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기 - 도강파와 잔류파>
/ 전후 반공체제 구축의 예광탄


이승만 정부가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대대적으로 부역자 색출작업을 벌였던 것은 전쟁 초기의 패전책임을 모면하고 제제유지를 위한 국가의 법적 권위를 확보한다는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인공 치하의 서울에 잔류할 수밖에 없었던 일차적 책임은 당연히 이승만 정부에게 있었다.

늘 북한에 대해 공세적 발언을 일심았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자 변변히 방어다운 방어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남쪽으로 도망을 간 데다, 국민들에게 계속 정부가 서울을 사수할 테니 동요치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거짓 선전을 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한강철교를 조기에 폭파함으로써 민간인의 퇴로를 원천봉쇄하여 적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든 점 등에서, 이승만 정부는 잔류했던 서울 시민들이 당한 물적·정신적 피해의 일차적 책임을 모면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부역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은 국회를 비롯한 양식 있는 지도층에게 *정부의 책임을 따질 겨를을 주지 않았고, 잔류한 서울 시민들에게서 터져나올 *불만과 비판을 미리 앞질리 봉쇄하는 구실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잔류파·도강파로 나뉘어 전개된 마녀사냥식 부역자 색출작업은 ‘반공=애국, 친공=반역‘ 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함으로써, 전후방을 막론하고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적 억압이 국민 전체를 대상의 로 광범위하게 자행되는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 

전쟁 이전 제주 4·3사건에 이미 국가기구 및 준국가기구에 의한 양민학살이 공산주의자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저질러져 당시 제주 인구의 20~25%에 해당하는 무고한 국미들이 회생된 적이 있었던 바, 전쟁 기간 내내 공비토벌과 통비분자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저질러진 양민학살은 이런 희생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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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난 직후 남한 각 지역에서 일어났던 보도연맹 가입자 집단총살뿐 아니라, 대전형무소 등 남한 각 지역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과사상범을 퇴각하던 국군과 경찰들이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무더기 총살시킨 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유족 및 후손들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한 양민학살 사건만 따져도 거창·산청·함양·문경·고양 금정굴·남원·밀양·부산 등 후방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다. 특히 빨치산의근거지였던 지리산 주변은 그 피해가 막심했다.

  **반공은 어떤 가치체계보다 우선순위에 놓이는 **절대적인 국가 지배이데올로기였으며, 용공 내지 친공은 이유를 막론하고 절대 용납될 수 없다는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가 남한사회에 두텁게 형성되었다. 그 역사적 계기는 전쟁자체에서 오는 경험도 있었지만, 전쟁 기간이나 전후戰後에 국가기구에 의해 이루어진 **‘정당한 폭력‘의 끔찍스러운 체험이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부역자 검거선풍 때 부역행위자로 처벌받은 당사자들뿐 아니라 그 가족과 후손까지도 오랜 세월 ‘빨갱이‘라는 오명을 쓴 채 많은 부분에서 국민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불우한 조건을 견뎌야 했다.

수복 직후 시작된 도강파·잔류파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얼마나 **경직된 이데올로기의 금압체계 속에서 **야만적이고 **광기어린 세월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예광탄 같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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