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정신은 세상을 자기 자신의 넓이만큼만 넓게 볼 수 있습니다. 슬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오직 자기 가슴에 품은 슬픔의 깊이만큼만 깊게 세상을 응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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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의 근본성격을 말하기 위해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서 시작하는것이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시학』 (Peri Poetikes) 제6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 크기를 가진 고귀하고 완전한 행동의 모방으로서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의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완수한다."
비극은 **행동의 모방(minesis praxeos)입니다. 물론 그것은 아무 행동이나 모방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극이 모방하는 행동은 우선 **크기를 가진 행동이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번역에 따라서는 이 부분을 "일정한 크기를 가진" 행동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연극의 길이를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명백히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크기를 가진" 이라는 말이 모방을 꾸미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꾸미는 말인데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하는 *크기(megethos)라는 말 자체가 원칙적으로 결코 길이를 표현하는 말로 쓰이는 낱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 말은 호메로스에게서는 몸집의 크기, 즉 사람의 키를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길이라기보다는 도리어 높이에 관한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높이의 관념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와서는 **정신의 키와 높이 즉 정신의 크기와 위내암을 뜻하는 말이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수사학에서 문체의 숭고함그 뜻하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비극이 크기를 가진 행동을 모방한다는 것은 **위대한 행동을 모방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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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이란 인간의 행위를 모방하되, 아무 행위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탁월하고 고귀한 행위를 묘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모방하는 대상은 완전한 행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teleios이란 형용사는 처음에는 신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는 동물이 흠없이 온전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비극이 디오뉘소스를 찬미하는 축제에서 유래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모방하는 행위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이라 할 것입니다. 완전히 실현된 행위, 모든 열정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해 자기를 전개하여 그 극한에 도달하는 행위.
(...) 모든 슬픔이 다 위로받을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슬픔이 고통받을 가치가 잇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개의 경우 **우리의 슬픔이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비극의 위대함은 문학을 통해 슬픔에 대해 말하되, *문학에서 표현되는 슬픔을 오직 **정신의 크기와 위대함의 조건으로서만 허락한다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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