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 글자>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죄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지었기 때문에 응당한 사회적 처벌을 받는 게 아니라 어떤 행위를 사회적으로 처벌하기 때문에 그게 죄라고 간주하는 거죠. 어떤 사회적인 규범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의 시작입니다.
식민지 건설 초기는 물론 매우 엄격한 청교도적 도덕관과 윤리의식이 강요되던 시기였습니다.
"새 식민지를 건설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인간의 덕성과 행복에 찬 어떤 **유토피아를 꿈꾸었는지 몰라도 으레 처녀지의 일부를 *묘지로, 또 다른 일부를 *감옥터로 떼어 두는 것이 실제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묘지란 죽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뜻하는 인간의 유한성 역시 유토피아와는 양립하기 어렵죠.
감옥이란 문명의 상징이기도 한데, 거기에 갇힌 죄수들은 문명사회에서 단죄를 받은 상태죠. 하지만 자연은 대단히 관대해서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조차도 환한 아름다움으로 다독거려주고 있는 것이죠.
(...) 이것은 징벌이면서 동시에 축복입니다. 그래서 양가적이에요. 어떤 점에서는 *인간의 율법이 신의 *심판보다 더 엄격한 셈이되죠. 신조차도 관대하게 축복하는 어떤 존재에 대해서 인간은 단죄하고 있으니까요.
헤스터와 펄 모녀는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생활을 합니다. 마치 ‘호모 사케르‘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공동체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 모녀는 그래서 중간적인, 이중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러한 이성적 탐구를 두고서 ‘도구적 이성‘이라고 비판하게 됩니다. 가치에 대한 물음을 배제하고 이성을 오직 도둑적 수단으로만 이용한 것이지 때문입니다.
/ 마음의 감옥에 갇힌다는 것
주홍글자는 간통 소설인 동시에 감옥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속에 두 가지 감옥이 있습니다. 헤스터를 징벌하는 눈에 보이는 감옥이 있고, 딤스데일이 갇혀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이 있죠.
헤스터는 감옥에서 빠져나오고, 딤스데일은 점점 자신을 옥죄어가며, 결국 죽어서야 죄의식, 즉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감옥에 두 가지 버전이 있는 셈이죠.
50-74쪽
<주홍글자>는 종종 안나 카레니나와 비교됩니다. 톨스토이의 과제는 *육체적 자아와 *정신적 자아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거였어요. 하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이 둘 사이의 조화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정신과 육체가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불행한 가정은 이게 조화를 이루지 않는 거예요.
안나와 브론스키도 불행해지는데, 둘의 관계가 사회적인 인정을 못 받을뿐더러 안나의 욕망이 통제를 벗어나기 때문이죠.
(...) 톨스토이는 육체적 자아를 완전히 부정하고 정신적 자아만을 선택한 것이죠. 미란 무엇일까요. 미는 원래 육체적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레빈으로 대변되는 *도덕적인 선을 지향점으로 삼게 된 이후에는 *예술 장르로서 *미를 추구하는 소설을 버립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끝냄과 동시에 소설을 버리고, 참회록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호손은 그와 다른 세계를 보여줍니다. 호손도 두 사람을 등장시키는데, 레빈 격의 딤스테일과 안나 격의 헤스터를 등장시켜 각기 다른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딤스데일 식 결말은 곧 톨스토이적 결말이고, 헤스터 식 결말은 톨스토이가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지 않은 길을 더 극단까지 간 소설가가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입니다. 로렌스는 <안나 카레니나>의 *도덕주의적인 결말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오히려 로렌스는 **육체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보게 돼요.
톨스토이 생각에는, 일단 욕망의 길로 빠져들게 되면 해피 엔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로렌스는 동의하지 않지요. 다른 방향으로 해피엔딩을 보여주고자 한 게 채털리 부인의 연인입니다. 로렌스 식 ‘성애의 유토피아‘를 보여주는 작품이죠.
호손은 모호하게도 그 두 가지 결말을 다 보여줍니다. 따져보자면 호손은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 쪽에 가까워요. <죄와 벌>처럼 변증법적인 과정을 보여줍니다. 앙드레 지드나 톨스토이는 *도덕이라는게 **‘좁은 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도덕적인 선의 길이라는 건 점점 좁아질 뿐입니다. 선은 악이 아니고, 악은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에서는 *선과 악이 *동일합니다. 서로 *대립물처럼 보이지만 그것의 *동일성을 보여주는 게 *헤겔 식 변증법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이런 논리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죄인‘들을 그리죠. 헤스터 프린도 말하자면 ‘위대한 죄인‘이에요.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이게 불가능합니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에서 구원을 보려고 했어요. ‘미란 넓은 것‘이라고 말했죠. 좁은 길이 아니라 너무 넓어서 문제인 세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입니다. 호손도 부분적으로는 그처럼 ‘넓은 길‘을 보여줍니다.
70-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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