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권위와 확립과 이단

/ 대권과 대죄


**서기 1000년 이후 유럽 문명은 더 응집성 있게 조직되어 갔는데, 그것은 곧 ‘권위의 성립‘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국가와 교회가 확고하게 자기 정립을 해 나갔고, 그러한 흐름의 선두에 선 것은 교황청이었다.

소위 ‘교황혁명‘은 장기적으로 유럽 문명을 일신하고 재구성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교황청이 주도하여 실질적으로 세속 권력에서 벗어난 교회 조직이 정비되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세속 국가가 강화되는 데에 기준이 되고 모법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양측 모두 단단한 틀을 정비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은 다른 말로 **선과 악을 명료하게 규정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신학적/법학적으로 도그마가 만들어져 갔다. *선을 구현하는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확고히 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확고한 **선의 규정은 곧 악의 재정립을 의미한다. 지고의 권위를 위협하는 악은 *악마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 *악을 담당하는 주체로서 갈수록 *이단과 *마술이 부각되었다. 대권 혹은 주권을 위협하는 대죄에 대해 성속이 힘을 합쳐 척결한다는 맥락에서 악은 *새롭게 규명되었다. 그 과정은 역설적으로 교황과 황제 간 치열한 다툼으로 시작되었다.

교과서적 설명에 따르면 카노사 사건의 원인은 **서임권 투쟁Investiturecontrovery 이다. *서임권이란 주교나 수도원장 같은 교회 고위직을 임명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이 권리의 주인이 *교황이냐 황제냐, 즉 교회냐 세속 당국이냐를 놓고 다툰 것이 서임권 투쟁이다. 

하지만 서임권투쟁 때문에 카노사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표면적인 설명일 뿐, 이 사건의 원인과 결과, 의미는 훨씬 더 심층적인 데에 있다. 이 사건은 황제권과 교황권, 곧 **국가와 교회가 상호 어떤 관계를 이루며 발전하는가,
더 나아가서 **유럽 사회와 정치, 종교의 기본 틀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같은 중차대한 사항들이 결정되는 ***유럽 역사의 변곡점이었다.

카노사 사건 이전 시대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 보자. **중세 전반기前半期에 서임권은 교황도 황제도 아닌 **지방 귀족의 수중에있었다. 주교나 수도원장은 대개 *지방 대귀족 출신이기 십상이었다. 귀족 가문 내에서 장남이 작위와 재산을 차지하면 *차남 이하의 형제들은흔히 교회 고위직에서 커리어를 찾았다. 

부유한 대가문이 자신의 영지에 건립한 교회나 수도원은 사실상 자기 가문 부속 종교기관으로서, 다시 말하면 *개인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대토지가 붙어 있는 막대한 재산권을 남의 수중에 넘기지 않고 자기 가문이 온전히 소유하기를 바랐다.

이런 상황에서 주교나 수도원장 같은 고위 성직자들은 명목상 종교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명망 있는 귀족으로서, **결혼도 하고 축첩도 마다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첩을 거느린 부패한 성직자를 비난했지만, 사실 그것은 단순한 개인 비리가 아니라 당시의 정치/종교 상황에서 나온 *구조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이를 개선하려면 **성과 속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움직임이 10세기 후반 시작된 클뤼니, 플뢰리, 마르무티에 같은 **수도원 중심의 개혁운동이었다.

클뤼니 소도원 출신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가 이 세상의 질서을 틀을 새롭게 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1075년 <교황교서>를 발표한다. 많은 내용이 교황의 최고 권위와 권력을 나타낸다.

이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는 **교황의 최상위권 및 무오류성이라 할 수 있다. 교황은 황제를 폐위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인‘의 자격으로 세속 문제와 교회 문제를 다루는 ‘두 개의 검‘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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