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의 성공회 소속 데스먼드 음필로 투투 주교(Desmond Mpilo Tuto, 1931년~)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다. 1984년에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배부르게 먹이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먹을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구호단체들이 너무 조금 너무 늦게 내놓는것을 양철그릇에 받으려고 끝도 없이 길게 줄서서 지나가는 바싹 야윈 인간들의 모습을 매일 본다. 우리는 언제나 배우게 될까. 이 지구상의 인간들은 언제쯤이나 일어나 외치게 될까, 이제 충분하다고....
**인간이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한히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배우게 될까, 그리고 인간을 그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며, 이런 모독이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언제나 배우게 될로까?
다른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스스로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억압은 억압받는 사람보다 더 많지는 않더라도 그와 똑같이, 억압하는 사람의 인간성도 없애고 만다. 양쪽이 다 정말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 P158
/ 약 500년 전의 아프리카
1500년 무렵 아프리카 대륙에는 **5,000만 명 이하의 사람들이 살았다(오늘날에는 8억 5,000만 명 이상)
아프리카 문명에서 *노예는 각 가족의 일부였고 다시 해방될 가능성이 여럿 있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노예 매매가 아랍과 아프리카 상인들 그리고 자국민을 팔아 부자가 된 정치 지도자들의 협조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쓰라린 진실을 바라봐야만 한다.
아프리카에서 유럽 사람들끼리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5)는 *1884년 유럽 열강 지도자들을 베를린으로 소집하였다. 아프리카 대륙의 분할이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아프리카 민족들의 대표자들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베를린에서 이루어진 협약과 국경선은 그 다음 시기에 현실로 이루어졌다. 종족적인 연관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국경선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남은 셈이다.
**20세기 중반 무렵에야 확신에 찬 식민지 지배자들도 자기들이 식민지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사이 아프리카의 다양한 **저항 세력의 반대가 너무나 강해져서 식민지 정부를 유지하는 데 경비가 너무 비싸게 먹혔기 때문이다.
유럽 사람들이 물러나면서 마지막에 보인 태도는 대부분 그들이 아프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 보인 태도만큼이나 나빴다.
**유럽 사람들은 자주 가장 부패한 아프리카 정치가들이 권좌에 오르도록 도움을 주었다. 겉으로는 독립이라는 깃발을 내걸었지만, 유럽 열강이나 그사이 끼어든 미국과 소련이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꼭두각시 정권을 만드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일을 처리할‘ 능력이 얼마나 적은지 실컷 조롱하였다. (신제국주의 놀음)
- P103
*노예 제도의 종말은 아프리카에서 쟁취된 것이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노예 제도 폐지론자와 도망친 노예를 종교적인 입장에서 도와준 *퀘이커 교도, 그리고 *해외에서 궐기한 노예들에 의해 쟁취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와 산업 혁명‘을 통해 먼저 유럽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전 세계적으로 노예 제도가 의미를 잃었다. 노예 매매 사업이 그다지 *큰 이익을 남기지 않게 된 것이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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