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은 말할 것도 없고 에라스무스가 그런 주장을 어떻게 여겼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루터는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다. 그가 그런 과감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데는 *서임권 투쟁까지, 심지어 야만 시대까지 거슬러가는 *독일과 교황청의 *해묵은 반목이 있었다. 

1508년 루터가 로마로 돌아가기도 전에 독일 의회는독일에서 면죄부를 판매한 *대금이 교황청으로 전달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가결했다. 

1518년 *아우크스부르크 의회는 그리스도교권의 ‘진정한 적이 투르크가 아니라 로마에 있는 **‘지옥문의 개들‘이라고 결의했다. 

원칙적으로 독일인들의 지도자는 신성로마황제인 카를 5세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야망을 좇아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부유해진 에스파냐에 관심이 더 컸다. 그래서 그는 가톨릭을 고집하고 "로마를 자신의 닻으로 삼았다." 

여러 모로 루터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비판이 그리스도교권 전역의 교회에 해당한다면 우선 독일부터 개혁하는 게 훨씬 쉬울 터였다. 

"그는 세계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독일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이 점은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교도 귀족들에게 보내는 연설An den Christiichen Adei deutscher Nation」(1520)에 명확히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거의 *혁명적인 어조로 *성직자가 ‘별개의 영적 신분‘이라는 믿음을 부인하고,
독일 귀족들에게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 성직자들의 토지를 *몰수하라고 촉구했다.

이미 그런 행동에 나선 기사와 군주도 많았다. 이리하여 **종교개혁으로 시작한 흐름은 **국가적 맥락에서 ***정치·경제적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과 결합되었다. 
- P667

22. 북상하는 역사: 프로테스탄티즘의 지적 영향


"베드로와 바울은 가난하게 살았지만 15~16세기의 교황들은 로마 황제처럼 살았다." 

1502년 의회의 추산에 따르면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모든 돈의 **75퍼센트를 소유했다. 

20년 뒤 독일의 뉘른베르크 의회는 교회가 독일의 모든 부 가운데 **5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계산했다. 

그런 막대한 재산은 *특권을 낳았다. 
잉글랜드의 사제들은 걸핏하면 여자들에게 고해실에 들어가라고 권했다. 죄를 용서받는 대가는 *섹스였다. 

윌리엄 맨체스터 William Manchester는 잉글랜드의 노퍽, 립턴, 램버스에서 *성범죄로 기소된 사람의 23퍼센트가 인구의 2퍼센트도 안 되는 *성직자라는 통계를 인용한다. 

세인트올번스 대수도원장은 *"남색, 고리대금, 공금 횡령, 수도원 경내에서 공개적이고 지속적으로 매춘부, 정부와 함께 산 죄로 고발을 당했다. 

가장 만연한 부패는 *면죄부의 판매였다. 이미 1450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총장인 토머스 개스코인Thomas Gascoigne은 이렇게 개탄했다. 

"요즘의 죄인들은 거리낌 없이 말한다. ‘하느님의 면전에서 얼마든지 악을 저질러도 상관없다. 4~6페니만 내면 교황이 발행한 면죄부를 사서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받을 수 있으니까." 그의 이야기는 과장이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면죄부의 값은 ‘2페니, 때로는 맥주나 포도주 한 모금‘이었다. 

"매춘부를 사는 값이나 성관계를 하는 값이면 면죄부를 살 수있었다." - P663


변화의 발단은 *1476년이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는 **면죄부가 "연옥에서 고통을겪는 영혼들에게도 효력이 있다고 선언했다. 

윌리엄 맨체스터가 말한 "하늘을 빙자한 술수"는 즉각 대성공을 거두었다. **농부들은 자신과 가족이 굶어죽어가는데도 **죽은 친척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면죄부를 샀다. 

‘여기 통행증이 있소이다. 인간의 영혼을 기쁨가득한 천상 낙원으로 안내해줄 통행증이오.‘ 

**‘동전이 대접 안에 떨이지는 것과 동시에 영혼이 연옥에서 훨훨 날아천국으로 곧장 간다오."

 더구나 테첼은 사람들에게 *장차 저지르게 될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약속하는 편지를 썼다.


*16세기 초에 북유럽과 남유럽은 교회 설교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다. **북유럽 설교는 *회중(참회자)에게 초점을 맞춘 반면, **남유럽 설교는 *사제를 중심으로 하며 죄를 용서하는 사제의 중재적 역할을 강조했다.
- P664

1510년 -르네상스의 절정으로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모두 활동하던 시기-에 루터는 로마에 갔다가 큰충격을 받았다. 

회화와 조각의 걸작과 위대한 종교 기념물을 보고는 감탄을 금치못했으나 *사제와 추기경의 행동에는 치를 떨었다. 특히 그들이 지닌 특권의 토대인 *예배 절차마저 대충대충 처리하는 데는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512년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그는 몇 년 동안 조용히 지냈다. 로마에서 겪은 경험이 워낙 충격적이었고 *인문주의자들의 *세속적인 면모는 가톨릭교회의 *부패한 냉소주의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성서로 돌아가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 천착했다. 

