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과 그 이후>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 깜짜가 놀라 흠칫했다. 심지어 닉슨에게 적대적이었던 민주당 의원들조차 대통령으로 실제로 탄핵했다는 무겁고 괴로운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닉슨 시대의 대통령은 국민에게 "권위적이고 제왕적인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의 거짓말과 속임수가 안긴 배신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지만, 대통령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제 약점조차 다 내보이는 것이 일반화된 시대의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은 닉슨보다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더는 **경외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관대한 처분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생일이 1917년 11월 14일이니 자칫 2017년은 그의 출생 100년을 기녕하는 해가 될 뻔했다. 그를 더욱 못 견디게 한 것은 이 비극에 ‘관객의 연민‘이라는 필수 요소가 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딸과 함께 탄핵된 것은 물론 그의 부친이다. 박정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가 충분히 탈신화화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고 그 대신 그를 그 자리에 신화적으로 못 박고 말았기 때문이다.
183-5쪽
<깊이 있는 사람>
깊이 있는 작품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좋은 작품에는 있다고 믿는다. 인간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그 어둠 속에 앉아 있어본 작가는 대낮의 햇살에서도 영혼을 느낄 것이다. 내게 작품의 깊이란 곧 ‘인간 이해‘의 깊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을 존경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깊이 있는 사람‘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게는 한 인간의 깊이 역시 인간 이해의 깊이다.
인간의 무엇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인가. 나는 ‘타인의 고통‘이라고 평범한 답을 말할 것이다. 물론 이 대답 역시 진부하게 들린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진부해지기는커녕 날마다 새롭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성품이 곧 능력이다. 이 판단이 정치적으로 매우 순진한 것일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고만 싶다.
대통령이 대통령이면, 우리 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200-4쪽
<메릴 스트립의 용기>
그들은 반대자들을 배제 exclude하는 정도가 아니라 절멸 exterminate 시켜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배제에는 포함 include 이라는 반대말이 있지만 절멸에는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끝장내버리는 terminate일이다.
저들을 ‘괴물‘이라고 간주해버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나를 그들로부터 완벽하게 구별/구원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윤리적 판타지다.
그러므로 권력은 위험한 것이다. 배제 혹은 절멸에의 욕망을 강하게 품고 있는 자가 권력을 가지게 될 때 특히 그렇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언론이 필요한 것이다. **권력자가 자신의 욕망에 *패배하지 않도록 그의 욕망을 대신 감시해주는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혐오는 혐오를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선동합니다.
212-4쪽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1)>
여기서 **비판과 풍자와 조롱은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비판은 어떤 논리에 대항 논리로 반박하는 행위로서 나머지 둘과 명백히 다르다. 그러나 풍자와 조롱은 둘 다 웃음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자주 혼동된다. 이 둘을 구별해 보자.
첫째, 대상이 ‘강자인가 약자인가‘는 오래된 기준 중 하나다.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강자를 대상으로 할 때에만 풍자다. 그 때 그 일은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폭로하는 숭고한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적 권력자와 단순한 유명인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권력자는 대개 유명인이지만, 유명인이 언제나 권력자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이 권력자라면, 직업의 성격상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졌을 뿐인 사람은 유명인이다.
유명인을 향한다고 해서 조롱이 풍자로 변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매체 환경 속에서 실명이 노출된 유명인과 익명의 보호를 받는 네티즌 중에서 누가 더 강자인가. 유명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
둘째, 대상의 속성이 ‘선택인가 조건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권력자의 판단과 행위와 그 결과가 광범위하고 부정적인 대중적 영향을 끼쳤을 때, 그의 그런 선택과 관련된 사항들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가 스스로 선택한 바 없는 자신의 조건은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 장애인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누군가가 권력자들의 판단과 행위와 그 결과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외모와 성별을ㅇ 웃음거리로 만든다면 그 대상이 아무리 권력자라 해도 그 행위는 비열하다.
215-6쪽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2>
셋째, 그 웃음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이가 하는 문제. 풍자는 상호 토론을 제안하는 일이며 결국 대상에 영향을 미쳐 무언가를 바로잡기 위한 것일 터다. 그런 목적과 무관한 웃음은 미심쩍은 것이다.
여기서 죽음과 웃음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죽은 자도 풍자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생전 그의 부당한 판단과 행위와 그 결과를 평가하기 위해서, 또 여전히 그의 뜻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토론을 제안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 죽어가는 사람과 그의 죽음 자체는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웃음은 풍자에 동반되어야 하는 목적과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은 노무현‘을 풍자할 수는 있어도 ‘노무현의 죽음‘을 풍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무슨 학문의 자유가 아니라 언어로 행하는 시신 훼손일 뿐이다.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이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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