강이 유지되지만 그것이 깨지면 병적인 상태가 된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공동적이다. - P23

**제각각 나름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여러 질병이 신체의 어떤 특정한 부위에 국소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현대 의학의 **본체론적인 질병관과는 달리,

전통적인 질병관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건강과 병적인 상태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스펙트럼 위에 존재하는 전인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에 따라 현대 의학에서는 전체로서의 인간보다는 인간의 몸속에 실제로 **‘자리잡고‘ 있다고 여기는 질병이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다.

반변에 한의학이나 고대와 중세의 서양의학 등에서는 개개 질병보다는 인간 자체가 의학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 P23

*질병관의 논리적 귀결인 치료에서도 *한의학과 *현대 의학은 질병관만큼이나 커다란 차이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양쪽 모두 *고식적인 치료보다는 **근본적인 완치를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그 뜻은 사뭇 다르다.

 *현대 의학에서는 질병 자체나 그 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을 *치료라고 한다. 

예를 들자면 항결핵제로 결핵균을 죽이거나 결핵에 걸린 폐 부위를 제거하는 것이 근본적인 치료다. 인체가 결핵(균)을 이겨낼 힘을 갖도록 *영양제를 주사하거나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게 하는 것도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며 고식적인 방법이다.

그에 반해 한의학에서는 현대 의학적 치료법을 오히려 고식적이며 *지엽말단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현대 의학이 발견한 결핵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핵이라는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우리 **몸의 조화가 무너진 것이 *건강을 잃게 된 원인이므로 그 *조화를 되찾는 길이 *근본적인 치료다. 몸을 *보(補)해야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200년 전까지 이어졌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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