루터의 비난은 테첼만이 아니라 그 배후의 바티칸, 면죄부로 대표되는 신학 전체를 향하고 있었다.  - P665

이론적으로 면죄부는 세계에 **‘잉여 은총‘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수와 그 이후의 성인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한 덕분에 *현세에는 *여분의 은총이있다. **면죄부를 구매하는 사람은 바로 그 잉여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은총을 감자처럼 거래할 수 있다는 관념에 반대했다. 더구나 그 관념은 면죄부를 구매한다고 해도 죄 자체가 면제되는 게 아니라 **죄에 대한 참회만이 면제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면죄부 판매는 큰 잘못이고 **신학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루터의 두 번째 혁신도 이 점과 관련된다. 진정으로 죄를 용서받으려면 **‘참된 내적 참회‘, 회개의 12세기 관념으로 돌아가야 했다. **교황은 모든 죄가 완전히 용서된다고 주장했지만 루터는 **회개가 필수 조건이라고 맞섰다. 

다음 단계 역시 첫 번째처럼 짧았으나 더 중요했다. **회개가 없이는 면죄부도 소용이 없다면, **‘교황의 자질구레한 문서‘ 따위와 무관하게 회개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의 신앙에 의지해 구원을 얻고 회개해야 한다면, *성찬식은 필요가 없고 *교회 조직으로 신도들을 관리할 필요도 없다. 가톨릭교회의 존립 근기인 **중재의 관념은 결정타를 맞았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골간을 이론 간단한 신학적 관념이다. 그래서 다이어메이드매컬로크는 종교개혁을 ‘우연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후에 일어난 사터에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다른 측면이 있었다. 

**인문주의자들은 루터가 교회의 *권력 남용을 비난할 때 그를 지지했다. 에라스무스는 교리와 스콜라적 현학에 의존하기보다 신앙심과 그리스도교 미덕을 재도입하자는 루터의 주장에 찬성했다. 

그러나 루터가 교회의 근간 지체를 공격하면서 *교회법 책과 교황교서를 불태우자 그들은 지지를 *철회했다. 바로 여기에 **민족주의적 요소가 끼어들면서 중대한 결과를낳있다. 루터에게 등을 돌린 인문주의자들은 대부분 독일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논문과 기타 글들에서도 루터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교황이 도둑이나 살인자보다 별반 나을 게 없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성직자들에게 로마에 충성하지 말라면서 마인츠 대수도원장을 대표로 독일 교회를 세우자고 외쳤다. - P666

놀랄 만큼 짧은 기간에 그는 *칼(시민의 힘)로써 신앙을 지기려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여기에는 *기사들의 전쟁, *농민반란, *재세레파라는 세 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터진 새로운 사태에 대처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기사들의 전쟁은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라는 루터 자신의 호소가 초래한 직접적 결과였다. 1522년에 일어난 이 전쟁은 일단 실패했으나 독일의 정치 상황을 긴장 상태로 몰아갔다. 

3년 뒤인 1525년 *독일 귀족들의 가혹한 착취(그들은 *아메리카 은이 유입되면서 *인플레이션의 위기에 봉차해 있었다)에 더 이상 참시 못한 *농민들은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루터의 교리로 무장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불행히도 *반란 지도부는 *재세례파가 장악했다. 재세례파는 유아 세례를 반대하고 성인이 된 뒤 다시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였다. 유아는 신앙을 갖기에 너무 어리고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의 세례는 무효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재세례파는 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위계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오로지 *성서에 나온 신의 말씀에만 의지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실제로 대다수 재세례파는 더욱 *극단적인 자세를 취해 자신들이 성령과 직접 접촉하므로 *성서도 필요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고 곧 **묵시록적 ‘정화‘가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했다. 

20세기 사회학자 카를 민하임Karl Mannheim은 **‘천년왕국설chiliasm-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믿음-과 *농민반란의 동맹이 근대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계기로 *사회혁명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정치가 시작된다. **근대적 정치란 모든 일을 ‘위‘에서 통제한다는 **숙명론적 세계관과 달리 **세속적 목적의 성취에 모든 사회계층이 **의식적으로 관여한다는 의미다. 

만하임의 말이 옳든 그르든 이런 반응은 루터의 의도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또다시 우연의 혁명이다). 실제로 그는 농민들에게 반대하는 군주들을 지지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신앙과 정치가 **섞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교도는 *정당한 권력에 *복종해야 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는 *교회가 *국가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독일에서 루터의 사상은 **안과 밖을 *분리해 *안으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누리면서 *밖으로는 불가침한 *권위에 *복종하는 삶을 요구했다. 독일 사상의 이러한 **이원론은 루터의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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